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기술 격차
양미나도 R 로션이 달란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안다.
“아니, 진짜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조금 전에는 없었잖아? 그 짧은 시간에 이걸 어디서 구했어?”
구하니가 대답했다.
“선물 받은 거야.”
“너는 활력 토마토도 그렇고, 어디서 이런 걸 자꾸 선물 받는 거야!”
“너도 착하게 살아봐.”
양미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R 크림에 고정됐다.
“그럼 하나만 나한테 팔아? 응?”
“선물 받은 거라서 안돼.”
“이거 구하기 진짜 어려운 건데, 도대체 누구한테 받은 거야? 나도 그 사람하고 좀 친하게 지내….”
구하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야! 알려고 하지 마라. 확 철 들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빨리 꺼져. 공연 준비해야 해.”
***
R 크림이 공급된 경로는 세 개다.
제일 많은 물량은 태양 백화점에서 특별판매 방식으로 나갔다. 백화점에서 맡은 물량은 700개였다.
그 특판 물량은 이미 예전에 다 팔렸다.
유소율이 회의실에서 백화점 매출 그래프를 손으로 가리키며 환성을 질렀다.
“R 크림 특판 이후에 매출 늘어난 거 봐요! 대박이 났어요! 다른 백화점들의 기존 VIP 고객을 우리가 빨아들였다고!”
직원이 문제점을 설명했다.
“유 이사님. R 크림 판매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면, 그 VIP들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마케팅을 강화해요!”
“이미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게 필요합니다.”
“맞아요. 우리는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이 더 필요해요!”
***
최종훈은 R 크림 200개를 받았다. 그는 R 크림을 주로 거래처에 선물로 주거나, 아니면 직원 사기 진작용으로 사용했다.
홍보팀장이 말했다.
“언론사에 뿌릴 수 없는 게 아쉽습니다.”
백만 원짜리 화장품을 언론인에게 주면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에 걸린다.
“어쩔 수 없지요.”
“뒤로 조용히 챙겨달라는 기자들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다 걸리면 홍보팀에서 총대 메고 들어갈 수는 있고요?”
홍보팀장이 얼른 대답했다.
“법이 엄격해서 그건 어렵다고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우현은 100개만 남겼다. 900개는 돈을 받고 팔았지만, 100개는 디자이너 채연서나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문제가 있었다.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좁으면 R 크림이 남아돕니까?
“수선아. 나한테는 네가 있잖아.”
- 지상에 내려가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그 정도면 인간관계가 충분히 넓은 겁니다.
“그리고 이게 남는다고 닳는 건 아니잖아. 레드 포션의 보존 기간이 짧다고 해도 화장품 유통기한보다는 길어. 놔두면 결국 다 나갈 거야.”
- 놔두다니요? 새 R 크림을 만들어 파셔야죠.
“새 레드 포션은?”
R 크림이 그렇게 좋은 효과가 있는 건 오천 년을 숙성한 레드 포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지구연합에도 그렇게 오래된 레드 포션은 없었다.
- 포션 하나 더 열심히 복원 중입니다.
“에너지와 자원이 모자라지?”
- 우주 쓰레기를 좀 획득했습니다. 그걸 쥐어짜서 만든 에너지와 자원을 복원에 썼습니다. 대신에 저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는 중입니다.
“우리 수선이가 돈맛을 봤구나.”
- 저는 아직 돈맛을 하나도 못 봤습니다만, 우주왕복선 부품값은 벌어야지요.
세 가지 유통 통로 중에 선우현이 뿌린 건 모두 그의 지인의 손에 들어갔다. 그중에는 다시 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최종훈이나 태양 백화점에서 나간 건 상황이 좀 달랐다.
최종훈의 경우는 선물 받은 상대가 R 크림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가치를 알아도 돈이 더 중요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물량이 드물게 중고 거래로 나왔다. 그런 건 웃돈을 주면 구할 수 있었다.
태양 백화점의 VIP 고객 중에는 화장품 관련 업계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자연히 R 크림이 화장품 회사로도 흘러들어 갔다.
화장품 회사들은 R 크림을 웃돈을 주고 따로 사거나 백화점을 통해 정식으로 샀다. 그런 후에 확보한 R 크림을 철저히 분석했다.
대형 화장품 회사 사장에게 연구소 이사가 보고했다.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R 크림을 분석했습니다만, 기존 크림과 유의미한 차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기능성 성분이 있을 텐데?”
“기능성 성분들이 다양하게 검출되긴 했습니다만, 대부분 기존에 크림 제조에 흔히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대부분?”
“기존 크림에는 안 쓰는 성분도 검출되긴 했습니다.”
“그럼 그거겠지!”
“아닙니다. 다각도로 확인해봤지만, 자연계에 흔히 존재하는 성분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그러면 재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뜻인가? 분석한 데이터 그대로 크림을 조합해봤어?”
“최대한 유사하게 조합해봤습니다만….”
“왜? 효과가 없어?”
“기존의 평범한 크림의 효과밖에는 없었습니다.”
사장의 앞에는 R 크림의 빈 통이 있었다. 크림은 이미 연구소로 보내 분석하고 빈 통만 남겨두었다.
“그럼 더 분석하고 더 연구해. 이 놀라운 피부 개선 효과의 비밀을 알아내라고.”
“분석 샘플이 모자랍니다.”
사장이 화를 냈다.
“더 구해봐!”
***
한국에 있는 화장품 회사만 R 크림을 분석하는 게 아니다.
백화점 VIP 고객 중에 외국 회장품 회사 관계자가 있었다.
그 회사에서 R 크림을 시험한 후에 결론을 내렸다.
“이 크림의 제조법만 알아내면, 세계 명품 화장품 시장은 우리 회사가 먹을 수 있어.”
“한정판으로 파는 걸 보면, 원료가 희귀할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 희귀하면 할수록 더 비싸게 팔면 되니까.”
그런데 그 회사는 제조법을 알아내려는 방식이 한국 화장품 회사와 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조법을 반드시 손에 넣어!”
***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R 크림을 생산한 공장을 알아냈다.
그건 어디서 정보를 빼낼 필요도 없었다.
인터넷에 R 크림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그 공장의 직원이 SNS에 자기네 회사에서 생산했다고 자랑했다.
그걸 본 화장품 회사 담당자들이 사실 여부를 조사했다.
사장이 담당자에게 물었다.
“사실이냐?”
“예. 그 공장에서 천 개를 만들었습니다. 크림 용기의 디자인이 같은 걸 보면 확실합니다.”
“어떤 원료로 만들었는지도 알아냈어?”
“그 공장에서는 기본적인 크림을 베이스로 하고, 거기에 고객이 원하는 기능성 원료를 추가해주는 방식으로 소량 생산을 합니다.”
“기능성 원료?”
“녹차 추출물이나 달팽이 진액 같은 것을 고객이 가져오면 추가해서 크림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럼 R 크림도 그렇게 만든 건가?”
“예. 직접 가져온 기능성 원료를 추가했습니다.”
“그러면 공장에는 제조법이 없겠군.”
“예. 아쉽게도….”
“그 기능성 원료의 성분 분석은 따로 해봤대?”
“그 공장은 뭘 가져오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첨가해주는 곳이라서….”
“모른다는 소리군.”
“예.”
사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방법을 말해봐.”
“R 크림의 성분 중에서 그 공장에서 기본 베이스로 쓰는 것을 모두 제외하면, 남는 게 그 기능성 원료일 겁니다.”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접근하면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겠어!”
“하지만, 그 기능성 원료가 기본 베이스와 섞이면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켰으면, 원래 상태로 분리하기가 쉽지 않아서….”
사장이 멈칫하다 물었다.
“김 이사. 나랑 장난해?”
“죄송합니다.”
“그래서 분석이 가능하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그것도 연구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샘플이 필요합니다.”
“끄응. 수소문해서라도 구해봐. 쓰다 남은 거라도 찾아서 사들여.”
“알겠습니다.”
***
한국 화장품 회사는 자체 연구소를 동원해 크림을 분석하거나 공장에서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
외국 회사 중에는 산업스파이에게 그 일을 맡긴 곳이 있었다.
산업스파이 조직 하나가 한국에 들어왔다. 그 조직은 돈만 주면 기술도 훔쳐주고 다른 것도 훔쳐준다.
그 조직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R 크림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데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산업스파이 조직의 보스가 말했다.
“의뢰인이 왜 아직도 제작법을 알아내지 못하냐고 난리다.”
“보스.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공장 놈들은 주는 대로 만들기만 했다고 하고, 판매하는 곳에서도 어떤 원료를 썼는지 모른답니다.”
“그래도 알아내야지. 이 기술만 확실히 빼가면 삼백만 달러가 우리 손에 떨어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
“그건 압니다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보스가 결정했다.
“플랜 B로 가야지. R 크림을 만든 놈은 제조법을 알겠지. 그놈을 찾아서 정보를 뽑아내면 돼.”
“그게 제일 확실하긴 하죠.”
그러려면 누가 R 크림을 만들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정보가 없다.
“제작자가 누군지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그의 부하들은 이미 그 정도는 조사했다.
“태양 백화점에서는 유소율 이사가 직접 관리한다고 합니다.”
“위험도는?”
“태양 백화점 사장의 손녀입니다.”
“리스크가 너무 커. 또 누가 있어?”
“JHC 테크에서도 R 크림을 구할 수 있는데, 거기는 사장이 직접 관리합니다.”
“최종훈?”
“예.”
그들은 산업스파이 조직이다. 그래서 JHC 테크가 어떤 곳인지 안다.
“최종훈은 너무 거물이야. 안돼. 누구 또 없어?”
“R 크림을 공급한 곳은 태양 백화점과 JHC 테크 뿐이라서….”
선우현은 주변 사람에게 R 크림을 나눠주기만 했지, 판매하거나 영업 활동에 쓴 건 아니다. 그래서 그 조직의 정보망에 이름이 뜨지 않았다.
“알 만한 사람이 정말 없어? 너희들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
부하 하나가 말했다.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봐.”
“R 크림의 패키지 디자인을 한 디자이너는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응?”
“R 크림은 태양 백화점 자체 생산품이 아닙니다. JHC 테크도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개발자가 디자이너와 직접 접촉해 디자인을 맡겼을 수 있습니다.”
보스가 씩 웃었다.
“그래. 거기에 구멍이 있었어. 디자이너가 누구야?”
***
채연서는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의 패키지 디자인 전체를 담당했다.
덕분에 그녀는 R 크림을 충분히 받았다.
“아니야. 부족해.”
열 개나 받았으니 혼자 쓰기엔 충분했다. 그녀의 부모님과 언니에게 하나씩 나눠줘도 남았다.
그런데 그녀가 패키지 디자인을 맡았다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았다.
“내가 내 무덤을 팠어.”
그녀가 R 크림을 가족에게 나눠주면서 제작자에게 직접 받았다고 자랑했다. 열 개나 받았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에게는 다시 가족이 있다.
그녀의 언니 채승아의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연락했다.
- 예비 처제. 내가 남이야? 우리 가족 같은 사이 아니야?
“언니 거 같이 써요.”
- 승아의 R 크림을 내가 쓴다고? 승아 성격 몰라? 날 잡아먹을걸?
이모도 연락이 왔다.
- 연서야. 내가 너 어릴 때부터 세뱃돈 준 거 다 모으면 꽤 되지?
“이모. 설마 이모는 아니죠?”
- 맞아. R 크림으로 갚아.
두 명 정도는 괜찮았다. 그래도 남는 게 있었다.
R 크림은 광고를 전혀 안 하고 완판됐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잘 몰랐다.
그런데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디자인을 새로 했는지 한 번씩 확인해본다. 그 디자인이 적용된 제품도 검색해보곤 했다.
인터넷에는 R 크림의 효능에 관한 이야기가 꽤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그녀의 피부 상태가 좋아진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인터넷에 있는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여고생일 때부터 친한 친구가 불평했다.
“연서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같이 나이 먹는데 너만 피부가 좋아지니까 좋아? 나한테 샘플 정도는 줄 수 있잖아.”
“미안. R 크림은 샘플이란 게 원래 없어.”
“대신 하나 사다 주는 건?”
“한정판이라서 나도 추가로 살 수는 없어. 태양 백화점에서는 이미 품절이래.”
“너 남는 거 있지?”
“아니야! 없어!”
“너 거짓말 할 때 표 나는 거 알아?”
“응?”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으응?”
“너 옛날에 외박할 때 내 핑계 댄 게 몇 번이더라? 내가 너희 집 찾아가서 폭탄 터트리는 수가 있다?”
“야. 너도 외박할 때는 내 핑계 댔잖아.”
“그러니까 같이 죽자는 거지? 나는 R 크림을 위해서라면 자폭할 수 있어.”
“드리겠습니다. 너 주려고 하나 따로 챙겨놨어.그러니까 자폭은 넣어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