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안전지대
박서윤이 경고했다.
“내가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면서 싸우면,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보고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러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사람들이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박서윤이 제압되지 않고 비명을 지를 수 있어야 한다.
“나 험하게 자랐어. 싸움 잘해.”
박서윤은 귀하게 대접받고 곱게 컸을 것처럼 생겼다.
그래서 그녀를 포위한 세 사람은 피식 웃었다.
“아이구야. 참 무섭네.”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구라를 잘 치네?”
“너랑 이야기하려는 분이 계시다.”
박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할 이야기 없어.”
“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이미 듣고 있으니까.”
한 명이 대포폰을 들었다. 스피커폰 모드로 통화 중인 상태였다.
백태형의 목소리가 대포폰에서 나왔다.
- 그러게 조건을 받아들였으면 이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잖습니까?
“당신 어제 그 사람이지? 지금 선 넘은 거 알아?”
- 거 서로 좋게좋게 좀 갑시다. 일단 경찰에 신고한 것부터 취소하고, 내가 주는 돈도 받으라고. 나는 돈을 주고 아가씨는 정보를 주고. 상부상조 얼마나 좋아? 모든 사람이 이익이잖아?
“거절한다면?”
백태형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 흐흐흐. 이번에도 거절하면 아가씨한테 무척 나쁜 일이 생기….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나쁜 일은 이제 너희들에게 생길 거야.”
세 명이 옆을 돌아보았다.
선우현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 놈이 인상을 쓰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이. 가던 길 가라.”
선우현이 말했다.
“내가 가는 길을 너희들이 막고 있다. 비켜.”
한 놈이 어깨를 계속 으쓱거리며 선우현에게 걸어갔다.
“아. 그 새끼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놈이 왼손을 선우현의 멱살을 향해 뻗었다. 오른손은 따귀를 때릴 것처럼 위로 들었다. 그러면서 사납게 말했다.
“니가 옆으로 삥 돌아서 가라고.”
선우현이 상대의 왼손을 덥석 잡았다.
“어?”
그 손을 콱 비틀었다.
“으아악!”
손가락 관절을 모조리 뒤틀어버린 후에 손을 놓았다.
적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으며 몸을 움츠렸다.
“끄아악. 너 이 새끼. 죽여버…. 켁!”
선우현이 그놈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길 막지 마라.”
목이 붙잡힌 놈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케켁!”
다른 두 놈은 당황했다.
“뭐, 뭐야?”
그중 하나가 선우현을 향해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이 새끼가….”
선우현이 왼손으로 적의 발차기를 가볍게 받았다. 적의 발목이 선우현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놔….”
선우현이 적의 발목을 강하게 움켜쥐며 콱 비틀었다.
“으아악!”
그런 후에 발목을 쭉 끌어당겼다. 한 발로 서 잇던 놈이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며 머리로 바닥을 찍었다.
“켁!”
선우현이 한 놈은 목을, 다른 한 놈은 다리를 잡고 질질 끌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남은 놈은 당황했다.
“어? 어?”
동료 둘이 순식간에 당했다.
그는 혼자서 싸워봤자 선우현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인질! 인질을 잡아야 해!’
그가 박서윤을 향해 휙 돌아섰다.
박서윤이 다리를 위로 쭉 뻗었다. 높은 각도로 날린 돌려차기가 적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케엑!”
적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놈은 비틀거리며 빙빙 돌다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선우현이 두 놈을 질질 끌고 오며 칭찬했다.
“와우. 깔끔한 발차기네요. 한두 번 차본 솜씨가 아닌데요?”
“험하게 자랐거든요.”
선우현이 그 두 놈을 박서윤에게 맞아 쓰러진 놈의 옆에 대충 던져놓았다.
박서윤에게 턱을 맞은 놈은 눈이 돌아갔다. 발목이 비틀리고 머리를 땅에 찍은 놈도 아직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목을 잡혔던 놈은 손가락 관절은 나갔지만 그래도 정신은 멀쩡했다.
선우현이 그놈에게 말했다.
“야. 벗어.”
겁을 잔뜩 집어먹은 놈이 급히 한 손으로 셔츠를 벗었다. 단추가 툭툭 떨어졌다.
“다 벗겠습니다!”
“너 노출증 있냐? 옷을 왜 벗어?”
“예?”
“마스크 벗으라고.”
“예? 예!”
그놈이 급히 마스크를 벗었다.
“저것들도 벗겨.”
그놈이 다른 두 놈의 마스크를 서둘러 벗겼다.
선우현이 세 놈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그놈들이 아니네?”
박서윤이 물었다.
“저번 그놈이라니요?”
“서윤 씨를 창고에 가뒀던 그놈들이요.”
“그놈들도 그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벗겨봤자 알아볼 수가….”
“아! 그래서 처음 보는 얼굴들이구나!”
“네?”
- 선장님?
“농담입니다. 하하하.”
“아, 네.”
- 퍽이나 농담이겠습니다.
선우현이 말을 돌렸다.
“그때 그놈들이 아니라면, 이놈들은 어디서 온 거야?”
선우현이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놈을 발로 툭툭 쳤다.
“야. 누가 시켰냐?”
***
비서 백태형은 그가 고용한 세 놈이 박서윤을 포위했을 때는 일이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역시 내가 직접 보면서 관리해야 해. 그러니까 미행만 시켰을 때와는 다르게 일이 잘 진행되잖아.”
그는 전화통화로 박서윤을 협박할 때는 여유를 부리며 실실 웃기까지 했다.
그러다 선우현이 나타났다. 그때만 해도 귀찮게 됐다는 생각만 했다.
“꼭 남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니까. 그냥 못 본 체하면 서로 편한데. 아이구야. 저러다 처맞겠…. 어?”
먼저 덤빈 놈이 순식간에 제압되고 목을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두 번째로 덤빈 놈은 발차기를 날렸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자빠졌다.
“어어?”
세 번째 놈은 인질을 잡으려고 돌아섰다가 박서윤의 돌려차기에 턱이 돌아갔다.
“어어어?”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무슨 지나가는 사람이 저렇게 싸움을 잘해? 저 여자는 또 뭐야? 왜 잘 싸우는데!”
선우현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한 놈을 발로 툭툭 차는 모습이 보였다.
백태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해!’
그는 뒷걸음질로 후퇴해 골목 사이로 숨어들었다.
***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 70m쯤 떨어진 곳에서 골목 안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놈을 발견했습니다. 딱 봐도 도망치는 중입니다.
선우현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추적해.”
- 바쁜데 또 감시에 시간 빼앗기겠네요. 저놈이 목적지에 금방 도착해야 할 텐데요.
“왜 바쁜데? 선체가 또 고장 났냐?”
- 아니요. 지금은 터진 장비도 없고 선체에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쁘다며?”
- 오랜만에 모든 게 다 잘 돌아가서 드라마 보려고요. 제가 요즘 관심 가지고 보는 드라마인데, 오늘 둘이 키스할지도 모릅니다.
“어…. 수선아. 지금 상황에서 뭐가 더 중요할까?”
- 키스?
“서윤 씨는 길성의 기술 정보나 경영 기밀을 모른대. 그러면 알고 있는 것 중에 가치 있는 정보는 하나밖에 없어. 활력 토마토가 어디서 재배되는지에 관한 거.”
- 저도 압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을 내서 주변에 수상한 놈이 있는지 살펴본 거니까요.
길성에서 선우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딱 세 명이다. 기밀까지는 아니지만, 그 세 사람이 말을 안 해주면 다른 사람은 토마토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우리 토마토를 노린 놈이야. 그놈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 드라마는 녹화해서 보면 되잖아.”
- 우주왕복선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놈이군요. 제가 잘 보겠습니다.
“드라마를 잘 본다는 거 아니지?”
- 어…. 드라마는 녹화하겠습니다.
선우현이 목을 잡혔던 놈을 다시 발로 툭툭 찼다.
“야. 누가 시켰냐?”
그놈이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전화로 의뢰를 받아서 저희도 잘….”
“전화만 받고 이런 일을 한다고?”
“돈을 많이 주니까 그게….”
“너는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놈이구나.”
어차피 도망치는 놈 하나를 김수선이 추적하는 중이다. 이놈이 의뢰인을 모른다면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선우현이 그놈의 턱을 툭 찼다. 그놈이 고꾸라졌다.
선우현이 박서윤에게 물었다.
“신고는요?”
“신고하려는 순간에 저놈들이 나타나서요.”
“그럼 얼른 해요.”
박서윤이 살짝 당황해서 반문했다.
“네? 진짜로 신고해요?”
“왜요?”
“선우현 씨의 정체는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굳이?”
“아! 알았어요. 바로 할게요.”
신고하고 조금 기다렸더니 근처 지구대에서 출동한 경찰차가 도착했다.
오늘 잡은 놈들은 겉보기에는 크게 다친 데가 없었다. 한 놈은 손을 삐고 다른 놈은 발목을 삐었다. 박서윤에게 맞아 턱이 돌아간 놈도 있다.
그래도 셋 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박서윤의 설명을 들은 경찰이 화를 냈다.
“이런 나쁜 놈들! 저희가 체포해서 확실히 처벌받게 하겠습니다!”
그는 일단 지원을 요청한 후에 선우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이 지역 주민이십니까?”
“아니요. 서윤 씨 만나러 왔다가 위험한 모습을 보고 뛰어들었죠. 휴우. 하마터면 내가 당할 뻔했네.”
경찰이 박서윤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얼른 맞장구쳤다.
“제가 잘 아는 분이세요.”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이러면, 두 분의 증언만 있고 다른 증거가….”
현관 앞의 CCTV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세 놈은 이미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수갑을 찬 상태로 앞다투어 떠들었다.
“우리는 그냥 지나가던 것뿐입니다!”
“저 새끼가 갑자기 우리를 폭행했습니다!”
“억울합니다!”
선우현이 스마트폰을 쓱 들어 보였다.
“물론 저놈들이 서윤 씨를 협박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습니다. 저것들이 먼저 공격하는 모습도 찍었습니다. 두 놈은 나를, 한 놈은 서윤 씨를 공격했죠.”
선우현이 세 놈을 향해 말했다.
“내가 설마 그 정도 대책도 없이 너희들을 잡았을까?”
세 놈이 움찔하다가 말을 바꾸었다.
“저희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당황해서 손이 나간 겁니다.”
“원래는 대화만 하려고 했습니다. 대화만.”
“저희도 누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야! 그 이야기를 왜 해!”
“어? 이건 아닌가?”
선우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경찰관에게 물었다.
“이놈들이 여자 혼자 사는 집안에까지 침입했다던데, 조사하면 혐의가 더 나오겠지요?”
“물론이죠. 이런 나쁜 놈들은 확실히 처넣어야지요. 그런데….”
경찰이 선우현에게 말했다.
“그래도 일단 같이 가서 진술은 해주셔야겠습니다.”
“그럽시다.”
***
세 놈은 현장에서 자백했기 때문에 바로 유치장에 들어갔다.
경찰은 참고인인 두 사람의 이야기부터 듣고 세 놈을 조사하기로 했다.
경찰서에서 박서윤이 선우현의 옆에 앉아 말했다.
“그래도 싸우기 전에 동영상을 찍어두셔서 다행이에요.”
“안 찍었습니다. 내가 미리 카메라 켜고 싸우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네?”
“어차피 저놈들이 자백했으니 됐잖습니까?”
박서윤이 제안했다.
“그럼 촬영이 된 줄 알았는데, 당황해서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녹화가 안 된 거로 할까요?”
“그거 좋네요.”
형사가 두 사람의 앞에 앉았다.
선우현이 당시 상황을 양념을 좀 쳐서 설명했다.
“어제 서윤 씨가 내 토마토 농장에 와서 요즘 수상한 놈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걱정이 돼서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세 놈이 둘러싸서 협박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형사는 선우현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저런 미인이 그런 말을 하면 나 같아도 걱정돼서 찾아가 보겠지.’
박서윤도 맞장구쳤다.
“그 세 놈은 제 방을 뒤지고 집 근처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우현 씨가 안 오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다 좋은데요. 박서윤은 제가 계속 보고 있었는데요? 선장님은 제가 박서윤의 원룸 근처에서 수상한 놈들을 발견했다고 하니까, 그때 출발하셨잖습니까?
“경찰서에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스토커인 것 같잖아.”
- 이상하긴 하겠네요.
두 사람은 진술을 마치고 경찰서를 나왔다.
선우현이 말했다.
“그 원룸은 경찰이 조사해야 한다고 하니까 못 들어갈 테고, 들어가는 걸 추천하고 싶지도 않군요. 오늘은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겁니다.”
박서윤도 범인들이 휘저어놓은 원룸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 숙직실로 갈까 해요. 거기는 보통 비어 있거든요.”
“음…. 이럴 때는 누가 같이 있으면 좋은데….”
김수선이 말했다.
- 갈 곳이 있으면 숙직실로 간다는 말을 안 했겠지요.
선우현은 아는 여자 중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생각해보았다.
“구하니 씨는 안 되겠지?”
- 유명한 가수한테 보내시게요? 파파라치에게 사진이라도 찍히면 귀찮아질 겁니다.
“그럼 한 명밖에 없네.”
선우현이 명품 디자이너 채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길성 비서실 박서윤 대리님이요? 당연히 알죠.
선우현이 오늘 일어난 사건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말했다.
- 세상에! 당장 오라고 해요! 우리 집에 방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