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안전지대 III
최종훈이 물었다.
“왜 갑자기….”
박길성 회장이 설명했다.
- 안전한 장소가 필요해서 그래. 선우현이 사는 건물처럼 안전한 곳이 또 어디 있겠어? 방 하나만 구해줘. 기왕이면 넓고 좋은 방으로.
최종훈은 어제 일어난 박서윤의 원룸 침입 사건을 모른다. 그래서 박길성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박 회장님. 제 건물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있는 사람도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날만 기다리는 중인데요. 죄송합니다.”
최종훈이 정중히 사과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선우현이 물었다.
“빈방이요?”
“박길성 회장님이 이 건물에 방이 남는 게 있냐고 해서요.”
“그렇군요.”
“이 건물의 다른 층도 앞으로 쓰실 계획이잖습니까? 그래서 거절했죠.”
“나중에는 확장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은 계획이 없는데요.”
최종훈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일단 활력 토마토를 더 키우시는 건 어떠신지?”
“식물 영양제를 다른 층에 쓸 것까지 만들 여유가 없습니다만?”
최종훈이 눈에 보일 정도로 아쉬워했다.
“아….”
“토마토를 더 키우길 기대하고 박 회장님 전화를 거절하셨나 보네.”
“아유. 아닙니다. 사실 기대를 안 한 건 아니지만…. 하, 하하.”
최종훈이 옥상을 떠난 후에 선우현이 말했다.
“박 회장님이 갑자기 빈방을 찾는 건 서윤 씨 때문인가?”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서윤 씨는 조만간 이사 가야 하잖아. 기왕이면 좀 더 안전한 곳이 좋겠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왜 회장이 직원이 이사 가는 것까지 신경 쓰지?”
- 어제 박서윤 대리에게 있었던 사건을 들었겠죠.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해주나? 친절한 상사인가 본데?”
- 우리 선장님은 부려먹을 줄만 아는데, 좋은 상사네요.
“어…. 난 좋은 거 보내고 싶어도 우주왕복선이 없어서 그런 거야.”
- 박서윤은 활력 토마토 전담 직원이니까 신경 쓰는 것 아닐까요? 그 건물에서 출퇴근하면 더 안전해지고 일도 간편해지니까요.
“역시 그런 이유가 있어서겠지? 내가 나쁜 거 아니지?”
- 선장님은 악덕 맞습니다.
***
박서윤은 오전에 선우현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서윤 씨. 오늘 점심때 바쁩니까?
“아니요. 오늘은 외근이나 임원회의가 없어서요.”
그런 날은 점심을 정시에 챙길 수 있다.
- 점심이나 같이 먹읍시다.
“네?”
박서윤은 오늘이 토마토를 받는 날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틀 전에 세 개를 받아왔는데?’
선우현이 말했다.
- 어려우면 말고요.
“아니에요. 점심은 제가 살게요. 어제 도와주셨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
- 그거야 당연하고요.
“그렇죠?”
- 그럼 점심은 태양 백화점에서 먹읍시다.
“아. 전에 만난 그곳이죠?”
- 오늘은 국밥 말고 다른 걸 먹을 겁니다.
“네.”
그녀가 시간까지 정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스테이크라도 드시려나?”
동료 여자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박 대리. 누구야아?”
“아는 분이에요.”
“아는 분이 점심 먹재?”
“네.”
“나는 들으려고는 안 했거든? 근데 어제 도와줬다는 소리가 살짝 들렸네? 우리 박 대리가 여자만 사는 친구 집에서 잔 어제, 그분은 뭘 도와줬을까?”
“어디까지 들은 거예요?”
“박 대리가 남자로 추측되는 사람이랑 점심 먹는다는 거? 점심 데이트인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밥이라도 사려는 거예요.”
***
박서윤은 회사에서 화장을 고치고 밖으로 나왔다.
길성 본사에서 태양 백화점은 그리 멀지 않았다.
선우현이 백화점에 먼저 와 있었다.
박서윤이 물었다.
“기다리셨어요?”
“길 건너편에 볼일이 있어서 조금 먼저 온 겁니다. 갑시다.”
선우현은 박서윤과 함께 태양 백화점 식당가로 이동했다.
박서윤이 물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선우현이 햄버거 가게로 박서윤을 데려갔다.
“이거요.”
박서윤은 당황했다.
“더 좋은 걸 드셔도 되는데요.”
“여기가 전망이 제일 좋아서 그래요.”
선우현은 햄버거 세트를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햄버거 가게 창밖으로 길 건너편이 잘 보였다.
그가 햄버거를 먹으며 말했다.
“귀한 밀가루로 만든 빵에, 진짜 고기에, 채소에, 감자를 기름에 튀기고, 거기다 콜라까지. 예전엔 이런 거 정말 먹고 싶었는데.”
탐사대 지원위성에서는 칼로리바만 먹어야 했다. 필수 영양소는 다 들어 있어서 그것만 먹어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칼로리바가 아니라 다른 음식이라도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지만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지상의 맛있는 음식이 좋았다. 햄버거도 좋았다.
박서윤이 햄버거를 먹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옛날에는 이게 참 먹고 싶었어요. 맛을 몰랐으면 모를까, 아는 맛이라서 더 먹고 싶었죠.”
“크으. 잘 아시네. 나도 그런데.”
“그래서 햄버거 가게로 오신 거예요?”
“요즘은 햄버거 정도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그건 아니고요.”
선우현이 창밖으로 보이는 길 건너편 건물을 가리켰다.
“청명 백화점이 잘 보여서 여기로 왔습니다.”
“아. 저기요.”
“개인적으로 잘 압니까?”
“태양은 회사 지정 백화점 중 하나라서 관계자 선물이나 상품권 구매로 와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청명은 우리 회사와는 관계가 없어서 가본 적은 없어요.”
선우현이 청명 백화점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쟤들이 왜 그랬을까?”
“네? 뭘요?”
“어제 서윤 씨를 노린 세 놈은 청부업자입니다.”
“네. 그건 알아요.”
“그러면 그놈들에게 청부를 한 놈이 따로 있겠지요?”
“그놈은 경찰에서도 못 찾았잖아요.”
“어제 현장에서 수상한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선우현이 청명 백화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백화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네?”
“청명 백화점 직원이거나, 아니면 직원과 관계가 있는 놈이겠죠.”
박서윤이 먹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선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가 전혀 없어요. 뭐라도 있어야 신고를 하죠.”
“아….”
“그리고 그놈이 본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놈한테 또 누가 시켰을 수도 있거든요. 그럼 그놈도 찾아야지요.”
“그럼 여기 자리를 잡으신 건….”
“상황 설명도 해줄 겸, 혹시 그놈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겸사겸사 앉았습니다.”
- 선장님? 그놈이 창가에 서는지 보는 것도, 혹시 백화점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도 제가 하고 있는데요? 선장님은 지금 맛있는 것만 드시는데요?
선우현이 얼른 박서윤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건 본론은 아니고요.”
***
태양 백화점 유소율 이사가 식당가에 나타났다. 식당가 상황을 점검할 겸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다가 선우현과 박서윤을 발견했다.
선우현은 경쟁사인 청명 백화점이 잘 보는 자리에 일부러 앉아 있었다.
박서윤도 같은 이유로 햄버거 가게에 오면 그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네.’
박서윤의 얼굴이 보였다.
‘예쁘다.’
예쁜 얼굴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전에도 여기서 봤는데, 우리 백화점 단골인가?’
유소율이 햄버거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앉던 자리는 선우현과 박서윤이 이미 차지해서 다른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박서윤과 선우현이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아니면 미녀와 야수인가?’
***
선우현이 박서윤에게 본론을 말했다.
“이사 갈 곳은 찾았습니까?”
“아니요. 아직.”
“방 하나 내줄 테니까 우리 건물로 와요.”
“네?”
“지금 있는 원룸은 보안이 약한 거 같아서.”
“하지만 그 건물은 다른 층에도 뭔가 만드신다면서요.”
“그건 뭐, 언제 만들지 모르는 거라서요. 보증금은 안 받을 테니까, 일단 살다가 나중에 거기까지 확장할 일이 생기면 그때 방을 빼줘요.”
“그럼 저야 좋은데 죄송해서.”
그녀의 입은 그렇게 말했지만 손은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지금 사는 원룸 건물의 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어제 침입 사건은 건물 주인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더 있으라고 못 하죠. 나간다고 하면 바로 보증금 빼줄게요.
“고맙습니다.”
박서윤이 전화를 끊고 선우현에게 말했다.
“언제든지 이사해도 된대요.”
“그럼 오늘 바로 이사합시다.”
“네?”
“그 방에서 잠을 자기는 좀 그렇잖아요? 당장 필요한 짐만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나와요. 나머지 짐은 이삿짐센터에 연락해서 나중에 옮기면 되니까.”
“하지만 방이….”
“우리 건물에 활력이 넘치는 대학생 여자애가 사는 방이 있는데, 그 옆방을 깔끔하게 청소해 놨으니까 오늘부터 쓸 수 있어요.”
박서윤은 사양하지 않았다. 지금 사는 원룸에 다시 들어가는 건 찜찜하던 참이다.
“고맙습니다.”
“월세 받는데 고맙기는. 다 먹었으면 일어납시다.”
유소율은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만 보고 상황을 추측했다.
“꼬시는 건가? 거기 또 넘어가 주는 거고?”
유소율은 혼자 햄버거를 먹고 있다.
“좋을 때다. 부럽네.”
그녀가 창밖을 보았다. 청명 백화점이 보였다.
“저기는 오늘도 손님이 많네.”
태양과 청명 백화점은 치열한 경쟁 관계다. 물론 태양은 다른 백화점들과도 경쟁한다.
그런데 두 백화점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둘 다 역사가 긴 단독 대형 백화점이다.
그래서 서로를 더 의식했다.
“활력 토마토를 우리가 맡아서 판매할 수 있으면 VIP 영업을 통해서 청명을 이길 수 있는데.”
활토의 공식 공급처는 JHC 테크의 최종훈 사장뿐이다. 사장과 비서가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직원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최종훈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없다.
JHC 테크는 백화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다. 그래서 청명 백화점의 곽수천 이사도 JHC는 건드리지 않았다.
유소율이 한숨을 쉬었다.
“그 토마토는 도대체 누가 어디서 재배하고 있는 거야? 왜 농산물 전문가 중에 농장 위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
박서윤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에 회사로 돌아갔다가, 퇴근 시간에 원룸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출장 갈 때 쓰는 여행용 캐리어 하나에 며칠 입을 옷과 필수품만 챙겼다.
“나머지는 주말에 용달 이사를 불러 옮겨야겠다.”
선우현은 원룸 밖에서 박서윤이 나오길 기다렸다.
박서윤이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 불러야겠죠?”
선우현이 옆을 가리켰다. 국산 SUV가 한 대 서 있었다.
“차 가져왔으니까 여기 실어요.”
“차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오토바이만 타시는 줄 알았는데요.”
“없었는데요. 오늘 오후에 샀습니다.”
“네?”
“새 차는 나오는 데 오래 걸리는데, 중고차매장에 가니까 바로 가져올 수 있는 게 쌓여 있더군요.”
“왜 갑자기 차를….”
김수선도 물었다.
- 그러게요. 왜 갑자기 그러셨을까요? 설마 오늘 이삿짐 나르는 데 도움이 되려고 산 건 아니겠지요?
선우현이 말했다.
“비가 오는 날은 오토바이가 불편하기도 하고, 건물에 사람이 좀 빠져서 주차 공간도 남더군요. 주차 공간을 비워두면 아까워서 샀습니다.”
“그러시구나.”
- 세상에. 그 말을 믿나 봅니다.
박서윤이 차에 여행용 캐리어를 실었다.
“아! 그럼 잠시만요! 조금 더 가져올게요!”
그녀가 원룸으로 뛰어들어가 종이 박스에 필요한 짐을 집어 던졌다.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가지 않아서 미처 못 챙긴 것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짐을 더 챙기고 싶지만, 일단은 한 박스만 챙긴 후에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이것까지 있으면 주말까지는 괜찮아서요.”
그녀는 차에 짐을 마저 싣고 나서 물었다.
“운전은 제가 할까요?”
“조수석에 타요.”
선우현이 새로 산 중고차를 몰고 옥탑방 건물로 이동했다.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이제 진실을 말해보시죠. 예뻐서 챙기는 거 맞지요?
“아니야. 우리 활력 토마토 때문에 습격당했을 수 있어서 보호하는 거야. 고객 서비스지.”
- 조금 전하고는 대답이 다른데요?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