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강변
이대현은 혹시 박서윤이 괜히 튕겨보는 건가 싶어 박지웅에게 눈짓을 슬쩍 했다.
박지웅이 강하게 질렀다.
“이봐요. 내 친구가 그쪽에 관심이 있어서 이러는 겁니다.”
“저는 관심이 없어서요. 가세요. 아니면 사람 부를까요?”
“뭐 이런….”
여기가 클럽이나 술집이면 더 들이대 보겠는데, 이곳은 백화점에서 특별 초빙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여기서 술집처럼 난리를 치면 바로 소문이 난다.
이대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이대현과 박지웅이 남들의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구하니가 근처에 있다가 다가왔다.
“단호하게 거절하네요?”
“저렇게 찝쩍대는 사람을 많이 경험해 봤거든요. 그래서 눈빛이랑 말 몇 마디면 무슨 수작인지 알아요.”
“아. 서윤 씨는 예쁘니까 살면서 귀찮은 일이 많았겠네요. 나도 좀 경험해봐서 아는데.”
“네. 예전에는 저를 만만하게 보고 그러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런 사람 완전 싫어해요.”
이대현이 구석으로 가서 씩씩댔다.
“씨발. 저 여자는 구하니한테 가는 징검다리 같은 거였는데, 씨도 안 먹히네.”
“야. 너무 쉽게 물러난 거 아냐? 네가 누군지 더 확실히 알려주면 넘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
“여기서 말썽을 부리면 뒷감당이 안 돼. 그러니까.”
이대현이 박서윤을 힐끗 보며 말했다.
“누구인지 좀 알아내 봐.”
박지웅이 스마트폰을 슬쩍 보여주었다.
“사진 찍어놨어. 연예계 쪽 사람 같으니까 그쪽에서 일하는 놈한테 사진 보낼게.”
***
유소율은 그녀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추첨에 사용한 트릭 상자는 그녀의 집무실 회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토마토가 남은 게 없어.”
홍보용 활력 토마토는 오늘 행사에 다 소모했다. 특별 이벤트용으로 빼놓은 것까지 팩에 사용했다.
“고객 반응은 정말 최고였지.”
그래서 좋았다. 태양 백화점의 VIP 행사는 이전에는 이렇게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받지 못했다.
오늘 성과를 분석해 보았다.
“저 고객 중 일부는 주로 방문하는 백화점을 우리 쪽으로 바꿀 거야. 기본 상품은 어차피 비슷하니까, 특별 상품의 경쟁력 차이가 VIP 고객이 백화점을 옮길 이유가 되겠지.”
모든 손님이 아니라 일부만 옮겨오는 건, 이 행사가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이 났다.
“이 행사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돼. 정기적으로 진행해야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할 수 있고, 집토끼를 빼앗기지 않아.”
행사를 또 하려면 활력 토마토를 더 구해야 한다.
그런데 활력 토마토의 판매 금액은 고정되어 있다. 선우현에게 돈을 더 제시해서는 살 수 없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오늘 VIP를 그만큼 모을 수가 없었겠지.”
오늘 모인 사람 중 일부는 태양 백화점의 기존 VIP 고객이다.
나머지는 태양 백화점도 이용하지만 다른 백화점에서는 VIP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그 사람들을 빼앗아오려고 오늘 행사를 기획했다.
“오늘 온 손님이 활력 토마토를 선물용으로 쓸 수는 있어도, 재판매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그게 활력 토마토의 문제다. 다른 경로로 구할 수가 없다.
“그게 직거래 장터에 올라올 물건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행사에 필요한 물량을 구할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역시 선우현 씨밖에 없어. 가서 인사라도 다시 해야겠다.”
유소율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사무실 밖 복도에 청명 백화점의 곽수천이 서 있었다.
“어?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소율아. 나 너한테 사과하러 왔어. 그날 미안했다.”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나 이사 자리에서 잘렸어. 여기는 오늘 파티 알바하러 왔어.”
“파티장에서 너 못 봤는데?”
“난 밖에서 짐을 옮겼지.”
유소율이 곽수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매번 충돌하는 사이지만 어렸을 때는 친했던 시절도 있었다.
“알았으니까 가라.”
곽수천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 사과를 받아주는 거야?”
“생각해 볼 테니까 가라고.”
“저기 그럼….”
“왜?”
“탄원서에 사인 좀 해줄 수 있을까?”
“으응?”
“내가 다 써왔거든. 사인만 해주면 돼.”
유소율이 한숨을 푹 내쉰 후에 말했다.
“야. 꺼져.”
“소, 소율아.”
“이러려고 나 찾아왔니? 꺼져.”
“하지만….”
“아!”
“해줄 거야?”
유소율이 뒤로 돌아가 사무실 문이 잠겼는지 확인했다. 곽수천이 당황해서 물었다.
“어? 소율아? 그거 왜 확인해? 설마 나 의심하는 거야?”
“응. 너 의심하는 거 맞아. 빨리 꺼져. 사람 부르기 전에.”
***
행사가 끝날 때쯤에 박지웅이 이대현에게 말했다.
“기획사에서 일하는 놈한테 보냈더니, 자기네 스카우트 담당이 저 여자를 알아봤다더라.”
이대현이 히죽 웃었다.
“역시 어디 연습생이나 신인이지? 꼬셔봐야겠는데?”
“연예인이 아니래.”
“응?”
“길성 비서실에서 일하는 미녀라더라.”
“회사원이라고? 아니, 저 얼굴로 왜? 연기가 전혀 안 되나?”
“몰라. 그 회사 스카우트 담당도 다른 회사 스카우터한테 길성에 근무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더라.”
이대현이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월급 받아 사는 회사원이라는 거잖아.”
“그렇지. 여기는 길성 임원이라도 수행하러 왔나 봐.”
“그럼 꼬시기 더 쉽겠는데?”
“꼬시게? 그럼 구하니는?”
“구하니는 이 파티에서 못 꼬셨으면 끝인 거야. 그럼 꿩 대신 닭이라도 먹어야지.”
박지웅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 쟤 한 명만 꼬시면….”
“너는 쟤가 친구 있으면 소개해줄게. 아. 쟤 나간다. 따라가자.”
***
박길성이 차에 탔다. 차는 기사가 운전했다.
박길성이 차 밖에서 배웅하고 있는 박서윤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지? 가는 길이면 데려다줄 테니까 타.”
“아닙니다. 저는 지하철 타면 됩니다.”
박길성은 박서윤이 선우현의 건물에 산다는 걸 안다. 기사가 듣고 있어서 일부러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돌아가는 길인데도 굳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계속 말하면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 기사가 박길성의 사람이긴 하지만, 박서윤의 비밀을 공유할 수는 없다.
박길성의 아들들은 전처의 아들이기도 하다. 전처에게 정보가 넘어가지 않게 하려면 작은 위험도 조심해야 한다.
“그러면….”
박길성이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집에는 택시 타고 가.”
박서윤이 환한 얼굴로 지폐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박길성이 기사에게 말했다.
“가지.”
“네. 회장님.”
차가 출발한 후에 박길성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안 되지만 용돈 주는 기분이군.’
박서윤은 오만 원을 지갑에 챙겨 넣었다. 그런 후에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용돈 받았다.”
그녀는 출퇴근을 위해 택시를 탄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녀에게 택시는 비상사태에나 타는 교통수단이다.
“가는 길에 화장품 재료 좀 사야겠다.”
선우현의 오토바이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섰다.
“서윤 씨. 지하철?”
“네.”
“탈래요?”
“네!”
선우현이 예비 헬멧을 꺼내주었다. 박서윤이 헬멧을 썼다.
김수선이 불평했다.
- 위험한 오토바이보다는 안전한 지하철을 타고 혼자 가라고 하시죠?
“사고 나도 레드 포션 쓰면 안 죽어.”
- 선장님. 도르신?
박서윤이 오토바이 뒷좌석에 탔다. 선우현이 말했다.
“갑니다.”
오토바이가 출발했다.
박서윤이 두 팔로 선우현의 허리를 꽉 잡았다. 어설프게 잡으면 위험할 수 있어서 아예 등에 가슴을 붙이고 허리를 감쌌다.
이대현과 박지웅이 탄 차가 그곳에 나타났다.
박지웅이 말했다.
“저거 아까 그 오토바이 새끼 맞지? 둘이 아는 사이인가 본데? 남친인가?”
이대현이 욕을 했다.
“저런 새끼가 VIP 행사에 어떻게 왔나 했더니, 저 여자를 통해서 초대권을 구한 거구나.”
“어떻게 할 거야?”
이대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오토바이를 따라가며 말했다.
“내가 골키퍼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몰라?”
“당연히 골키퍼를 치우겠지. 애들 모을까?”
“아까 활토를 못 따서 짜증 나니까, 빨리 모아서 따라오라고 해. 이 스트레스를 풀어야겠어.”
“애들 모으려면 좀 챙겨줘야 하는 거 알지?”
“따블 준다고 해.”
“흐흐. 알았어.”
***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을 미행하는 차를 발견했습니다.
“서윤 씨를 미행하는 거겠지.”
- 선장님을 미행하는 겁니다.
“응? 누군데?”
- 아까 주차장 앞에서 본 스포츠카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 그놈들. 그냥 보내주려고 했더니 굳이 따라오네.”
- 따돌리실 거면 도주로를 안내하겠습니다.
“너 나 놀리는 거지? 나보고 도망치라고?”
- 오토바이 뒤에 사람을 태운 채로 싸우면 위험합니다만?
“내가?”
- 선장님이 아니라 괜히 휘말린 박서윤이요.
“그것도 그러네.”
- 도망치실 겁니까?
“아니. 오토바이 세울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선우현이 박서윤에게 제안했다.
“한강 보러 갈래요?”
“네? 갑자기요?”
“행사장에서 많이 먹었으니까 소화도 시킬 겸 운동 좀 하게요.”
박서윤도 오늘 실컷 먹었다.
“음…. 네. 좋아요. 참. 돌아가는 길에는 화장품 재료 파는 가게에 들러도 될까요?”
“화장품이 아니라 만드는 재료요?”
“오늘 당첨된 활력 토마토로 재생 크림을 만들어보려고요. 아까 행사장에서 보니까 팩을 하면 피부에 좋길래요.”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운동 끝나면 들릅시다.”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한강 쪽으로 향했다.
스포츠카 조수석에서 박지웅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한강이 나오는데? 저것들 데이트하러 가나 보다.”
이대현이 입맛을 다셨다.
“사람 없는 곳으로 가면 좋겠는데.”
“흐흐. 저쪽으로 가면 조용한 곳이 나오기는 해. 생태공원 쪽이라 밤에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
“잘 안다?”
“으쓱한 데 찾아서 많이 가봤으니까.”
“난 주로 호텔을 이용하니까 저런 데는 안 가서 잘 몰라.”
“어어? 어. 그래.”
선우현이 한강공원과 연결된 생태공원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쪽은 낮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종종 보이지만 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사물을 구분할 수는 있게 해주었다.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세운 곳에는 작은 주차장에 음료 자판기 한 대가 서 있었다.
선우현이 그 주차장 자판기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으며 물었다.
“커피?”
“밤에는 커피는 좀 그렇지만, 오늘은 금요일 밤이니까 괜찮겠죠?”
“자판기에 커피 종류가 많네요.”
“저는 탑으로 주세요.”
선우현이 금속 병에 담긴 커피 두 개를 뽑았다.
박서윤이 커피를 받으며 물었다.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선우현이 병 커피의 뚜껑을 돌려 따며 말했다.
“여기는 처음 옵니다.”
“네? 그런데 왜 여기로….”
“여기 오면 보는 사람이 없어서.”
박서윤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왜 사람이 없는 곳에 굳이….”
김수선이 말했다.
- 놈들이 곧 도착합니다.
선우현이 작은 주차장의 진입로를 보았다. 스포츠카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들어왔다.
박서윤이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있네요.”
“내 손님입니다.”
“네?”
“아. 손놈이겠구나.”
스포츠카가 작은 주차장 한복판에 정지했다. 이대현과 박지웅이 차에서 내렸다.
이대현이 실실 웃었다.
“이야아. 다시 만났네?”
“그러게. 주차장에서 잠깐 본 거로 여기까지 쫓아오고. 시간이 남아도냐?”
“너 말고. 이 새끼야.”
이대현이 박서윤을 보며 말했다.
“박서윤 씨. 아까는 그렇게 차갑더니, 저놈 만나려고 그랬나?”
선우현이 박서윤에게 물었다.
“아는 놈들입니까?”
“아까 행사장에서 저한테 찝쩍대길래,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아.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수선아. 저놈들 목표가 나라며? 나를 쫓아온 거라며?”
-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너 오늘 전투지원이 좀 그렇다?”
- 행사장 내부는 제가 볼 수 없잖습니까?
“우리 수선이는 참 당당해.”
- 그게 제 장점입니다.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