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통수
선우현이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유소율이 바짝 긴장한 채로 박서윤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서윤 씨. 이분은 누구세요?”
“제가 제일….”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제일 강한 분이에요. 저랑 같이 저놈들을 잡으러 오셨어요.”
“네?”
“오늘 제가 여기 잡혀 온 거, 저놈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였어요. 하수인은 저번에 잡아봤는데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청부한 놈을 잡으려고 했죠.”
“그, 그런 일에 왜 나를 끌어들인 거예요?”
박서윤이 유소율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끌어들인 적 없어요. 유 이사님이 제가 퇴근할 때 먼저 찾아왔잖아요.”
“아….”
“납치될 때는 유 이사님이 한패가 아닌 척 연기하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했어요. 저놈들이 우리가 그 좁은 길로 지나갈 줄 알고 기다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박서윤을 찾아간 것도 유소율이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한 것도 유소율이다. 그 장소를 고른 것도 유소율이다.
“뭔가 억울한데 다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네요.”
박서윤이 말했다.
“유소율 이사님은 운 나쁘게 말려드신 건데요.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까 괜찮아요.”
유소율의 표정이 환해졌다.
“우리 편이 더 많이 왔군요! 지금 밖을 포위 중인 거죠?”
“아니요. 혼자 오셨어요.”
유소율은 다시 겁을 먹었다.
상대는 청부업자 셋에 마스크 둘까지 다섯 명이다.
‘하나는 오토바이로 들이받아서 잡았지만 넷이나 남았잖아.’
유소율 쪽은 셋뿐인데 그녀는 싸울 줄 모른다. 그녀는 박서윤도 싸움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소율이 울상을 지었다.
“그럼 이건 바보짓이잖아요. 혼자서는 못 이겨요.”
선우현이 뒤를 쓱 보았다.
“나 바보 아닌데.”
앞쪽에 있던 청부업자 두 명은 선우현이 뒤를 보자마자 돌진했다. 그들은 지금이 기습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선우현은 일부러 뒤를 보면서 빈틈을 보였다.
두 놈이 밖으로 도망치면 인질 두 명을 지키면서 쫓아가기 번거롭다. 그래서 일부러 적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선우현이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리며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공중에 가볍게 떴다.
적들의 손에는 잭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앞쪽에 있던 놈이 공중을 향해 칼을 뻗었다.
선우현이 잭나이프를 휘두르는 손을 발로 정확히 밟았다. 적의 손이 아래로 휙 처졌다.
선우현은 공중에서 앞으로 한 걸음 걸으며 적의 머리에 발을 디뎠다.
적의 머리가 아래로 밀려 어깨 사이로 파고들다가,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켁!”
선우현은 아직 공중에 떠 있었다. 다른 놈이 선우현의 다리를 노리고 소리를 지르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으아아!”
선우현이 공중에서 앞으로 걸었다.
다리 사이를 칼이 갈랐다. 칼날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치지도 않았다.
선우현이 두 번째 놈의 오른쪽 어깨를 발로 콱 밟았다.
“컥!”
적의 어깨가 부러졌다. 다리는 아래로 굽혀지고 몸은 뒤로 젖혀졌다.
선우현이 몸을 빙글 돌리며 적의 가슴을 발로 밟고 박서윤 쪽으로 가볍게 뛰었다.
적은 가슴에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밀려나 바닥에 처박혔다. 입에서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케에엑!”
선우현이 바닥에 가볍게 내려섰다.
유소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 사람이 어떻게 허공을 걸을 수 있어요?”
박서윤이 설명했다.
“발을 쓰는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그렇게 보인 거예요. 공중 발차기의 일종이에요.”
“저런 기술이 흔해요?”
“아뇨. 저런 거 처음 봤어요.”
“네?”
“그래도 어떻게 한 건지 분석은 할 수 있잖아요.”
김수선은 창고 내부는 볼 수 없다. 대신에 목소리는 들을 수 있다.
- 선장님. 혹시 효율적인 전투가 아니라 개폼을 잡으신 겁니까?
“저놈들이 느리길래 되겠다 싶어서 해봤어.”
- 박서윤이 예뻐서겠죠.
“그런 거 아니라니까.”
- 그럼 취향이 유소율 쪽이신가?
“아니라고.”
선우현이 백태형과 곽수천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선글라스. 네가 행동대장이고 스키 고글이 대가리라며?”
곽수천이 백태형의 등을 밀며 다급히 말했다.
“바닥에 칼 떨어져 있잖아. 그거라도 주워봐!”
“총도 아니고 칼로요? 그러면 저도 죽습니다!”
“그래도 뭔가 해봐야….”
“아마 이사님도 같이 죽을 걸요?”
“그, 그렇지? 싸우면 안 되겠지?”
곽수천이 갑자기 백태형의 옆으로 빠져나오며 외쳤다.
“이 상황은 내가 시킨 일이 아니다!”
“네가 대가리라며.”
“나는 그냥 매수하라고 시킨 거야! 돈 주고 정보 받고. 그러면 아무도 안 다치잖아.”
곽수천이 백태형을 가리켰다.
“근데 일을 이렇게 키운 건 저놈이다!”
“이사님!”
“내가 분명히 네가 다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네가 다 알아서 했잖아! 난 오늘 여기 올 계획이 없었다고!”
“씨바알!”
“너 지금 씨발이라고 했냐?”
백태형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나만 죽으라고 등 떠미는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하는데!”
“내가 밖에 남아야 혹시 네가 체포되더라도 변호사를 최고로 써주지! 최악의 경우라도 집행유예 정도는 만들어줄게!”
백태형이 멈칫하다가 조건을 걸었다.
“집행유예 받고 보너스 1억! 거기다 새 차 한 대! 럭셔리 세단으로! 그리고 자리 유지!”
“콜!”
“이사님! 감사합니다!”
선우현이 말했다.
“너희들 지금 쇼하냐? 사람 두 명을 납치했는데, 매수만 하려 했다는 말을 내가 믿을 거 같아?”
“지금 증명하겠다!”
곽수천이 얼른 마스크와 고글, 모자를 벗었다.
그는 얼굴을 숨기려고 해봤자 어차피 몇 대 맞고 마스크가 벗겨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거침이 없었다.
유소율은 조금 전부터 곽수천의 목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참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야! 곽수천! 네가 진짜 미쳤구나!”
곽수천이 얼른 두 손을 들었다.
“소율아. 난 정말 네가 같이 있는 줄 몰랐어. 우리가 많이 싸우긴 하지만, 내가 선을 넘지는 않았잖아?”
“그럼 지금 이건 뭔데?”
“백 비서가 다 한 거야! 난 진짜 네가 있는 줄 몰랐다고!”
“저 인간이 백 비서야?”
백태형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다 한 겁니다.”
“내가 둘 다 가만 안 둘 거야!”
박서윤이 물었다.
“유소율 이사님. 저놈들하고 아는 사이세요?”
“저놈은 청명 백화점 이사 곽수천이에요. 초등학교 동창인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어요.”
태양 백화점과 청명 백화점은 원래 사이가 나쁘다. 그래서 곽수천은 유소율이 가만 안 둔다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소리는 전에도 많이 들었다.
“그럼 소율아. 이제 다 정리된 거지? 오늘 일은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다 없던 일로 해주면 내가 나중에 태양 백화점이랑 입점 경쟁 붙을 때 한 번은 양보할게.”
백태형이 얼른 말했다.
“유 이사님. 저도 이사님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저놈들이 감히 유 이사님을 같이 데려올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제가 편히 앉으시라고 의자도 드렸잖습니까?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선우현이 물었다.
“너네 지금 뭐 하냐?”
곽수천이 호통을 쳤다.
“지금 당신 상관이랑 이사 대 이사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어딜 끼어들어!”
“내 상관 아닌데?”
“어? 뭐?”
“유소율 씨는 말려든 거라고. 난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어.”
“어? 어?”
선우현이 박서윤을 가리켰다.
“나는 누가 서윤 씨를 습격했다고 해서 잡으러 온 건데, 왜 유소율 씨랑 협상하냐고. 서윤 씨가 태양 백화점 직원도 아닌데.”
곽수천은 당황했다.
“어? 어? 소율아. 이게 지금 무슨 소리….”
유소율이 팔짱을 꼈다.
“그분은 내가 부른 거 아니야. 박서윤 씨랑 아는 분이야.”
곽수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박서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 서윤 씨. 오늘 일은 실수가 있었으니까 서로 잘 합의하고 넘어갑시다. 합의금은 충분히….”
“싫은데?”
“어? 뭐?”
곽수천은 협상이 실패하자마자 평소처럼 강하게 나갔다.
“아니, 이봐. 나 청명의 곽수천이야! 네가 당신 윗사람한테 전화만 넣어도 당신 잘릴 수 있어.”
“우리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어? 어? 회장님? 박길성 회장?”
“난 비서실 소속인데 윗분은 실장님하고 회장님뿐이야.”
이번에는 박서윤이 말했다.
“그리고 전화 한 통으로 나를 자를 수 있는 사람이면, 나를 이렇게 번거롭게 납치하지도 않았겠지. 회장님께 직접 전화 걸어서 알고 싶은 걸 물어보면 되니까.”
“그….”
곽수천이 태도를 슬쩍 바꾸었다.
“박서윤 씨. 백 비서가 좀 오버한 거 인정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난 그냥 뭐 좀 물어보라고 한 것뿐입니다.”
곽수천이 백태형의 팔을 툭 쳤다. 백태형이 얼른 말했다.
“맞습니다. 모든 건 제가 뒤집어…. 아니, 제가 오버한 겁니다. 그리고 저도 박서윤 씨에게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잖습니까? 제가 박서윤 씨에게 의자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백태형이 쓰러진 청부업자들을 가리켰다.
“박서윤 씨가 무슨 일을 당했든 그건 다 저기 쓰러져있는 저놈들이 한 겁니다.”
“웃기시네. 그런 소리 할 거면 내….”
박서윤이 선우현을 슬쩍 보았다. 다음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기세에서 밀리고 싶진 않았다.
“내 사진을 찍어서 약점으로 쓰겠다고 하지 말았어야지.”
백태형도 선우현의 눈치를 보았다. 잘못 말하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저 사람이 뒤에서 시킨 거 다 알아.”
곽수천이 펄쩍 뛰었다.
“박서윤 씨! 아닙니다! 나는 그냥 알아서 잘하라고만 했습니다!”
선우현이 말했다.
“내가 다 들었는데, 진짜로 사진 찍을 기세던데?”
“헉!”
“어머!”
박서윤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선우현이 대화를 들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 그녀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웠다.
선우현이 말했다.
“너희 둘은 일단 좀 맞자.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곽수천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니, 난 그냥….”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 그쪽으로 가는 차가 있습니다.
“응? 경찰이 벌써 출동했냐?”
- 경찰 차량이 아닙니다.
“그럼?”
- 운전석에 있는 놈의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아까 두 사람을 납치할 때 유소율의 차를 가져간 놈입니다.
“방금 잡은 세 놈과 한패가 오는구나. 거리는?”
- 곧 도착합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차인 줄 알고 무시했다가 확인이 늦었습니다.
선우현이 곽수천을 보며 말했다.
“너 제법이다? 이런 수작으로 시간을 끌면서 지원병력을 기다린 거냐?”
“어? 그게 무슨….”
- 놈들이 도착했습니다.
창고 앞에서 승합차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일곱 명이 내렸다.
그들은 모두 손에 쇠파이프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선우현이 창고 출입구 방향으로 돌아서서 적의 규모를 확인했다.
“일곱이네?”
유소율이 곽수천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야! 곽수천! 너란 놈은 정말 어디까지 망가진 거야!”
박서윤은 긴장하며 두 주먹을 앞으로 들었다.
“하나쯤은 제가 맡을게요. 이기긴 어려워도 시간은 끌 수 있어요. 유 이사님도 하나 맡아요.”
“내, 내가요?”
곽수천이 백태형을 가리켰다. 백태형의 얼굴은 환해져 있었다.
“백 비서가 부른 거야! 난 아니야! 몰랐어!”
백태형은 당황했다. 환했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이사님이 부르신 거 아닙니까?”
“어? 백 비서가 안 불렀어?”
“저는 청부업자를 딱 네 명만 고용했는데….”
“그럼 저놈들은….”
“그, 글쎄요?”
청부조직 두목이 쇠파이프를 어깨에 걸치고 실실 웃었다.
“이야아. 귀한 분들이 모여 계시네. 태양 백화점의 유소율 이사님. 청명 백화점의 곽수천 이사님.”
곽수천이 말을 더듬었다.
“나, 나를 압니까?”
“우리가 누구 일을 받아서 하는지 정도도 모를 줄 알았나? 당신 비서가 일을 맡겼으니까, 당연히 뒤에 당신이 있다는 걸 알았지.”
“뭐? 내 비서라는 건 어떻게….”
“저번에 대포폰 받을 때 내 부하랑 직접 만났으니까.”
비서 백태형이 두목의 뒤에 서 있는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처음에 고용했던 미행 담당….”
곽수천이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소율이는 어떻게 알아!”
두목이 실실 웃었다.
“오늘 빼앗은 차에서 명함이 나왔는데, 태양 백화점 유소율 이사라고 적혀 있더만. 무슨 상황인지 감이 딱 왔지. 이건 돈이 된다고.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