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덫 II
태양 백화점 유소율 이사는 박서윤이 퇴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접촉했다. 그녀는 박서윤과 함께 조용한 카페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같은 여자니까 초면인데도 경계하지 않은 거겠지. 내 이사 직함 명함도 도움이 됐을 거고. 반응이 나쁘지 않아. 역시 내가 직접 오는 게 정답이었어.’
그녀가 좁은 도로로 들어간 후에 차의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저쪽에 조용히 이야기하기 좋은 카페가 있어요. 제가 가끔 가는….”
갑자기 차가 툭 흔들렸다. 범퍼끼리 살짝 닿는 접촉사고였다.
“아이. 하필 이럴 때. 잠깐만요.”
유소율이 차를 세우고 내린 후에 뒤를 받은 승합차를 보며 항의했다.
“아니. 이봐요. 골목에서 왜 차를 그렇게 험하게 몰아요? 나 뒷목 잡는 거 보고 싶어요?”
승합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유소율에게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잠깐 휴대폰을 확인한다는 게 그만….”
남자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냈다. 손에 잭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남자기 갑자기 그 칼을 그녀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입 다물어!”
“꺅?”
“차에 타!”
그는 유소율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겨 승합차에 밀어 넣었다.
승합차에서 두 놈이 더 내렸다.
박서윤은 끌려가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차에서 내렸다. 그런 후에 승합차로 걸어갔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타면 되지?”
박서윤을 끌고 가려던 납치범들은 그녀의 태연한 모습에 당황했다.
“어? 당연하지. 타라.”
청부업자는 넷이었다. 그중 한 놈이 유소율의 차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세 놈은 승합차에 두 사람을 태우고 골목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렸다.
유소율은 겁을 집어먹었다.
‘이 사람들 뭐지? 나 납치되는 거야?’
후회도 됐다.
‘왜 혼자 왔을까? 비서라도 데려올걸.’
그녀가 승합차 뒷좌석에서 옆을 보았다. 박서윤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서윤 씨는 겁 안 나요?”
“안 나요.”
“어떻게 겁이 안 나요? 우리 지금 납치되고 있는데?”
박서윤은 어제 선우현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그렇다고 납치당하라는 건 아니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신호해요.
박서윤은 골목에서 선우현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확실히 처리하고 싶어.’
그녀가 말했다.
“유 이사님. 우리는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떨지 말아요.”
“나 지금 떨고 있어요?”
“네. 달달.”
***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몰면서 말했다.
“대화하자고 할 때만 따라가랬더니, 저건 누가 봐도 납치잖아. 왜 계속 따라가는데?”
- 그러게 말입니다.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 걱정만 해주고 막지는 않으시네요?
“납치 순간은 네가 보고 있었잖아. 내가 도착했을 때는 승합차에 옮겨타는 중이었는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더라.”
선우현이 박서윤을 직접 미행한 게 아니다. 김수선이 지원위성에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그가 멀리서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승합차는 계속 달려서 한강 상류에 있는 창고로 이동했다.
차가 창고 앞에 선 후에 승합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내려!”
유소율은 겁을 집어먹었다. 박서윤이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괜찮아요.”
“도대체 어디가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요. 경찰에 신고도 못 했잖아요.”
박서윤이 납치범 두목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뭐 이렇게 겁이 없는 여자가 다 있어? 창고 안으로 들어가라.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까.”
박서윤이 앞장서서 창고로 들어갔다. 유소율은 겁을 먹고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창고 안에는 비서 백태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갖다놓고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썼다.
백태형이 목소리를 깔았다.
“박서윤 씨. 이야기 한 번 하기 참 힘들군. 귀한 분도 아닌데 말이야.”
“나를 노린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네가 아니면 누구를….”
유소율은 박서윤의 뒤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내밀고 앞쪽을 확인했다.
유소율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이 두목인가 봐요.”
백태형은 유소율이 누구인지 안다.
유소율은 경쟁 백화점의 이사다. 곽수천 이사와는 자주 충돌하는 사이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다.
당황한 백태형이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유소율 이사?”
유소율이 박서윤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로 물었다.
“날 알아요?”
“어? 어? 아니, 얼굴만 안다. 얼굴만. 그런데 당신이 왜 여기에….”
유소율이 아니라 박서윤이 말했다.
“우리를 납치한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백태형은 아까 청부업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서윤을 차에 태운 여자가 유소율이었어?’
백태형이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는 잘 쓰고 있었다.
“험험. 일단 거기 그대로 서 있어.”
백태형이 창고 구석으로 갔다. 그가 유소율을 힐끗 보며 전화를 걸었다.
곽수천 이사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백 비서. 필요한 정보는 다 알아냈겠지?
“이사님.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 왜? 그 여자가 말을 안 해? 일을 자꾸 이렇게 할 거야? 무슨 수를 쓰든 알아내라고!
“유소율 이사가 여기 있습니다.”
곽수천은 당황했다.
- 어? 설마 들킨 거냐? 소율이가 쳐들어왔어?
“그게 아니라, 청부업자들이 유소율 이사도 납치했습니다.”
- 뭐?
곽수천이 잠시 조용해졌다가 욕을 내뱉었다.
- 그 새끼들이 미쳤나! 도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그게, 박서윤을 납치할 때 유소율 이사가 같이 있어서, 누군지도 모르고 납치했나 봅니다.”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한 건 백태형이다. 곽수천도 대놓고 말만 안 했을 뿐 그러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다.
- 환장하겠네.
“어떻게 할까요?”
- 지금 그냥 풀어주면 해결될까?
“아직 박서윤을 매수하지 못했고, 협박도 거의 못했습니다. 경찰에 이미 신고된 것조차 취소시키지 못했는데, 이대로 풀어주면 유소율 이사까지 경찰에 추가로 신고할 겁니다.”
그들은 박서윤이 지난번 일로 경찰에 신고한 것만으로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이사님. 유소율 이사가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하면 일이 커집니다.”
- 환장하겠네. 경찰이 작정하고 수사하면 우리까지 드러날 수도 있겠지?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신고한 걸 취소시키려던 거니까요.”
- 내가 갈 테니까 기다려. 소율이한테는 아무 짓도 하지 마.
“이사님. 마스크 꼭 쓰고 오십시오.”
- 알아!
***
선우현은 창고 근처 나무에서 창문을 통해 내부를 확인했다.
“저것들 뭐지? 인질 대접이 나쁘지 않은데?”
- 어떻게 대하는데 그러십니까?
“두 사람한테 의자를 갖다 주는데?”
***
유소율은 당황했다.
납치될 때는 당연히 묶여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납치범들이 의자를 갖다 주었다.
유소율이 의자에 앉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납치되면 원래 이러는 걸까요?”
“아니요. 묶는 건 기본이고 때리고 죽일 것처럼 위협하고 그래요.”
“진짜요?”
“제 경험으로는 그랬어요.”
“아. 그렇…. 네?”
유소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전에도 납치된 적이 있어요?”
“같은 놈들이 또 납치한 거면 복수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그때랑은 대우가 많이 달라요.”
한참 후에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새로운 남자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 전체를 스키용 반사 고글과 방한 마스크로 가린 남자였다. 머리에도 방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소율이 긴장했다.
“두목이 왔나 봐요.”
박서윤이 추측했다.
“우리 둘 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일 거예요.”
“네? 얼굴이 안 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얼굴이 전혀 안 보이니까요. 너무 꽁꽁 싸매고 왔잖아요.”
곽수천은 의자에 앉아 있는 두 명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백태형을 한쪽으로 데려가서 화를 냈다.
“진짜잖아. 씨발. 환장하겠네. 백 비서. 소율이 얼굴 몰라? 왜 일을 키워?”
“납치 과정에는 제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잖습니까?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 처리를 정말 이따위로…. 후우.”
“어떻게 할까요?”
“풀어는 줘야지. 소율이한테 심각한 일이 생기면 내가 의심받아.”
“그럼 이사님이 직접….”
“쟤가 내 목소리를 잘 아는데 되겠냐? 내가 시키는 대로 백 비서가 말해.”
두 사람이 돌아섰다.
곽수천이 뒤에서 속삭이면 백태형이 그대로 말했다.
“어제 경찰에 신고한 것부터 취소시켜라.”
박서윤이 말했다.
“그건 이미 경찰에 접수된 강력 사건이라 취소하고 싶어도 취소가 안 돼.”
“피해자가 취소를 원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오늘 이 일도 신고 안 한다고 약속해. 그러면 두 사람 다 풀어주지.”
유소율이 얼른 대답했다.
“그럴게요! 신고도 안 하고 다 없던 일로 할게요! 내가 약속할 테니까 보내만 줘요!”
곽수천이 속삭였다. 백태형이 그대로 말했다.
“너희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유소율이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요? 돈? 돈을 공탁이라도 걸어놓을까요?”
“그러니까 그 보장으로….”
곽수천이 또 속삭였다.
백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
“더 좋은 방법 있어?”
“아니요.”
백태형이 다시 앞을 보았다. 그가 박서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누드 사진을 찍어야겠다. 만약 오늘 일을 떠들면 그걸 공개….”
박서윤이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어? 싫다니? 그것만 찍게 해주면 풀어준다니까?”
“거절할게.”
“유출 안 할 테니까 사진만….”
“꿈도 꾸지 마.”
유소율은 당황했다.
‘나한테 그런 제안을 했으면 당장 할 텐데 왜?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잖아.’
유소율은 본인이 대상이라면 직접 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남에게 그걸 요구할 염치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잡혀 있다가 상황이 나빠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어떡하지?’
백태형이 짜증을 냈다.
“거절하면 저 강에 던져버리는 수가 있다. 선택해라. 목숨이냐? 사진이냐?”
박서윤이 도로 물었다.
“네가 책임자야?”
“어?”
“아니면, 네 뒤에 있는 그 스키 고글이 모든 걸 결정하는 사람이야?”
“내가 현장 책임자고, 이분께서는 최종 결재권자시다. 그러니까 네가 말만 잘 들으면 우리도 약속은 지킨다.”
박서윤이 말했다.
“그럼 이제 다 모인 거네.”
“모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
박서윤이 옷소매 속에 숨겨둔 초소형 경보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하려고.”
경보기에서 나온 날카로운 소리가 창고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청부업자들이 비웃었다.
“저거 그냥 소리만 나는 흔한 경보기잖아.”
“저런 게 있었으면 아까 시내에서 눌렀어야지.”
“거기선 겁먹어서 누를 생각도 못 했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눌러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상하게 겁을 안 낸다 싶더니, 그게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맛이 간 거였어.”
곽수천은 짜증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좀 조용히 시켜!”
“손님이 시키면 그 정도는 해드려야지.”
청부업자 셋 중 하나가 칼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박서윤을 향해 걸어갔다.
“어이. 아가씨. 그거 당장 이리….”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창고로 돌진해 들어왔다. 창고 문은 곽수천이 들어올 때 활짝 열어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오토바이는 실내에서 뒤에 서 있던 두 놈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어?”
선우현이 박서윤을 향해 걸어가던 놈을 오토바이로 들이받았다.
“케엑!”
오토바이에 치인 놈은 대각선 방향으로 튕겨 나가 백태형과 곽수천의 옆에 철퍼덕 떨어졌다.
두 사람은 당황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어?”
“어어?”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박서윤의 앞에서 옆으로 회전시키며 세웠다.
“대화나 좀 하자는 사람을 따라가라고 했지, 납치당하라고 한 건 아닌데.”
박서윤이 설명했다.
“처음에는 유소율 이사님이 좋게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따라간 거예요.”
선우현이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그러면 저놈들이 접촉사고를 냈을 때라도 신호하지.”
박서윤이 방긋 웃었다.
“다 보고 계신 거 알고 있으니까요.”
김수선이 투덜댔다.
- 다 보고 있던 건 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