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곽수천
청명 백화점 이사 곽수천이 창문 너머로 길 건너편에 있는 태양 백화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VIP가 토마토 하나에 저쪽으로 넘어간다는 게 말이 돼? 그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게, 재계에서 꽤 유명한 토마토라고….”
“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인맥이 있어야 구할 수 있어서, 보통 사람은 있는 줄도 모른답니다.”
곽수천이 뒤로 휙 돌아섰다.
“이 새끼가.”
그가 백태형에게 걸어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백 비서. 지금 나 무시하냐?”
“아닙니다!”
“내가 보통 사람이야?”
“아닙니다!”
“우리 청명이 태양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유소율이 아는 걸 내가 모르면, 그게 내 탓이야? 그 정보를 빨리 수집해서 보고하지 않은 네 탓이잖아!”
“죄송합니다.”
곽수천이 성질을 부리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래서 그 토마토 정보는 얼마나 확실한 거야?”
백태형이 얼른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금연 건물이지만 둘 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태양 백화점에 꽂아둔 빨대를 통해서 입수했습니다.”
“그래?”
곽수천이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책상에 올렸다. 백태형이 얼른 컵을 옆에 갖다놓았다. 남들 눈이 있어서 재떨이는 두지 않았다.
“유소율이 그걸 찾고 있는 건 확실하겠군. 간단하네. 우리가 먼저 찾아내. 누가 재배하는지 찾아서, 밭떼기로 다 사들여.”
백태형이 머뭇거렸다.
“그게, 토마토 가격에 문제가….”
“자꾸 짜증나게 할래? 내가 시키면 그게 뭐든 무조건 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면 돼.”
“알겠습니다.”
***
길성 비서실 대리 박서윤은 원룸에서 산다. 그 원룸 계약 기간이 조만간 끝난다.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생활비를 아껴 쓰며 월급을 모았다. 그런데 그 돈은 대부분 적금으로 들어있다. 적금을 중간에 해지하는 건 아까웠다.
게다가 그녀가 이사 가고 싶은 곳은 전망 좋은 곳에 있는 투룸이다. 설사 적금을 모두 해지한다고 해도 2년간 모은 돈으로 전세를 얻는 건 어렵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더니, 이젠 창밖이 환한 투룸에서 살아보고 싶다.”
그녀가 선우현의 옥탑방이 있는 건물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옮기면 적금을 해지하지 않아도 방법이 생긴다.
“거기 옥상에서 본 전망이 참 좋았는데.”
선우현이 사는 옥탑방의 옥상은 관리인 알바인 신나리와 선우현의 손님만 올라갈 수 있다.
박서윤은 선우현의 손님이다. 그녀는 토마토를 받으러 그곳에 몇 번 갔었다. 그곳에 가봤기 때문에 전망 욕심이 더 생겼다.
옥상에 가면 선우현이 마실 것을 준다. 커피를 줄 때도 있지만, 토마토가 남을 때는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준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 건물에 투룸 나온 거 있는지 알아봐야지.”
그녀가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했다. 예전에 검색했을 때는 매물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기가 많나? 그럴 위치는 아닐 텐데….”
그녀가 그 지역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건물 위치를 말하고 빈방을 찾았다.
부동산 공인중개사가 말했다.
- 아. 거기요. 거기는 매물이 아예 없습니다.
“네? 전에 검색했을 때는 많았는데요?”
- 건물주가 매물을 다 거둬들였습니다.
“아…. 그래요?”
그녀는 실망했다.
‘그 옥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
며칠 뒤에 그녀가 선우현의 옥탑방 옥상을 직접 방문했다. 오늘은 원하는 토마토를 골라서 가져가는 날이다.
선우현이 토마토 주스를 한 잔 갈아주었다.
그녀가 옥상 난간 앞에서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경치를 감상했다. 산이나 강 같은 풍경이 아니라 도시의 집들이 보였지만, 그래도 시원해서 좋았다.
‘여기 참 좋다.’
그녀가 선우현을 돌아보았다.
“혹시 이 건물에 왜 빈방이 없는지 아세요?”
“빈방 많은데요?”
“네? 부동산에서는 나온 게 하나도 없다던데요?”
“아. 그거. 이 건물 4층이 원래는 통째로 비어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서 토마토를 키웁니다. 그래야 겨울에도 키울 수 있으니까요.”
“전에 직접 만드시던 그거 말씀이시죠? 정말 대단하세요. ”
“음하하하. 나중에는 다른 층도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있어서 매물을 다 거둬들인 겁니다.”
“네. 그렇…. 네? 다른 층까지 다 빌리신 거예요?”
“안 빌렸는데요?”
“그럼 어떻게….”
“이 건물 내 건데.”
“네? 옥탑방에 사시는데 어떻게…. 아!”
박서윤이 지금 마시고 있는 토마토 주스를 보았다. 여기 오면 쉽게 먹거나 마실 수 있지만, 밖에서 팔면 한 개에 백만 원씩 받는다.
“활력 토마토를 팔아서 건물을 사셨어요?”
“그때는 그 돈으로는 부족하더라고요. 거기에 금속 가공 기술 로열티를 땡겨 받아서 샀습니다.”
“와. 대단하세요.”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유가 있어서 건물을 비워두신 거네. 여기로 이사 오고 싶다는 말은 못하겠다.’
박서윤이 아쉬운 표정을 다 감추지는 못하고 옥상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잘 익은 토마토가 하나뿐이네요.”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이 4층에서 촉진제 자동투입장치를 고장 내서 그런 겁니다.
“고쳐놨잖아.”
-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어떻게 지상에서도 장비를 터트리시는지.
그래서 4층은 수확할 만큼 익은 게 없다. 옥상에서 키우는 것 중에 골라야 한다.
“익은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지금 서윤 씨가 마시는 게 그거입니다.”
“어머. 남는 거 주시는 줄 알았는데….”
“며칠 후에는 잘 익은 게 많을 테니까, 그때 다시 가지러 와요. ”
***
청명 백화점 곽수천 이사가 비서에게 물었다.
“그 토마토는 어떻게 됐어? 어디서 누가 농사를 짓는지 찾았어?”
백태형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식물 전문가나 농대 교수, 과수원 전문가까지 다 확인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
곽수천이 화를 버럭 냈다.
“백 비서! 그러다 태양에서 먼저 계약하면 우린 닭 쫓던 개 되는 거야!”
“태양에서 농부가 누군지 알아내면 우리가 꽂아놓은 빨대가 정보를 넘겨줄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
“정보가 넘어왔는데 이미 태양에서 밭떼기로 계약했으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 그게….”
“내가 유소율한테 또 밀리게 하지 마라.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
“추가 정보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곽수천이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헐겁게 풀며 말했다.
“백 비서. 왜 사람이 큰소리를 내게 해? 그런 걸 미리 말했으면 좋잖아. 보고해.”
“JHC 테크 최종훈 사장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곽수천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그거 설마 JHC가 유전자 기술로 합성한 토마토야?”
“그건 아닙니다. 몸에 좋은 성분이 몇 배나 많지만, 토마토 자체는 기존에 재배되는 품종입니다.”
“그러면 JHC를 통해서 알아보면 되겠네.”
백태형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저희가 JHC 테크 사장을 압박할 수는 없어서….”
“설마 사장이 직접 가서 수확하겠냐? 당연히 직원한테 시키겠지. 백 비서 바보야? 내가 이런 것까지 가르쳐줘야 해?”
***
백태형은 청명 백화점 직원 중에 JHC 직원의 지인을 찾아냈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예? 백 비서님. 혹시 거기서 첨단기술 정보를 빼내라는 말씀이십니까?”
백태형은 곽수천 앞에서는 설설 기지만, 다른 직원들을 대할 때는 콧대를 세우고 어깨도 으쓱거린다.
백태형이 목소리를 깔았다.
“우리는 백화점인데 첨단기술 정보를 빼다가 어디 쓰겠습니까?”
“그렇지요? 아니지요?”
“대단한 것도 아닌, 간단한 정보만 알면 됩니다.”
그는 권력을 가진 자의 이름도 팔았다.
“그리고 이거 곽수천 이사님 지시입니다.”
“아….”
직원은 거부할 생각을 버렸다.
‘못 한다고 하면 내리 갈굼이 오겠구나.’
그 직원이 JHC 테크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해 방금 들은 걸 물었다.
그 친구가 대답했다.
- 우리 회사가 토마토를 왜 키워? 우리는 종자 회사나 농산물 회사가 아닌데.
“회사에서 본 적 없어?”
- 전혀. 토마토를 연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직원이 통화를 마친 후에 백태형을 보며 말했다.
“전혀 모른다는데요?”
“그래요? 쯧. 이러면 곽 이사님이 실망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백태형은 백화점 직원 중에 JHC 테크에 인맥이 있는 사람을 두 명 더 찾아냈다. 그들에게도 곽수천의 이름을 팔아 정보를 알아보게 했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가 직접 전화를 돌려봐도 활력 토마토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태형이 백화점 VIP 휴게실 옆 물품 보관용 공간에 들어가서 한숨을 푹 쉬었다.
“환장하겠네. 대학교수도 모른다고 하고, JHC 직원도 모른다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가 지금 있는 공간은 VIP실을 청소하거나 물건을 보충해야 할 때만 직원이 온다. 그 외의 시간은 비어 있다.
그래서 그는 남들 눈을 피해 농땡이 치고 싶을 때 이곳을 가끔 사용했다.
VIP 휴게실에 여자 손님 몇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가 살짝 들렸다.
“활력 토마토 말이야.”
백태형이 허리를 폈다.
“어?”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문 뒤에 귀를 댔다. 손님들의 대화가 조금 더 잘 들렸다.
“전에 남편이 가져온 거 내가 냉큼 먹어버렸더니, 이제 집에 안 가져오네? 아무래도 그거 구하면 혼자 몰래 먹는 거 같아.”
“나눠 먹지 그랬어.”
“맛도 좋고 몸에도 좋잖아. 피부에도 좋을 거 같아서 그랬지.”
“우리 집은 활토가 들어오면 간단한 게임을 해서 이긴 사람이 먹어. 애들도 같이 하는데, 요것들이 이기면 엄마 아빠한테는 주지도 않고 다 먹어버린다니까?”
“자기가 이기면?”
“나는 애들한테는 나눠주지. 남편은 안 주고.”
“남편이 이기면?”
“애교 부려야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참. 길성의 박길성 회장님 알지? 그분은 활토를 일주일에 세 개씩 먹는다더라.”
“어머. 그게 어떻게 가능해? 일주일에 하나 구하기도 힘들다던데.”
“박 회장님이 최종훈 사장하고 가까운 사이래. 그러니까 특별히 신경 써준 거겠지.”
“우리 남편은 최종훈 사장하고 친해지지 않고 뭐한 거야?”
“그러게 말이야.”
***
곽수천은 업계 행사에 참석했다가 태양 백화점 이사 유소율과 마주쳤다.
곽수천이 웃었다.
“소율아. 너 요즘도 쉬는 날도 없이 일한다며? 너 그러다 빨리 늙는다? 어휴. 벌써 피부가 맛이 갔네. 휴일에는 좀 놀아라.”
“내 피부 걱정을 네가 왜 하니? 네 자리나 걱정해.”
“야. 나 우리 할아버지 손자야. 내 자리는 아무도 못 건드려.”
“네가 맡은 사업부 실적, 나한테 밀렸잖아.”
“그건 일시적으로….”
“너랑 논다던 걸그룹 여자애. 마약 소문이 있더라?”
“걔랑은 그냥 술이나 몇 번 마신 사이….”
“한심한 거 더 있는데 계속 말해줘? 네가 지금 내 걱정할 처지니? 내가 너였으면 술 마실 시간에 일했을 거야. 다른 백화점에 밀리지 않으려고.”
***
곽수천이 이를 박박 갈면서 백화점으로 돌아왔다. 그가 비서를 불러 화를 냈다.
“백 비서! 그 토마토 알아보라고 한 지가 언제야! 일 그따위로 할 거야? 어디 한직으로 보내줘?”
백태형이 어깨를 펴고 말했다.
“제가 좋은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그래? 뭔데?”
“길성의 박길성 회장은 일주일에 세 개씩 활력 토마토를 먹는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곽수천이 백태형을 멍하니 보다가 화를 벌컥 냈다.
“지금 나랑 장난하나! 내가 남이 토마토 몇 개 먹는지까지 알아야겠어? 어?”
“이사님. 현재 활력 토마토를 일주일에 세 개나 구하는 사람은 박길성 회장뿐입니다.”
“어?”
“활력 토마토를 공급하는 JHC의 최종훈 사장과 길성의 박길성 회장은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특별대우를 받나 봅니다.”
곽수천이 인상을 썼다.
“그래서 뭐? 부러워하라는 거냐? 아니면 지금부터 최종훈하고 친해지라는 거야? 언제 친해져서 언제 정보를 얻는데?”
“제가 알아봤는데.”
백태형은 백화점 직원을 이용해 길성 쪽에서도 정보를 수집했다.
거기서는 성과가 있었다.
“길성 비서실에 그 토마토를 직접 받아오는 직원이 있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에는 JHC에서 그 토마토를 보내주는데, 담당 직원이 직접 외근을 나가서 가져올 때도 있답니다.”
“JHC에 가서 가져오는 거 아니야?”
“JHC에서는 원래 퀵으로 발송합니다. 설마 퀵비가 아까워서 직원이 직접 가겠습니까?”
곽수천이 의자에 앉았다.
“그것도 그러네? 사람이 직접 외근을 나가서 가져온다? 박길성 회장을 위해서 잘 익은 걸 골라서 따온다는 거겠지?”
“제가 볼 때도 그렇습니다.”
곽수천이 히죽 웃었다.
“백 비서. 이제야 일을 제대로 하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비서실 직원은 누구야? 설마 비서실장은 아니지?”
“아닙니다. 여자 대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