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R 크림 III
유소율이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백화점으로 돌아왔다. 싱글벙글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직원들이 속삭였다.
“유 이사님이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시지?”
“점심 약속 있다고 급히 레스토랑 예약하라고 하시던데.”
“누구 만나셨나?”
“데이트?”
“어머!”
유소율이 부사장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할머니와 같이 있었다.
“엄마! 할머니!”
“남들 있을 땐 부사장님. 사장님.”
“엄마. 나 방금 선우현 씨 만나고 왔어.”
“그래? 제안은 해봤어?”
“했지! 천 개 중에 칠백 개를 땄어! 추가금 안 줘도 되고, 판매에 들어가는 비용 정도는 우리가 떼도 된대.”
선우현은 판매 대금을 다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비용 정도는 알아서 정산해 가라고 했다. 백화점 판매 수수료가 아니라 순수 판매 비용만 정산해야 해서 그 비율은 낮았다.
“역시 우리 딸! 해냈구나!”
할머니가 물었다.
“잘했다. 그런데 나머지 삼백 개는? 설마 청명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
“에이. 유통업체로 안 가요. 이백 개쯤은 JHC 테크에서 처리할 거에요. 우리 통해서 그 크림이 소문이 나면, JHC에서 영업용으로 쓸 건가 봐요.”
“유통으로만 안 풀리면 돼. 정말 최선의 결과를 냈구나.”
“할머니 손녀가 이렇게 능력이 있어요.”
“그래. 잘했다. 2차 판매 때는 다른 백화점들도 경쟁이 붙을 테니까 빼앗기지 않게 그 사람 꽉 잡아.”
“2차 생산은 언제 될지 모르는데요?”
“설마 한 번만 만들고 끝내겠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잡아.”
유소율이 오늘 점심을 떠올렸다. 선우현은 그녀가 아니라 맛있는 음식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꼬시려면, 맛집 리스트라도 찾아봐야 하려나.”
할머니가 물었다.
“그런데 나머지 백 개는 어디에 쓴다니?”
***
상품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유소율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어제 다들 R 크림을 써봤죠? 이거 우리가 팔기로 했어.”
R 크림의 효과를 경험한 직원들이 환성을 질렀다.
“와!”
“얼마에 파실 거예요?”
유소율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여자 대리가 물었다.
“설마 만 원은 아닐 테고, 십만 원이요?”
“백만 원이요.”
“네?”
“하나 백만 원.”
“저기…. 그럼 직원 할인가는….”
“이거는 특판 상품이라 남는 게 없어요. 순수 판매 비용 외에는 다 제작자에게 가요.”
“그러면 할인이 없겠네요.”
“수량도 칠백 개뿐이에요.”
다른 직원이 손을 들었다.
“유 이사님. 저희야 R 크림의 효과를 알지만, 고객은 효과를 모르잖아요. 그럼 샘플은 얼마나 뿌리시게요?”
“이 상품은 샘플이 없어요. 공짜로는 단 1g도 안 나가요.”
“네? 그럼 어떻게 백만 원에 팔 수 있….”
“지난번 VIP 행사 때 방문한 고객들에게 직접 전화해요. 그분들이 일단 써 보면, 알아서 홍보해줄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부사장님과 사장님 결재까지 떨어진 건이에요. 그러니까 구체적인 방법을 회의해 봅시다.”
***
박옥선은 활력 토마토 추첨 때 남편이 꽝을 뽑은 일이 생각만 하면 짜증이 났다.
“내가 진짜 활력 토마토 팩 꼭 해보고 싶었는데.”
투덜대는 그녀에게 태양 백화점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 활토 특판 행사 때도 백화점에서 따로 연락하고 초대권을 보내주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에 그녀가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활력 토마토 행사를 또 하는 건가요?”
- 아니요. 고객님. 그래서 연락드린 건 아니고요.
“쳇. 그럼 됐어요. 다른 건 지난번에 다 샀으니까.”
- 저희가 이번에 최고급 한정판 크림을 독점 공급하게 됐는데요.
“화장품 많아요. 됐으니까 활토나 다시 물량 들어오면 연락해요.”
- 바로 그 활토를 생산한 곳에서 만든 크림이에요.
박옥선은 당황했다.
“네? 활토는 농부가 키운 거 아니에요?”
- 어머. 고객님. 그런 대단한 토마토를 어떻게 농부가 혼자 키우겠어요? 최첨단 시설에서 키웠다고 알고 있답니다.
“그럼 그 크림도 혹시… 활토 팩 같은 효과가 있나요?”
- 똑같지는 않은데요.
“아. 그러면 그렇지.”
- 놀라운 효과가 있다는 점만은 비슷하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특히 잔주름 제거에 탁월해서, 한 번만 발라도 효과를 알 수 있답니다.
박옥선은 이런 식으로 인기 상품에 묶어서 파는 상품에 여러 번 당해봤다.
‘놀라운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는 화장품이 어디 있다고.’
“생각은 좀 해볼게요.”
- 그런데 워낙 귀한 크림에 한정판이라, 사전판매물량은 50개밖에 없어요.
“네? 겨우?”
- 네. 그래서 고객님께 특별히 연락 드렸답니다.
“사야겠네요.”
- 다만, 가격이 백만 원입니다.
“응? 크림 하나에?”
박옥선이 활토를 생각해 보았다. 활토의 가격도 백만 원이었다.
‘진짜 비슷한 효과가 있나? 크림이면 오래 쓸테니까 팩 한 번 하면 사라지는 활토보다 저렴한 거 아냐?’
상담원이 설명했다.
- 워낙 귀한 크림이라 샘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객님한테 꼭 필요한 크림이라 연락 드렸는데, 생각이 없으시면 다른 분께….
“하나 살게요. 속는 셈 치고 사지 뭐. 효과 없으면 태양 백화점은 고객 한 명 잃는다고 생각해요.”
- 지금 즉시 저희 직원이 배송하겠습니다.
“어머. 지금 바로?”
- R 크림은 특별하니까요.
***
이튿날 박옥선이 태양 백화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R 크림 이거 뭐예요!”
- R 크림에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효과가 너무 좋아요! 그런데 이거 시간이 지나니까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내 피부 돌려줘요!”
- 고객님. 의약품이 아니라 크림이니까 계속 발라주셔야죠.
“당연히 그렇죠?”
- 계속 사용해 피부를 꾸준히 관리하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당연하겠죠. 이거 더 살게요. 다섯 개, 아니, 열 개 보내요. 선물로 좀 뿌리게.”
- 고객님.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고객님께는 정식 판매 전에 미리 연락 드린 거고요. 사전 판매는 50개 한정입니다. 그건 이미 모두 판매됐습니다.
일반인이게 먼저 판매한 양은 50개가 아니라 40개였다. 10개는 홍보용으로 따로 보냈다.
그런데 그 40개 조차도 연락을 받은 사람이 모두 산 건 아니다. 사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태양 백화점에서는 전화를 더 돌려서 40개 판매량을 채웠다.
박옥선이 말했다.
“그럼 정식 판매분을 미리 팔면 되겠네!”
- 정식 판매분도 650개 한정인데, 순차적으로 판매 예정입니다.
“예약 걸어놓을게요! 예약!”
- 판매 일정이 나오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특별한 크림이라 정식 판매도 일 인당 한 개로 수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유소율이 물었다.
“반응이 어때요?”
“1차 판매분 50개 중에 반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26명이 추가 구매를 문의했습니다.”
“50명 다가 아니라?”
“24명은 아직 써보지 않았을 겁니다. 기존에 쓰던 크림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하긴.”
“유 이사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소문이 퍼지기를 기다려요. 내 생각으로는 며칠 안 걸릴 거예요.”
사전판매대상자 50명 중에서 10명은 연예인이다. 유소율은 연예인 열 명에게 R 크림을 선물로 보냈다.
R 크림은 얼굴에 주름이 있거나 피부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쓰면 효과가 더 좋다. 피부가 원래 탱탱한 사람은 표가 덜 난다.
그래서 유소율은 R 크림을 젊은 배우가 아니라 중견 배우들에게 보냈다.
그 배우들에게 돈을 내고 사라고 하면 코웃음 칠 것 같아서 그냥 선물로 보냈다. 크림값은 광고비 대신으로 쳤다.
“연예인 쪽으로 보낸 열 개는?”
“반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배우 남미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소속 기획사 사장이 말했다.
“고 감독이….”
“날 깠다고? 왜? 어째서? 나 남미연이야! 고 감독이 유명해? 내가 유명해? 어떻게 나를 깔 수 있어?”
사장이 남미연을 달랬다.
“미연아. 물론 네 커리어가 고 감독보다 월등하지.”
“그럼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든대?”
“네 연기력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대한민국에 연기로 너를 깔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없어.”
“그런데 고 감독은 왜 나를 까는데?”
사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미연아. 너도 알다시피 여주인공 설정이 스물여덟 살이잖아.”
남미연이 발끈했다.
“그, 그게 뭐! 나이 몇 살 정도는 메이크업으로 커버 되잖아!”
“너 이제 마흔 살이야. 메이크업으로는 띠동갑으로 만들기 어려워.”
“그럼 여주인공 나이를 조금 올리면….”
“풋풋한 청춘 로맨스인데 그게 되겠니?”
남미연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나 왜 마흔 살이야?”
“어?”
“나 왜 마흔 살인데!”
“네가 먹은 나이를 왜 나한테 그러냐?”
“그럼 나 이 영화 못 해?”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영화에 다른 배역이 하나 있긴 한데….”
“설마 그거 아니지?”
“그거 맞는데….”
“나보고 배역을 애 엄마로 바꾸라고? 나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야!”
“왜 안 갔을까? 좀 가지 그랬어.”
“캬아악!”
“아. 맞다. 그 성질 때문에 못 갔지.”
***
남미연이 차에서 씩씩댔다.
“나 아직 하고 싶은 영화 많아. 청춘 로맨스가 더 찍고 싶다고!”
씩씩대던 그녀의 눈에 여자 매니저의 얼굴이 보였다.
“응? 너 오늘 얼굴이 왜 그렇게 깔끔해? 너 혼자 피부과에서 시술이라도 받았어?”
여자 매니저가 손으로 뺨을 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어머. 크림만 발랐을 뿐인데?”
“크림이라니?”
“태양 백화점에서 언니한테 신제품 크림 보내준 거 있잖아요. R 크림이요.”
“내가 그런 듣보잡 크림을 쓰겠니? 피부 트러블 생기면 어쩌라고.”
“그래서 그거 제가 발랐거든요.”
남미연에게는 평소에도 여러 화장품 회사에서 선물을 보내준다. 그런 건 남미연이 안 쓰면 매니저나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나눠 가졌다.
여자 매니저가 설명했다.
“그걸 발랐더니 트러블도 사라지고 피부에 윤기도 생겼어요.”
“으응?”
남미연이 매니저의 뺨을 당겨서 피부를 살폈다.
“진짜 피부가 좋아졌네?”
매니저는 남미연보다 두 살 젊은 서른여덟이다. 그런데 피부는 그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트러블 안 생겨?”
“있던 트러블도 다 사라졌어요.”
“내 크림 내놔.”
“네? 아니, 언니는 그거 안 바른다면서요.”
“고 감독 영화에서 주연 맡으려면 진흙이라도 찍어 발라야 하나 고민하던 참인데, 이것도 발라봐야지. 효과 없으면 돌려줄 테니까 냉큼 가져와.”
***
남미연은 이튿날 오전에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어머.”
어제와는 피부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녀가 손으로 뺨을 눌러보았다.
“이 정도면 몇 년은 젊어진 느낌인데?”
이십 대 때의 피부로 돌아간 건 아니다. 그래도 삼십 대 한창때의 피부처럼은 보였다.
“잠깐. 그러면 피부가 이렇게 좋을 때 메이크업으로 나이를 좀 더 커버하면….”
그녀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샵 예약해.”
- 지금요?
“빨리 예약 잡아. 메이크업하고 나면 오늘 고 감독을 만나서 담판을 지을 거야. 감히 나를 까? 고 감독 죽었어.”
***
고 감독은 남미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주연 달라고 오는 걸 텐데, 어떻게 잘 거절하지?”
걱정하는 사이에 남미연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고 감독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이러셔도 안 되는 건…. 어?”
고 감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어어?”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며칠 사이에 저렇게 젊어지지?’
자세히 보면 젊어 보이는 메이크업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크업은 마법이 아닌데….’
남미연이 말했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고 감독. 이래도 그 배역 나한테 못 줘요?”
“아니, 그게….”
“카메라 테스트하죠. 이 메이크업은 카메라로 찍어서 보면 더 젊어 보인다?”
고 감독이 일단 카메라를 가져와 남미연을 찍었다. 아예 영화 촬영용 카메라에 조명까지 켜놓고 찍었다.
그런 후에 결과물을 확인했다.
카메라 속에서 그가 구상한 영화 속 여주인공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남미연이 스물여덟 살처럼 보였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겁니까?”
“내가 원래 동안이라.”
“아니, 도대체 겨우 며칠 사이에 얼굴에 무슨 사기를 쳤기에….”
남미연이 도도한 표정으로 물었다.
“됐고, 그래서 여주인공 배역은 누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