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가벼운 선물
신나리의 친구들이 그녀의 원룸에 놀러 왔다. 그러다 R 크림을 발견했다.
“야. 이건 뭐야? 병이 되게 있어 보인다?”
“그거? 옥탑방 오빠가 쓰라고 준 거야.”
“옥탑방? 이거 고급진 디자인이라서 비싼 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하긴. 비싼 거면 나리한테 줬겠어?”
신나리가 말했다.
“아니거든? 옆방 언니 줄 때 같이 받은 거니까 비쌀 수도 있거든?”
“난 아니라고 본다.”
“발라도 돼?”
“발라라. 발라.”
친구들이 R 크림을 손가락으로 푹푹 찍어 발랐다.
“다른 거랑 똑같은데?”
“크림이 거기서 거기지. 무슨 프리지어 꽃향기라도 날 줄 알았니?”
***
배우 남미연이 화장품용 미니 주걱으로 R 크림을 조심스럽게 떠서 얼굴에 발랐다.
그녀가 도구를 쓰는 이유는 얼굴에 바를 때 손가락에 흡수돼서 사라지는 크림조차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거 넉넉히 발라야 효과가 더 좋은데, 자꾸 남은 게 줄어든다. 그래서 화나.”
여자 매니저가 말했다.
“하나 더 있잖아요.”
R 크림은 손님 한 명당 한 개씩만 판매한 한정판 상품이다. 그런데 사전판매분을 산 50명은 정식 판매 때도 하나를 살 수 있었다.
“한정판이라 언제 또 팔지 모르잖아. 열 개쯤 사뒀어야 든든했는데. 파는 곳이 더 있는지는 알아봤어?”
“일단 백화점은 은하에서 독점으로 파는데요.”
“거긴 품절 났잖아.”
“JHC 테크라는 회사에 물량이 좀 있나 봐요.”
“응? 그래? 그럼 거기 CF 해주면 이거 넉넉히 주나 알아봐.”
“그런데 JHC는 기술 개발 전문 회사라서, TV CF는 안 해요.”
남미연이 불평했다.
“아이 씨. 내가 잘해줄 테니까 CF 좀 하라 그래. 물론 출연료는 현물로 받는 조건으로.”
***
홍보팀장이 최종훈에게 CF 건을 보고했다.
“TV CF? 우리가 그걸 왜 하지?”
“기업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서입니다.”
“갑자기?”
“남미연이 출연해준다고 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응? 출연하겠다는 배우가 남미연이야?”
“예. 사장님도 아시죠?”
“알지. 나 대학 다닐 때는 남미연이 진짜 청춘스타였는데. 그 남미연이 우리 회사의 CF라….”
“직원들이 평소에 자랑하려고 해도 우리 회사 이름을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답니다. 우리가 그래도 첨단기술을 다루는 중견기업인데 말이죠. 확 지르시죠?”
“남미연이라…. 좋긴 하다. 그래서 CF 출연료는 얼마를 생각하고 있대?”
“R 크림 오십 개만 달라는데요?”
“어? 뭐?”
“개당 백만 원이니까 딱 오천만 원어치지요. 진짜 싸게 해주는 거라던데….”
“현금 오천이면 모를까 어디 감히 그걸. 나도 이백 개밖에 없는데. 기각!”
“예. 기각…. 헉! 이백 개나 있으십니까? 사장님. 그거 혹시 남으면….”
“안 남아. 모자라.”
“제 와이프가 저보고 아내를 위해서 크림 하나 못 구해주냐고 구박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맨밥에 김치만 먹고 나왔습니다.”
“아침밥이 나오는 게 어디야?”
***
최종훈이 업무 협의를 위해 다른 회사 사장을 만났다. 그는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R 크림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건 사모님 드리시라고 챙겨왔습니다.”
“어? 이거 집사람이 좀 구해오라던 건데.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거 구하기 어려운 건데, 어떻게….”
최종훈이 자랑했다.
“R 크림을 개발한 분과 제가 친합니다. 그리고 이 크림을 생산한 공장은 제가 직접 골랐습니다.”
“이야아. 역시 JHC 테크는 기술 네트워크가 차원이 다르군요. 이거 더 믿음이 갑니다. 하하하.”
“별말씀을요.”
“그럼 R 크림 하나만 더 어떻게….”
“효과를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이게 워낙 만들기 어려운 크림이어서 말이죠. 그래도 다음에 또 생산하게 되면, 제가 사장님 것은 꼭 챙겨두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최종훈은 R 크림을 영업에만 쓴 게 아니다. 회사 직원을 표창할 때 보너스로 현금과 함께 R 크림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홍보팀장에게도 하나 챙겨주었다.
김충식 본부장이 말했다.
“사장님. 저도 그거 하나만….”
“김 본부장은 표창 대상자도 아닌데 왜?”
“마누라가 그거 하나 구하지 못하냐고 바가지를….”
“내가 진짜 제수씨 때문에 준다.”
이백현도 얼른 끼어들었다.
“저도 오늘 집에 가서 큰소리 좀 치게 하나만 주십쇼.”
“큰소리는 평소에 좀 치고 살아라.”
“우리 사나운 와이프, 사장님이 소개해줘서 만나다 결혼한 건데요.”
“이 소장한테는 꼭 주려고 했어. 자. 다 쓰면 또 이야기해.”
***
가수는 가창력이 중요하고 배우는 연기력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외모가 안 중요한 건 아니다.
배우는 비슷한 연기력을 가졌다면 예쁘고 잘생긴 사람의 경쟁력이 더 좋다. 탈이 좋은 사람은 더 좋은 배역을 맡을 수 있다.
게다가 외모의 느낌에 따라 맡을 수 있는 배역이 달라진다.
남미연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포기하려던 배역을 R 크림 하나로 손에 넣었다. 그 소식이 연예계에 쫙 퍼졌다.
남미연의 경우만 소문이 난 게 아니다. 먼저 R 크림을 받은 사람들이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그 소식도 널리 퍼졌다.
배우들은 다들 R 크림을 구하고 싶어 했다. 여자 배우는 물론이고 남자 배우도 원했다.
그런데 R 크림을 파는 곳은 태양 백화점 한 곳뿐이다. 게다가 한정판이라 물량도 얼마 없었다.
배우들이 소속사에 항의했다.
“화장품 하나 구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소속사에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거 한정판이라서 구하기가 어려워.”
“돈 더 준다고 해요! 얼마면 돼요? 내가 보태요?”
“판매 금액이 개당 백만 원으로 딱 정해져 있더라. 돈 더 줘도 안 받는대.”
판매 금액 제한 조건은 선우현이 걸었다.
그래서 더 난리가 났다. 값이 계속 오르면 포기하는 고객이 나올 수 있는데, 백화점 VIP 고객 정도면 그 정도 금액으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문이 날 때쯤에는 이미 재고가 없었다.
“그거 벌써 품절 났어. 이제는 태양 백화점에도 남은 게 없어.”
“그럼 리셀러를 찾아요! 웃돈 받고 다시 파는 사람이 있을 거 아냐!”
“VIP 고객 한 명당 한 개씩만 팔았다더라. 그중에 다시 파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 다들 자기가 쓰려고 하지.”
“남미연 선배님 소식 못 들었어요? 나도 오디션 볼 때 R 크림 바르고 가야 한다고요!”
배우들만 난리가 난 건 아니다.
가수는 배우보다는 외모의 영향을 덜 받지만, 그렇다고 안 받는 건 아니다. 가수가 예쁘거나 잘생기면 인기에 플러스 알파가 붙는다.
R 크림은 가수들도 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정판이라 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50살이 된 고성연이 R 크림을 사용한 후의 모습이 TV 드라마로 방영됐다.
그녀는 그 드라마의 이전 회차까지는 30대 남자 상대역과 나이가 많이 차이나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메이크업으로 실제보다 젊어 보이게 하고 드라마 속 설정도 상대보다 누나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 남자 배우도 메이크업을 했기 때문에 차이를 좁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중간 회차부터 갑자기 확 젊어진 모습으로 TV에 나왔다.
피부 미용에 관심이 큰 사람들이 고성연이 쓴 화장품이 뭔지 추적했다.
그러면서 R 크림이란 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본격적으로 퍼졌다.
그런 느낌의 바이럴 마케팅은 이미 워낙 많아서, 인터넷만 보고 R 크림의 효과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연예인들이 아껴 쓰는 귀한 크림이라는 건 알려졌다.
***
구하니는 KMTV 방송국에서 준비한 공연에 참여했다.
그녀는 요즘 활동을 줄였지만 그렇다고 활동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오늘처럼 많은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공연이 있으면 참여하는 편이다.
양미나가 구하니의 대기실을 찾아왔다. 그녀도 오늘 무대에서 노래한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서 잡담 몇 마디를 한 후에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R 크림을 꺼냈다.
“너 이거 써봤니? 이게 요즘 그렇게 유명한 R 크림이야.”
“아니.”
양미나가 씩 웃었다.
“어머어. 못 구했구나? 하긴. 나는 소속사에서 구해줬는데, 너는 1인 기획사라 네가 직접 못 구하면 방법이 없겠네? 오호호호.”
구하니가 인상을 썼다.
“미나야. 자랑하러 온 거면 꺼져줄래? 공연 준비해야지?”
양미나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훗. 나 간다?”
구하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언제 철 들려나. 죽을 때 되면 철이 들까?”
잠시 후에 노크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구하니가 문을 보며 말했다.
“가라니까….”
선우현이 들어오다가 물었다.
“그냥 가요?”
구하니가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뇨! 친구가 온 줄 알았어요. 방금 왔다 갔거든요. 걔를 친구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요.”
선우현이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공연 시간 다 돼서 나도 이것만 주고 갈 겁니다. 오늘 티켓값 대신입니다.”
선우현은 오늘 공연 입장권도 인터넷으로 신청했지만 떨어졌다. 대신에 구하니가 관계자용 입장권을 하나 구해주었다.
선우현이 쇼핑백을 구하니의 앞쪽 탁자에 올려놓았다. 구하니가 그 쇼핑백을 알아보았다.
“어머. 활력 토마토네요? 고마워요. 공연 전에 먹으면 딱 좋겠어요.”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같이 넣었어요. 유정 씨하고 같이 써요.”
“다른 거요?”
“보면 알아요. 난 갑니다.”
선우현이 대기실을 나갔다. 그런 후에 다짐했다.
“이번에는 꼭 오른쪽 복도로 가야지.”
구하니는 대기실에서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활력 토마토 개별 포장용 상자가 하나, 처음 보는 상자가 세 개 들어 있었다.
그녀가 활력 토마토부터 꺼냈다.
“공연 전에 미리 먹어둬야 더 신나게 노래하지.”
그녀가 토마토를 먹으며 다른 상자 세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뭐지? 이것도 먹는 건가?”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양미나가 다시 들어오며 말했다.
“하니야. 나한테 부탁하면 내가 공연 전에 R 크림을 한 번 바를 수 있게 해줄….”
양미나의 눈에 탁자 위에 있는 상자들이 들어왔다.
“어?”
구하니는 활력 토마토를 자랑하려고 일부러 천천히 먹었다.
“음. 딜리셔스. 역시 맛있어.”
그런데 양미나는 활토가 아니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상자들을 보고 있었다.
양미나가 물었다.
“그게 왜 여기 있어?”
구하니가 양미나의 시선을 확인했다. 그녀는 상자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는 척하며 느긋하게 물었다.
“있으면 안 돼?”
“안 되지.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아! 빈 상자지? 어디서 빈 상자만 구해온 거지?”
구하니가 토마토를 다 먹고 티슈로 손과 입을 닦으며 말했다.
“흔들어봐.”
양미나가 상자 하나를 들어보았다. 무게가 느껴졌다.
R 크림은 50g에 불과하지만, 그걸 담은 통은 두께가 있어서 무게가 조금 나간다.
양미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물었다.
“이게 진짜면 내가 열어봐도 되겠지?”
“어쩐 일로 물어보니?”
“귀한 거니까!”
양미나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R 크림이 들어있었다.
“이럴 리가….”
그녀가 상자에서 크림을 꺼내보았다. 봉인을 따지도 않은 진짜 새 크림이었다.
양미나가 흥분해서 따졌다.
“이게 왜 너한테 있어! 나도 소속사를 달달 볶아서 겨우 구했는데, 넌 혼자 일하면서 이걸 어디서 구해!”
구하니도 그 통을 보고 나서야 그게 뭔지 깨달았다. 양미나가 조금 전에 똑같이 생긴 크림을 직접 보여주며 자랑했다.
‘미나가 그렇게 자랑하던 R 크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이걸 선우현 씨가 만들었나 보다.’
놀라기는 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선우현 씨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탁자 위에 있는 R 크림 상자를 확인했다.
‘세 개니까….’
구하니가 일부러 말했다.
“하나는 유정이 줘야겠다. 오늘도 내 일일 매니저 봐주러 왔으니까.”
“어? 어? 이걸 막 주고 그래도 돼?”
“어. 돼.”
선우현이 안유정과 나눠 쓰라고 했다.
양미나가 얼른 말했다.
“하니야! 나도 하나만 줘!”
“너 아직도 안 갔니?”
“하니야!”
“꺼져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