소설리스트

힘숨찐 옥탑방 억만장자-117화 (117/281)

117. 실종

채연서가 받은 R 크림이 주변 사람에게 넘어갔다. 어지간한 사람의 부탁은 거절할 수 있는데, 예비 형부나 이모, 절친처럼 거절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그녀의 손에 남은 R 크림은 두 개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개봉한 상태였다.

넉넉히 바르면 효과가 더 좋아서 그 하나는 부담 없이 썼다.

“많이 남는 줄 알고 팍팍 썼는데, 왜 이것밖에 안 남아.

더 보충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녀는 R 크림 생산에 관여한 관계자라 누가 얼마나 물량을 받아갔는지 안다.

“선우현 씨한테는 열 개나 받았으니 면목이 없고, 태양 백화점은 품절 됐고.”

R 크림을 대량으로 확보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최종훈 사장님이 200개나 인수했다던데.”

그렇다고 최종훈을 찾아가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럴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최종훈의 동생 최민영과 조금 더 잘 아는 사이다.

“민영 씨랑 밥이라도 먹으면서 떠봐야겠다.”

***

채연서는 디자인 업계는 물론이고 화가 중에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최민영도 그림을 그린다. 그녀는 전에는 체력이 약해서 외부 활동을 많이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친구나 아는 언니 동생이 많았다.

그녀는 활력 토마토를 거의 매일 먹게 된 후로는 체력 문제가 사라져 활발한 외부 활동이 가능해졌다.

그녀는 그동안 조용히 지낸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는 사람들을 만나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이 아는 그룹이 겹치는 일이 가끔 생겼다. 그때마다 얼굴도 보고 인사도 하고 가끔은 밥도 먹었다.

최민영은 채연서가 활력 토마토의 패키지 디자인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낸 덕분에 채연서도 최민영이 최종훈 사장의 동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은 그 후에 몇 번 따로 만나 밥도 먹고 전시회를 구경했다.

오늘 만난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R 크림이었다. 둘 다 R 크림을 듬뿍 바르고 다녀서 요즘 얼굴이 탱글탱글해졌다.

두 사람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채연서가 푸념했다.

“그래서 여덟 개나 빼앗기고 이제 겨우 두 개 남았다니까요.”

“난 열 개나 받았다는 게 더 놀랍네요. 난 동생인데도 겨우 세 개 받았는데요.”

“최종훈 사장님은 이백 개를 인수했다던데요?”

“우리 오빠는 그거 선물용으로 쓰잖아요. 영업이나, 아니면 직원 표창 상품 같은 거로요.”

채연서가 투덜댔다.

“나한테도 좀 선물하라고 해요.”

“앗! 설마 우리 오빠한테 관심 있어요?”

“나이 차이가 몇 개인데 설마요. 난 R 크림에 관심 있어요. 두어 개만 더 쟁여두면 딱 좋을 텐데.”

“두 개로 돼요?”

“지금 가진 거에 추가로 두 개면, 그거 다 쓰기 전에 선우현 씨가 또 만들겠죠. 설마 한 번만 만들고 끝나겠어요?”

“그렇구나…. 그럼 나도 더 팍팍 써도 되겠다.”

술을 마시는 두 사람에게 잘생긴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가 제안했다.

“저희도 두 명인데, 괜찮으시면 합석해도 될까요?”

***

채연서가 눈을 떴다.

“아. 머리 아파…. 어?”

그녀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몸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이게 무슨….”

산업스파이 조직 보스가 가면을 쓴 채로 말했다.

“그러게 잘생긴 남자가 주는 술이라고 넙죽 받아마시면 안 되지. 모르는 남자가 그 술에 무슨 약을 탔을지 알고 먹나.”

채연서는 깜짝 놀랐다.

“다, 당신들 누구야!”

“내 얼굴을 보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없는데, 그래도 누구인지 알고 싶나?”

“아, 아니요.”

그녀가 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최민영은 두 손이 묶인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민영 씨? 왜 바닥에….”

“아아. 내가 대화하고 싶은 건 채연서 씨라서. 마침 남는 의자도 없고.”

보스가 느긋하게 말했다.

“순순히 정보만 내놓으면 두 사람 다 풀어줄 테니까, 대화를 시작하지.”

채연서는 겁이 났다.

“뭐, 뭐가 알고 싶은데요? 다 말할게요!”

“R 크림 제조 비법.”

“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다 말한다더니?”

“저는 개발자가 아니라 디자이너란 말이에요.”

보스가 실실 웃었다.

“그래. 사실 제조법을 안다면 JHC 테크 최종훈이 알겠지. 그런데 최종훈은 납치하기엔 너무 거물이잖아.”

채연서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놈들은 민영 씨가 최 사장님 동생이라는 건 모르는구나. 눈치채면 우리 둘 다 죽을 수도 있겠어.’

그녀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는 평범한 디자이너예요. 제조법은 진짜 아는 게 없어요.”

“평범하지는 않지. 명품 디자이너 채연서의 이름은 꽤 알려져 있으니까. 그런 유명한 디자이너가 전혀 모르는 사람과 무작정 일할 리가 있나. 그러니까 당신은.”

보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R 크림 개발자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 거야. 그 정보만 말해도 살려줄게.”

***

선우현이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서 옥상에 펼쳐놓았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탁 트인 옥상에서 치킨과 맥주. 캬아.”

- 좋으시겠습니다.

“수선아. 내가 네 것까지 먹어줄게. 맛있겠….”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최종훈이었다.

선우현이 전화를 받았다. 최종훈이 본론부터 꺼냈다.

- 제 동생이 연락이 안 됩니다.

“그냥 전화를 안 받는 거 아닙니까?”

- 아닙니다. 휴대폰이 꺼져 있습니다.

“나도 휴대폰을 종종 꺼놓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 실종 신고는 이미 했습니다. 인맥을 동원해서 바로 대응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우현이 물었다.

“연락이 안 된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 아까부터 계속 전화해봤는데 안 됩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민영은 성인이다. 전화를 좀 안 받았다고 해서 실종신고를 하고 인맥까지 동원하는 건 흔한 대응은 아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최종훈은 괜히 그럴 사람이 아니다.

“최 사장님. 다 큰 성인이 연락 안 되는 일은 흔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의심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 제 동생은 잠은 절대로 밖에서 안 잡니다. 그래서 1박 2일짜리 여행도 안 갑니다. 그런데 이미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깊은 밤이다.

“오늘은 마음이 바뀌었을 수 있잖습니까?”

- 지금은 활토 덕분에 덜하지만, 잠자리가 바뀌어서 불편하게 자면 꿈을 꿀 확률이 높아집니다.

“꿈은 원래 꾸잖습니까?”

- 이건 선우현 씨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최종후닝 망설이다가 설명했다.

- 제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꿈을 꾸곤 했습니다. 한 번 꾸면 며칠씩 같은 꿈을 꿉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습니다.

선우현의 표정이 진지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동생부터 찾아야겠군요. 단서는 있습니까?”

- 휴대폰이 꺼지기 전 마지막 위치는 확인했습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선우현이 전화를 끊었다.

“같은 꿈의 반복이라…. 마가 끼었나?”

김수선의 목소리도 진지해졌다.

- 곤란한데요.

“일단 사람부터 찾자.”

선우현의 스마트폰으로 최민영의 휴대폰 마지막 접속 위치가 전송됐다.

선우현이 옥상에서 내려가다가 신나리의 원룸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리야. 치킨 좋아하지?”

신나리가 문을 벌컥 열었다.

“당연하죠!”

“옥상에 손도 안 댄 치킨하고 맥주 차려놨으니까 너 먹어라.”

“옥상 오빠하고 같이요?”

“서윤 씨하고 같이. 둘이 먹기 적당한 양일 거다. 난 갈 곳이 있는데, 식기 전에 돌아오는 건 무리야.”

“넹!”

옆집의 문이 열렸다. 박서윤이 나와서 말했다.

“조심하세요.”

“어디 가는 줄 알고요?”

“선우현 씨가 뜨거운 치킨을 놔두고 가야 할 정도라면, 위급한 일이겠죠.”

“간장 치킨으로 시켜놨으니까 서윤 씨도 꼭 같이 먹어요.”

***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옥탑방 건물을 떠나 목적지로 향했다. 한밤중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선우현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위치에 도착했다. 간판만 봐도 뭘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술집이네.”

선우현이 안으로 들어가 술집 주인을 만났다. 거기서 최민영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최종훈이 경찰에 제공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술집 주인이 불평했다.

“아까 다른 형사님들한테 다 말했는데, 왜 또 물어요? 여기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라니까요.”

그는 선우현도 아까 다녀간 형사들처럼 경찰이라고 착각했다. 보여준 사진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선우현은 그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소속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먼저 온 팀에게 CCTV 영상도 줬습니까?”

“우리 CCTV는 고장이 났습니다.”

“언제요?”

“형사님들이 오셔서 확인해보니까 먹통이 돼서 오늘 건 다 지워졌더라고요.”

선우현이 인상을 살짝 썼다.

“하필 오늘?”

술집 주인이 얼른 말했다.

“잠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껐다가 켰더니 이제는 잘 됩니다.”

선우현이 가게를 나와서 주변을 보았다.

“이 근처 CCTV 영상도 경찰이 이미 다 복사했겠지?”

- 그 술집에서는 영상을 구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라도 했을 겁니다.

“하필 오늘 CCTV가 고장 난 게 우연일 리는 없지. 누가 손을 쓴 거야. 전문가의 냄새가 난다.”

-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가 최민영 씨를 미리 관찰하고 있었으면 추적이 쉽지만.”

김수선은 지원위성에서 지상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과거까지 볼 방법은 없다.

“이미 실종되고 한참 지났으니 난감하네.”

- 쉽지 않겠네요.

***

채연서는 겁에 질렸다.

납치범들은 R 크림 개발자의 정체를 말하라고 협박했다.

그녀는 개발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선우현 씨.’

그녀가 옆을 슬쩍 보았다. 최민영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산업스파이 조직의 보스가 말했다.

“시간 그만 끌지. R 크림 개발자가 누구인지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 친구는 죽는다.”

그녀가 조직원들을 보았다.

‘다섯 명.’

선우현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았다.

‘정면에서 싸우면 선우현 씨가 이겨.’

정면 승부라면 선우현이 다섯 명을 상대로 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당한 것처럼 약을 탄 술을 마실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서는 안 돼.’

그렇다고 모른다고 버티면 최민영과 함께 살해당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채연서가 머리를 굴리다가 일단 잡아뗐다.

“제가 직접 R 크림 개발자를 만난 건 아니에요.”

보스가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럼 네 친구는 죽어야지.”

부하가 칼을 꺼냈다.

채연서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중간에서 일을 연결해준 브로커가 있어요! 그 사람에게 물어볼게요!”

보스가 손을 내렸다. 부하도 칼을 집어넣었다.

“그 사람은 R 크림 개발자를 아나?”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전화해서 물어봐.”

“네? 네! 제 휴대폰이….”

보스가 다시 손짓했다. 다른 부하가 구형 휴대폰을 가져왔다.

“네 휴대폰을 켜면 위치추적이 되겠지. 이걸로 걸어.”

“저기, 제가 전화번호를 외우지를 못해서….”

그녀의 앞에 노트북 화면이 펼쳐졌다. 화면에 그녀의 휴대폰에 들어있던 연락처 목록이 쭉 떴다.

“우리가 이미 네 폰을 조사했다.”

그녀는 선우현과 문자나 톡으로 R 크림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있나 생각해 보았다.

선우현은 톡을 보내봤자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연락할 때는 항상 전화를 직접 걸었다.

‘다 뒤져봤어도 단서는 없을 거야.’

그녀가 연락처 목록에서 선우현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런 후에 전화를 걸었다.

***

선우현이 술집 앞에서 궁리했다.

“경찰 쪽에서 정보를 빼낼 방법을 찾아보자. 의심 가는 곳 리스트라도 있으면 그 지역을 지원위성과 지상에서 수색….”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온 전화는 잘 받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최종훈이 따로 고용한 사람의 전화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일단 받았다.

선우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저 채연서인데요. 제 휴대폰이 방전돼서 다른 사람 폰을 빌려서 전화하는데요.

“연서 씨. 지금은 바쁘니까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 아니, 저기, 뭐 좀 물어보려고요!

“간단히 물어봐요.”

- R 크림 개발자 말인데요. 혹시 제가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선우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휴대폰의 마이크를 손으로 막고 작게 말했다.

“나를 남처럼 이야기하네?”

김수선도 수상하게 생각했다.

- 선장님이 R 크림 개발자인 걸 모를 수가 없는데,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연서 씨에게 문제가 생겼어.”

선우현이 술집을 돌아보았다.

오늘 최민영이 실종됐다. 그런데 채연서가 전화해서 수상한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아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문제가 생겼다면, 같은 일에 휘말렸을 수도 있겠지.”

선우현이 휴대폰 마이크에서 손을 떼고 채연서에게 질문했다.

“혼자 있습니까?”

- 그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