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숨찐 옥탑방 억만장자-114화 (114/281)

114. 얼굴에 사기 치는 값

고 감독이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적절한 메이크업에 조명만 잘 쓰면 20대 후반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어. 거기다 남미연 씨는 연기력도 최고, 대중의 인지도도 최고. 그리고 지금 이 풋풋한 모습을 영화 개봉 전에 예고편과 예능을 통해서 알리면?’

고 감독이 손을 비볐다.

“그 대본은 처음부터 우리 남미연 씨를 여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쓴 겁니다. 다른 사람은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남미연이 피식 웃었다.

“뻥 치시네.”

“그래도 하실 거죠?”

“내가 속아준다. 우리 잘해봐요.”

***

차에서 여자 매니저가 말했다.

“언니. R 크림 돌려주실 거죠?”

남미연은 R 크림 통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화장품이 다 있네. 진짜 마음에 쏙 든다.”

“안 주겠네요.”

“줄게. 백화점에 연락해서 이거 몇 개 더 사서 너도 하나 가져.”

“그 크림 하나에 백만 원이에요.”

“어머어! 얼굴에 사기 치는 값으로 백만 원이면 싸지! 이거 빨리 더 사와. 아니, 다 사와!”

***

남미연만 그런 일을 경험한 게 아니다.

여자 배우 고성연은 50살이다.

그녀는 현재 30대 남자 배우와 연애하는 드라마를 찍고 있다. 1, 2화는 며칠 전에 방영됐다.

그녀가 맡은 배역은 드라마 속 설정상으로는 남자 배우보다 살짝 연상이다.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나서 나이 차이가 설정보다 많이 나 보인다는 댓글이 꽤 달렸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확 젊어져서 촬영장에 나타났다. 여전히 메이크업과 조명으로 커버해야 하지만, 이제 시청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와. 누님.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거예요? 하룻밤 사이에 확 젊어지셨어요.”

“훗. 크림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지금 촬영하는 장면이 방송되려면 20일은 지나야 한다.

그런데 연예계 소문은 20일이나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날 바로 촬영장에서 일어난 일이 소문 났다.

남미연이 고 감독의 영화 주연으로 캐스팅된 이유도 알려졌다.

연예인들이 흥분했다.

***

VIP 고객에게 뿌린 크림의 효과도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활력 크림을 바른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 자랑했기 때문이다.

연예계도 소문이 퍼진 건 마찬가지였다.

R 크림은 열 명의 연예인에게 선물로 제공됐다. 그중에서 남미연과 고성연 두 명만 R 크림을 써봤다.

R 크림의 효과가 소문이 나면서 다른 연예인들도 선물 받은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거 나도 받은 것 같은데? 여기 어디…. 있다! 나도 R 크림이 있었어!”

“태양 백화점에서 뭐 보내준 거 없어? 없다고? 나는 왜 없는데!”

R 크림이 없어서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일단 한 번 써본 사람은 계속 사용했다. R 크림의 효과는 그만큼 확실했다.

태양 백화점 직원이 회의실에서 유소율에게 보고했다.

“R 크림 구매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홍보용 사전 판매 50개는 끝났으니까 마음 상하지 않게 잘 설명해요.”

“정식 판매는 언제 하느냐는 문의가 계속 들어와요. 연예인이나 기획사 관계자가 직접 찾아올 때도 있어요.”

“정식 판매 준비는요?”

판매 담당자가 보고했다.

“사흘 뒤입니다. 매장에 전시하고 판매하는 게 아니라서, 고객 응대와 배송 위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며칠 뒤에 정식 판매가 시작됐다.

R 크림은 수량이 제한된 한정판이라 매장에 진열하는 식으로는 팔지 않는다. 소문을 듣고 연락한 사람 위주로 팔았다.

예상했던 문제가 첫날 아침부터 터졌다.

“내가 열 개 산다니까요?”

“고객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제품은 한정판입니다. 그래서 한 분당 하나씩만 판매하고 있습니다.”

유소율은 R 크림을 팔아서 돈을 남기려는 게 아니다. 다른 백화점의 우수 고객을 태양 백화점으로 빼앗아오는 무기로 R 크림을 사용했다.

“한정판이면, 설마 이번 한 번만 팔고 끝은 아니죠?”

“R 크림의 추가 물량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럼 R 크림이 새로 들어오면 바로 연락 줘요. 또 사러 오게.”

“많은 분이 찾고 계셔서 꼭 팔 수 있다는 보장이….”

“박옥선 여사는 예약을 받았다던데?”

박옥선은 초기 판매분 50개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분은 우리 백화점 VIP시라서요.”

“그래요? 간단하네. 나도 백화점 옮기면 되겠네.”

“환영합니다. 고객님.”

***

태양 백화점의 R 크림 이벤트는 다른 백화점에도 알려졌다. 그 백화점의 VIP 고객이 항의하는데 모를 수가 없다.

“왜 여기는 그 크림이 없어요?”

“고객님. 크림이라면 다양하게 있습니다. 어느 제품을 찾으시는지요?”

“다른 거 말고, 은하에서 파는 거 있잖아요. R 크림.”

“아. 그건…. 저희도 제조사와 협의 중입니다.”

“그래요? 그럼 언제 들어오는데요?”

“그건 저희도 잘….”

어디서 만드는지도 모르는데 협의가 되고 있을 리가 없다. 담당자는 문의가 들어오면 그렇게 대응하라는 지시만 받았다.

고객이 불평했다.

“뭐야. 은하는 이미 팔고 있는데 아직 협의도 안 끝난 거예요? 실망인데? 백화점 옮겨야 하나?”

다른 백화점들도 R 크림을 찾는 고객들의 문의를 받느라 진땀을 흘렸다.

왜 R 크림을 살 수 없는지 항의하는 고객의 수는, 전체 고객 중에서 아주 일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고객들이 크림 하나에 백만 원쯤은 지불할 수 있는, 백화점의 특별 관리 고객이라는 데 있었다.

백화점 경영진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우리 지점이 몇 개인데, 단독 백화점인 은하에 영업력으로 밀린다는 게 말이 되나! 당장 R 크림을 우리 매장에서도 팔아!”

다른 백화점들도 이 문제를 간단히 보지 않았지만, 청명 백화점은 아예 난리가 났다.

청명은 태양 백화점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규모가 비슷한 단독 대형 백화점이기 때문이다.

청명 백화점의 사장 곽도성이 회의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활력 토마토 때도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R 크림이라니! 게다가 그때는 스무 개였는데 이번에는 칠백 개야! 우리는 왜 은하한테 두들겨 맞고만 있어? 다들 일 이따위로 할 거야?”

“사장님. 저희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

“노력만 하지 말고 결과를 내! 내 눈앞에 R 크림을 가져와! 우리도 그걸 당장 팔아!”

“사장님.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은 같은 곳에서 만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무슨 문제!”

“활력 토마토를 곽수천 이사가 담당했는데,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우리 쪽으로는 개별적인 공급까지 막혀서….”

곽수천은 사장인 곽도성의 손자다.

“그놈 당장 들어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제대로 보고하라고 해! 그리고 다들 R 크림을 구해! 웃돈 주고 사 오든 훔쳐오든 알아서 구하라고!”

***

선우현이 디자이너 채연서를 만났다.

채연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R 크림 말이에요. 그거 지금 난리가 났다면서요?”

“일반 판매는 안 하는데, 난리가 난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패키지 디자인을 내가 했다는 거, 이쪽 업계에서 아는 사람은 알거든요. 나한테 구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연락이 여러 번 왔어요.”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쓸 것도 모자란다고 했죠. 뭐, 사실이니까요.”

그녀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 뒤쪽을 붙이고 손가락을 위아래로 벌렸다 닫으며 말했다.

“모자란 거 사실이거든요? 제 R 크림은요?”

선우현이 쇼핑백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열 개면 되겠습니까?”

“꺄아! 열 개나! 대박!”

그녀가 쇼핑백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씩 꺼냈다.

“이건 내 거, 이건 엄마 아빠 거. 이건 언니 거. 그리고 언니 남자친구 거에, 이모….”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친척 것까지 다 챙기려면 열 개가 아니라 수십 개가 있어도 모자랄 거야. 언니까지만 주고 언니 남친부터는 컷 해야지.”

선우현이 말했다.

“그러면 다섯 개만 가져와도 충분했겠네요.”

“네?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해요? 나머지는 다 내가 쓸 거거든요? 자주 많이 바르면 효과가 더 좋죠?”

“덕지덕지 바르는 건 의미 없는데, 적당히 자주 바른다면야….”

“거봐요.”

“그리고 그거 공짜 아닌데 굳이 열 개나….”

“디자인 담당자 특별 할인가잖아요. 80% 파격 할인!”

“그거야 채연서 씨 쓸 것만 그렇고.”

“네?”

“다른 사람에게 넘길 것까지 할인해줄 수는 없잖아요?”

“그….”

채연서가 양손을 맞잡고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제가 다 쓰겠다고 하면 믿어주실 거예요?”

선우현이 피식 웃었다.

“속아줘야겠네.”

“옵빠! 알라뷰!”

“속아주는 건 없던 일로.”

“앗! 알라뷰는 취소!”

***

박서윤은 선우현의 건물 투룸에 산다.

그녀는 종종 옥상에 올라가 탁 트인 전망을 즐기곤 했다. 요즘은 그녀가 주로 앉는 의자도 생겼다.

“오늘은 바람이 참 시원하고 좋아요.”

마실 것은 그녀가 커피를 사서 올라왔다.

“과자가 잘 구워져서 가져왔어요.”

그녀는 옥상에 올라올 때는 종종 간식을 만들어 왔다.

그녀는 자취 경력이 긴 데다가 길성에 취직한 후에는 요리 학원도 다녔다. 요리에 재능도 있었다.

선우현이 과자를 먹으며 말했다.

“역시 서윤 씨가 만든 건 다 맛있네요.”

건물 관리 알바를 하는 대학생 신나리가 같이 먹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서윤 언니는 진짜 완벽하다니까요. 얼굴도 연예인처럼 예쁘지, 요리도 엄청 잘하지, 길성 비서실에 다니니까 능력도 쩔지. 내가 남자였으면 언니한테 반했을 거예요.”

박서윤이 웃었다.

“에이.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나 되게 평범해.”

“어머. 언니가 평범하면 옥상 오빠랑 나는 뭐죠? 사람 아닌가?”

선우현이 말했다.

“야. 나는 사람이다. 너만 사람 아니야.”

“오빠나 나나 백수랑 날라리 학생이니까 거기서 거기 같은데.”

“나 백수 아니다.”

“나보다 더 많이 놀잖아요.”

“그건 인정. 아. 잠깐만.”

선우현이 옥탑방에 들어가 R 크림을 하나 가져왔다. 전용 패키지로 포장된 상태였다.

“이거 서윤 씨가 써요. 오늘 과자랑 커피값입니다.”

신나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앗! 목걸이? 반지? 명품 지갑? 뭐죠? 이거 무슨 의미죠? 오르지 못할 나무에 도끼질 하나요? 아! 안타깝습니다. 도끼가 도탄 됐습니다!”

“그냥 크림이다.”

박서윤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R 크림이 들어있었다.

“이건….”

“서윤 씨처럼 토마토를 넣은 건 아니고, 토마토에 쓰는 영양 성분을 직접 넣어서 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신나리가 눈을 깜빡이다가 선우현을 보며 물었다.

“오빠. 내 거는요?”

“넌 스무 살이라서 얼굴에 아무것도 안 발라도 돼.”

“저 알고 보면 피부 상태가 안 좋거든요? 술 많이 마셔서 맛이 갔거든요?”

“자랑이다.”

“서윤 언니만 사람이고 나는 호박 마차 끄는 생쥐인가보다. 신데렐라는 좋겠다. 열두 시 땡 할 때까지 유리구두도 신어보고. 난 마차 끌어야 하는데.”

선우현이 R 크림을 하나 더 가져왔다.

“옜다.”

***

박서윤은 이튿날 회사에 출근했다.

그녀가 일하다 잠깐 쉬는 시간에 크림을 꺼냈다. 아직 써본 적은 없다.

‘너무 예쁘게 나와서 쓰기 아깝다.’

옆에 있던 여자 과장이 갑자기 박서윤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잠깐! 박 대리. 스톱!”

“네?”

“이거 R 크림이잖아!”

“아세요?”

“알지! 이사님들이나 계열사 사장님들이 우리 비서실 연줄로 구할 수 있냐고 여러 번 물어보셨거든.”

“아…. 이거 귀한 거구나.”

“이걸 서윤 씨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 태양 백화점에서는 VIP 고객에게만 판다던데?”

“선물 받았어요.”

“응? 누군데? 남자친구? 대박! 남자친구가 백화점 VIP야?”

“제가 남자친구가 어디 있어요?”

“응? 그럼 뭐야? 누가 막 들이대?”

“그게 아니라요. 저번에 제가 가져온 크림 있잖아요.”

“아. 그거 진짜 좋았지.”

“그건 제가 그냥 활토를 넣어서 만들어본 거고요. 이건 활토를 개발하신 분이 정식으로 만들어서 출시한 거예요. 효과는 이게 더 좋대요.”

여자 과장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 그럼 서윤 씨는 R 크림을 개발한 사람하고 아는 사이야?”

“어…. 조금.”

“대박! 서윤 씨! 나 이거 하나만 구해줘! 내가 돈은 그대로 줄게!”

둘의 대화를 들은 다른 직원들도 어느새 다가왔다.

“나도!”

“나도!”

박서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생산한 수량이 적어서 따로 팔 건 없대요.”

“아. 그래. 나도 한정판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그런 귀한 걸 서윤 씨를 줬단 말이야? 왜? 혹시 서윤 씨한테 환심 사려고?”

“아니에요.”

R 크림은 어제 옥상에 같이 있던 신나리도 받았다.

“그냥 준 거예요. 그냥.”

“에이. 아닌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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