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덫
선우현은 중고 SUV를 오늘 오후에 샀다.
박서윤이 말했다.
“오늘 갑자기 샀는데도 차가 좋아 보여요.”
“내가 장비를 만진 경력이 오….”
오천 년 전에 만든 지원위성을 그동안 쭉 관리했다.
“오래됐습니다. 기계장치의 상태는 딱 보면 압니다.”
- 하지만 수리하다 잘 터트리시죠.
“오토바이는 안 터트리고 잘 타고 있잖아.”
차가 옥탑방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주차 공간 일부가 비어 있었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까 백화점에서 중고차 시장으로 타고 갔다가 거기 세워뒀습니다.”
“아. 그렇게까지….”
“그건 내일 찾으러 가면 됩니다.”
선우현이 차를 주차해놓고 박서윤의 이삿짐 박스를 꺼냈다.
박서윤이 급히 말했다.
“아뇨! 그건 제가 들게요!”
그 박스는 뚜껑이 없어서 안에 들어 있는 옷이나 물건들이 보인다.
선우현이 박스를 넘겨주었다.
“그럼 난 캐리어를 옮기죠.”
그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선우현이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그녀가 지낼 곳으로 갔다.
“이 방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선우현이 철판으로 된 현관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안에서 직접 바꿔요. 난 옥상에 가서 할 게 있으니까.”
“네. 고맙습니다.”
선우현이 위로 올라간 후에 박서윤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내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투룸이다.”
그녀가 원하던 방 두 개짜리였다. 부엌과 욕실도 있었다.
그런데 투룸 내부가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선우현 씨가 나를 위해서 방 청소를….”
옆집에 사는 신나리가 나타나서 말했다.
“청소는 내가 했어요.”
“네?”
“아까 옥상 오빠가 그동안 토마토 먹은 값으로 일하라고 해서요.”
“아. 활력 토마토….”
“어쩐지 먹으라고 곧잘 주더니, 이렇게 부려먹더라고요.”
박서윤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 토마토 얼마짜린지 알아요?”
신나리가 손을 흔들었다.
“에이. 옥상에서 키우는 걸 무슨 돈을 받아요? 당연히 공짜죠.”
“그래요?”
“아. 맞다. 옥상 오빠가 그거 키워서 어디에 팔긴 하나 봐요. 취직이 안 돼서 그렇게라도 용돈을 버나 봐요.”
박서윤은 당황했다.
“네? 선우현 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엥? 옥상 오빠가 일을 한다고요? 백수 오빠 아네요?”
“왜 백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야 맨날 옥상에서 노니까요. 출근하는 사람은 그렇게 놀 수가 없어요.”
“아….”
박서윤이 생각했다.
‘선우현 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나 보다.’
신나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언니는 옥상 오빠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저 오빠가 막 쫓아다니고 그래요?”
“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맞는 거 같은데. 나한테 언니 온다고 방 청소시킨 것만 봐도 느낌이 딱 오는데.”
“에이. 설마요.”
신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옥상 오빠가 언니 같은 미인을 어떻게 감히.”
“그건 아니고요.”
***
선우현은 백태형이 청명 백화점 관계자라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백화점이 길성 비서실 직원에게 알아내고 싶은 다른 정보가 있을까? 협박해서 상품권을 팔려고 했나?”
- 설마요.
“그냥 해본 소리야. 그건 리스크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작으니까. 역시 활력 토마토에 관한 정보밖에 없겠지?”
- 건물 앞에 최종훈이 도착했습니다.
최종훈은 활력 토마토 주스를 얻어먹는 데 맛이 들려서 자주 찾아왔다.
그런데 항상 토마토를 주는 건 아니다. 선우현이 이번에는 냉수를 주며 말했다.
“활력 토마토를 어디서 재배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겠군요.”
“예. 문의는 꽤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는 건 저랑 우리 김 비서뿐입니다. 당연히 안 가르쳐줬습니다. 하하하.”
“문의한 곳 중에 백화점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백화점 사장이 먹으려는 게 아니라, 아예 납품 문의를 한 곳 말입니다.”
“최근에 태양 백화점에서 그런 문의를 했습니다. 청명 백화점에서는 우리 직원들을 통해서 어디서 재배하는지 알아내려고 했고요.”
곽수천 이사의 비서인 백태형이 최근에 백화점 직원들을 이용해 활토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 그 정보가 최종훈에게 들어갔다.
선우현이 말했다.
“태양은 앞에서 물어봤는데, 청명은 뒤에서 정보를 빼내려고 했군요.”
“밭떼기라도 하려고 하나 보죠. 어쨌든 그 두 백화점은 제가 알아서 커트했습니다. 이 귀한 걸 과일 매대에 쌓아놓고 팔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역시 그거였네.”
“예? 뭐가….”
“청명이 서윤 씨에게 원하는 건 활력 토마토 정보였다는 거죠.”
“예?”
선우현이 박서윤이 최근에 겪은 사건을 설명했다.
최종훈은 깜짝 놀랐다.
“헉. 그래서 박 회장님이 여기 빈방을 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군요. 그걸 딱 잘라 거절했는데, 말이라도 좀 좋게 할걸.”
“괜찮습니다. 서윤 씨는 이미 이 건물로 이사했으니까.”
“예?”
“방 하나 내줬습니다. 투룸으로. 그 층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되면 방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그럼 이제 문제는….”
최종훈의 표정이 굳었다.
“청명 백화점이 이쯤에서 포기하고 손을 뗄지가 중요하겠군요.”
“그건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예?”
선우현이 말했다.
“내가 안 끝낼 거니까.”
***
박길성이 최종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최 사장. 그 건물이 안 되면 근처라도 방을 하나 구해봐. 그 건물과 가까운 곳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서윤이를 그곳으로 이사시켜야겠어.
- 네? 박서윤 대리는 이미 이사했는데요?
“뭐? 어디로?”
- 선우현 씨 건물로요.
“어? 거긴 빈방이 없다며?”
- 선우현 씨가 그냥 하나 내줬다던데요? 그것도 여기서 제일 좋은 투룸으로.
“그, 그래?”
- 옆방에 여대생도 살고 있으니까 안심하시죠.
“고마워. 그런데 혹시…. 선우현이 서윤이에게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이유를 아나?”
- 서윤 씨의 원룸에 청부업자를 보낸 놈이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이사하라고 했답니다. 이 건물에 침입하는 건 호랑이 아가리에 대가리를 들이미는 거잖습니까?
박길성이 무릎을 쳤다.
“그렇지! 나도 그래서 서윤이가 그 건물로 갔으면 했던 거였어. 그럼 이제 경찰에 체포된 놈들을 조사해서 누가 시켰는지만 알아내면 되겠군.”
- 선우현 씨가 그것도 알아냈다던데요?
박길성은 당황했다.
“어? 경찰도 모르는 걸 어떻게….”
- 선우현 씨가 원래 그런 걸 잘합니다. 방법은 저도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범인은 청명 백화점과 관계가 있나 봅니다.
박길성이 욕을 내뱉었다.
“청명? 내 이 새끼들을!”
- 박 회장님. 진정하시고요. 아직 증거가 없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시죠. 선우현 씨가 뭔가 할 건가 봅니다.
“그래.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이 진행되면 나한테 꼭 알려줘. 내가 힘을 보탤 테니까!”
***
이튿날 태양 백화점 이사 유소율이 직원의 보고를 받고 도로 물었다.
“길성의 박 회장님은 활토를 일주일에 세 개를 드신다고요? 그럼 다른 고객들은?”
그 정보를 알아온 직원이 대답했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 개 정도면 많이 구하는 편입니다. 그만큼도 못 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유소율은 할머니인 태양 백화점 사장이 준 활력 토마토를 먹었던 때를 떠올렸다.
‘우리 할머니도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 구하는 걸 세 개나? 그것도 매주 세 개? 아무리 길성이라지만 너무 많은 거 아냐?’
“그 정도면 박길성 회장님은 특별대우라는 소리군요. 부럽네요.”
“그런데 그 토마토를 직접 가지러 가는 직원이 있다고 합니다. 비서실 대리입니다.”
유소율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그 직원과 접촉해야겠군요.”
“그럼 제가 가서….”
“아니에요. 내가 직접 갈게요. 그리고 이런 좋은 정보는 어디서 얻었어요?”
직원이 머뭇거렸다.
“그게…. 청명에서?”
“네?”
“청명에서 먼저 파악한 걸 빼냈습니다.”
청명만 태양에 빨대를 꽂아둔 게 아니다. 태양도 청명에서 정보를 얻을 수단은 있다.
“청명에서 선수 치기 전에 오늘 당장 만나야겠어요.”
***
청명 백화점의 곽수천 이사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가 집에 안 들어오다니!”
백태형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원룸 문에는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쳐놓았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왔을 리는 없으니, 밖에서 지내는 것 같은데….”
“집에는 안 들어가도 회사는 가겠지.”
“그러면 퇴근할 때 계획을 진행할까요?”
“나한테 일일이 설명하지 말고 백 비서가 알아서 알아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
박서윤이 퇴근했다.
그녀는 어제 옥탑방 건물로 이사 갔다. 그래도 지하철을 이용해 퇴근해야 하는 건 그대로다.
차를 살 생각은 없었다. 서울 시내는 차가 막히는 데다가, 차를 사면 유지비가 대중교통보다 훨씬 많이 든다.
“옥상에 올라가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오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기서 캔맥주라도 마실까?”
밤하늘을 보며 맥주를 마실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회사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박서윤 대리님?”
박서윤이 걸음을 멈췄다. 지난번에는 백태형이 이렇게 접근했다가 결국 청부업자들까지 동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를 일단 경계했다.
“누구시죠?”
유소율이 명함을 주며 말했다.
“태양 백화점 이사 유소율이에요.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요?”
“여기는 좀 그렇죠? 장소를 옮길까요? 제 차를 타시죠.”
박서윤은 어제까지만 해도 누가 이렇게 말하면 따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그녀는 선우현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
어젯밤에 선우현이 말했다.
“서윤 씨가 경찰에 정식으로 신고했으니까, 이제 청명 백화점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만 남았습니다.”
선우현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이쯤에서 접촉을 중단하고 손을 떼는 것. 그런데 그놈들은 그걸 선택할 수 없습니다.”
“네? 왜….”
“내가 청부업자들을 잡아서 유치장에 처넣었으니까요. 경찰이 그놈들을 수사하면 누가 청부했는지 밝혀낼 수도 있습니다.”
박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점은 평판이 중요하죠. 그렇게 되면 청명은 손해가 크겠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그놈들의 선택지는 하나만 남았습니다.”
“다시 청부업자들을 보내는 건가요?”
“그건 수단이고, 목적은 경찰에서 뭔가 알아내기 전에 서윤 씨가 신고한 걸 취소하게 하는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런다고 이미 일어난 사건이 없던 일이 되나요?”
“피해자가 괜찮다고 하면 경찰도 김이 빠지겠죠. 그런 상태로 만든 후에 청명이 뒤에서 손을 쓰겠지요. 청부업자들은 처벌받게 놔두고, 백화점만 드러나지 않게 할 겁니다.”
“나쁜 놈들.”
“그러니까 어쩌면 내일 퇴근길에 누군가 접촉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장소를 옮겨 이야기하자고 하면 따라갈게요.”
“무서우면 안 그래도 됩니다.”
“아뇨. 하나도 겁 안 나요. 선우현 씨가 지켜보실 테니까요.”
“내일 퇴근할 때는 당연히 내가 보고 있을 겁니다.”
- 선장님. 혹시 제가 보고 있어야 하나요?
“응.”
- 췟.
***
박서윤이 명함을 보았다.
‘태양 백화점. 여기는 청명 백화점하고 경쟁 관계일 텐데? 선우현 씨는 청명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명함에는 이사 직함이 박혀 있었다. 그녀가 유소율을 보았다.
“혼자 오셨어요?”
“네. 제 차로 모실게요.”
그녀가 어디로 가든 선우현이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겁이 나지 않았다.
“알았어요. 가요.”
***
백태형이 전화를 받았다. 새로 고용한 청부업자들의 전화였다.
- 타깃이 다른 사람의 차에 탔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니? 누구?”
-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젊은 여자인데, 고급 승용차를 몰고 있습니다.
“일단 미행하시오.”
백태형은 대포폰으로 통화를 마친 후에, 그의 휴대폰으로 곽수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박서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젊은 여자의 차에 탔습니다.”
- 그 여자가 활력 토마토의 비밀을 알고 있을 거야! 토마토를 팔아서 그 차를 샀겠지!
“그럼 계획대로 할까요?”
- 백 비서! 나한테 설명하지 말고 네가 다 알아서 하라니까!
“아, 예.”
백태형이 전화를 끊었다.
“일이 잘못되면 몰랐다고 하려고 이러는 거지?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과분한 자리에 올라간 쫄보 새끼.”
그렇다고 백태형이 곽수천에게 상황 설명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궁금한 건 다 듣고 나서, 꼭 이렇게 설명하지 말라고 한단 말이야. 마치 아무것도 안 들은 것처럼.”
백태형이 곽수천의 욕을 하다가 멈칫한 후에 통화가 확실히 종료됐는지 다시 확인했다.
“휴우. 휴대폰이 안 꺼졌나 했네.”
그는 이번에는 대포폰으로 청부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획대로 하시오.”
- 사람이 한 명 늘어났으니까 추가금을 주셔야 하는데.
“알았으니까 일이나 확실히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