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신상
고대 그리스에 녹음기가 존재할 리 없다. 설사 존재했다 해도 그 시대 사람의 음성 기록이 현대에 직접 전해질 리 없다.
언어학자 크리스토퍼 알렌은 그 시대의 발음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다른 학자의 논문도 여러 편 참고했다.
그는 그렇게 복원한 고대 그리스어를 말할 수도 있다.
김수선의 노래 2절은 고대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다.
그 발음은 알렌이 복원한 것과 똑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완벽했다.
김수선은 심지어 알렌이 확신하지 못하던 발음까지 정확히 말했다.
김수선의 노래에는 알렌이 연구하던 문제의 해답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언어학자 크리스토퍼 알렌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노래를 들었다. 짧은 노래가 끝났다.
“하아.”
그가 숨을 크게 내쉰 후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짧은 노래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건 몇 개 정도였다.
그런데 그 몇 개의 답이 굉장히 놀라웠다.
“아무렇게나 발음하는 게 아니야. 그 시대의 발음을 나보다 훨씬 더 디테일하게 재현했어.”
고대 그리스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특정 발음을 서로 다르게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 이슈가 하나가 아니었다.
그가 너튜브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2절의 가사를 조금씩 끊어 듣고 반복해서 들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가며 단어 하나하나를 비교 분석했다.
결론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여러 이슈를 하나로 정리했어. 마치 이게 정답이라는 듯이. 그런데 그 답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래서 궁금했다.
“김수선. 당신 도대체 누구야?”
***
크리스토퍼 알렌은 김수선이 누군지 찾기 위해 노력했다. 너튜브에는 영상 하나만 달랑 올라와 있어서 정보가 부족했다.
알렌은 한글을 읽을 줄 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이 사람은 아니야.”
김수선과 동명이인은 있지만 조건이 맞는 사람은 없었다.
너튜브에도 문의해봤다.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어서 인맥을 동원했다.
“알버트. 너튜브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지? 사람 하나만 찾아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알렌. 물어봤는데, 너튜브는 영상을 올린 사람의 개인 정보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대.”
“이건 고대 그리스 언어 연구에 중요한 일이야.”
“너튜브는 가입하는 사람의 개인 정보를 자세히 묻지도 않는다더라. 자기가 누군지 알리지 않으려 했다면 찾을 방법이 없어.”
알렌이 가진 직접적인 수단으로는 김수선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에 가봐야 하나….”
한국의 인구는 오천만 명쯤 된다. 김 씨는 한국에서 제일 흔한 성이다.
“학계에 알려서 이슈부터 만들어야겠다. 그러면 언어학자 중에 누군가는 김수선을 알겠지.”
***
김수선이 뿌듯해했다.
- 선장님. 보십시오. 제 노래가 현재 시대에도 통합니다.
선우현이 너튜브의 반응을 보며 말했다.
“너튜브에는 원래 노래 영상 조회수 오십만 넘는 거 흔해.”
김수선의 노래는 조회수 오십만을 찍었다.
- 안 흔할 걸요?
“같은 사람이 반복해서 듣는 것까지 치면 실제로 들은 사람은 십만 명도 안 될 거야.”
그건 조회수가 백 남짓이었을 때 김수선이 먼저 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거 하니 씨가 SNS에 홍보해줘서 확 늘어난 거잖아.”
- 선장님.
“응?”
-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시죠?
“야. 나 하나도 안 부러워. 내가 노래 부르는 거 올리면 백만….”
- 선장님 노래 실력은 제가 잘 압니다만?
“음…. 만 명은 찍을 수 있어. 하니 씨가 SNS에 링크 걸어주면 말이야.”
- 다음에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노래로 할까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하니 씨 작업실에서 녹음해서 너튜브에 올리면 돈은 안 드니까 뭐든 다 해라.”
지금 당장은 다른 곡을 올릴 수 없다. 팔찌형 통신 중계기의 자가 복구 시간이 필요하다.
“직접 통신이 다시 가능해지면 녹음해라.”
***
4층에 실내 스마트 농장을 만든 덕분에 활력 토마토의 생산량이 늘어났다.
옥상에서 화분에 키우는 것과 4층 실내에서 키우는 건 외형에 차이가 조금 있었다. 맛도 살짝 달랐다.
그래도 활력 효과는 비슷했다.
최종훈이 JHC 테크 사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김 사장님도 활토 이야기를 들으셨군요.”
- 그거 나도 좀 삽시다. 정기적으로 공급받고 싶습니다.
“곤란한데요. 활토를 원하는 분은 많지만 생산량이 워낙 적어서요.”
활력 토마토는 맛있다. 하나 먹으면 하루 동안 활력이 생긴다.
요즘은 중요한 효과가 하나 더 알려졌다.
“소문 들으셨겠지만 그게 건강에 그렇게 좋은 명품 과일이잖습니까?”
박길성처럼 기력이 없던 사람도 활력 토마토를 먹은 날은 스무 살은 젊어진 것처럼 활발히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여도 몸에 부담이 가지 않았다.
평소에 별로 움직이지 않던 사람은 그 운동 효과가 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활동하는 날이 반복되면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활토는 삶의 질을 높여주고 건강에 굉장히 좋은 과일로 알려졌다.
- 얼마면 됩니까?
“하나에 백만 원인 거 아시잖습니까?”
- 내가 웃돈 줄 테니까….
“웃돈을 받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구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외국 거부가 다 쓸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허…. 그것도 그렇군요. 최 사장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최종훈이 제안했다.
“일단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시죠. 활토는 농산물이라 수확량이 일정하지 않은데, 여유분이 생기면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자주는 못 드립니다.”
- 최 사장님은 듣던 대로 말이 잘 통해서 좋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그 명단에 제가 올려드려도 토마토 명인께서 거부하시면 바로 빠집니다.”
- 아! 그럼 명인님의 연락처를….
“워낙 조용히 사시는 분이라, 이 일을 제가 대행하는 겁니다.”
- 그렇군요. 그럼 명단에 나도 꼭 좀 올려주십시오.
“김 사장님이니까 올려드리는 겁니다.”
전화를 끊은 후에 최종훈이 씩 웃었다.
“활력 토마토 덕분에 요즘 내가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닌다니까.”
비서 김찬혁이 물었다.
“활토 가격은 진짜 안 올리실 겁니까?”
“가격은 내가 정하는 거 아니다.”
“그건 알죠.”
“그리고 이게 아무리 몸에 좋아도 가격이 너무 비싸지면 어떻게 되겠냐?”
“두 배 받는다고 해도 살 사람이 많겠던데요.”
“욕하면서 떨어져 나가거나, 계속 사 먹긴 하는데 먹으면서도 욕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그거야 그렇죠.”
“대신에 가격을 고정해놓고 웃돈을 준다는 걸 거절하면, 지금 가격에 먹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호구?”
“야. 너는 왜 그렇게 삐딱하냐?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
“꽤 있을걸요?”
“좋은 가격에 샀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거야. 웃돈을 거절하고 기존 고객을 위해 가격을 동결하니까 고마워할 수도 있어. 그러면서 생기는 인맥의 가치가 돈보다 커.”
***
최종훈이 말한 활토 여유분은, 선우현이 먹거나 나눠주고 나서 남는 것을 말한다.
김수선이 두 번째 곡을 녹음했다.
선우현은 구하니의 작업실에 갈 때 선물로 활토를 두 개 가져갔다.
“남는 거 좀 가져왔습니다.”
구하니가 활토를 받으며 말했다.
“이거 먹은 날은 피곤하지가 않아요. 참 신기하죠?”
“몸에 좋은 거라서 그렇습니다.”
“역시 명품 토마토네요.”
“내가 정성을 다해 키웠으니까요.”
김수선이 딴죽을 걸었다.
- 활토는 물과 양분과 급속성장촉진제만 주면 알아서 잘 큽니다만? 옥상의 벌레는 레이저 포탑이 다 잡고, 4층은 스마트 농장이라 일반 해충의 침입이 차단됐습니다. 수확도 최종훈과 김찬혁이 하는데요. 선장님의 정성은 어디 있을까요?
“옥상 토마토는 내가 물 주잖아. 물이 얼마나 중요한데. 물을 안 주면 토마토가 자라겠냐?”
- 장하십니다.
구하니가 말했다.
“호성이 말로는 이게 엄청 귀한 거라던데….”
“그냥 남는 거라니까요.”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 귀한 걸 전에 저한테는 몇 번이나 주셨잖아요. 오늘도 두 개나 가져오시고. 왜 주시는 거예요?”
“좋아한다면서요?”
그녀가 살짝 당황했다.
“아,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요.”
“토마토 별로 안 좋아하시는구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 토마토…. 좋아해요. 엄청 좋아해요.”
그녀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제가 직접 살 수는 없는 거예요?”
“하니 씨는 뭐, 찾아와서 열려 있는 걸 따먹어도 됩니다.”
“어머. 집에 저 혼자 찾아가는 건 아직 좀….”
“아. 그렇겠네. 우리 동네 근처 지나갈 때 들러요. 와서 밥이라도 사면 좀 나눠줄 테니까.”
“자주 들를게요.”
“아니, 근처 지나갈 때….”
“근처를 자주 지나갈게요.”
***
언어학자 크리스토퍼 엘런은 김수선의 너튜브 채널에 새 노래가 올라왔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했다.
“있다!”
그가 숨을 고른 후에 진지하게 영상을 클릭했다. 이번에도 고정된 배경화면에 노래만 나왔다.
1절은 한국어였다.
“이건 어느 시대 음악이지? 설마 요즘 노래는 아니겠지?”
1절이 2절이 나왔다. 언어가 달랐다. 그런데 그가 기다리던 고대 그리스 언어가 아니었다.
“설마 이거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아람어인가?”
신바빌로니아의 언어는 그의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김수선의 발음이 자연스럽다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엘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김수선. 당신 진짜 누구야?”
***
태양 백화점과 청명 백화점은 지점은 없고 본점만 있는 단독 대형 백화점이다.
두 백화점은 수십 년 동안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사거리를 사이에 두고 경쟁했다.
그 두 백화점은 역사가 길고 건물 규모도 컸다. 오랜 단골도 많고 입지가 워낙 좋아 새로운 고객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많은 지점을 거느린 재벌급 백화점에 점점 밀리는 중이다.
유소율은 태양 백화점 창업자의 손녀다.
창업자는 현업에서 손을 거의 뗐다. 요즘은 중요한 결정만 직접 한다.
태양 백화점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그녀의 어머니인 부사장이다.
유소율은 태양 백화점에서 이사로 근무했다.
그녀는 명문대를 나왔다. 실무에서는 우수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직원들은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은 학력과 실력만으로 서른 살의 나이에 이사가 될 순 없다.
그녀는 사장의 손녀이고 부사장의 딸이라서 다양한 좋은 기회를 쉽게 손에 넣었다. 그 기회를 안 말아먹고 잘 성공시켜 실적을 쌓았다.
그래서 서른 살인데도 이사가 됐다.
그녀가 그런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건 결국 사장의 손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더 많은 실적을 내서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더 많은 실적을 내려면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써야 한다.
그녀는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다.
매일 그렇게 일하면 아무리 젊어도 결국은 몸에 무리가 온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유소율이 할머니의 집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요즘은 체력이 떨어진 게 느껴져. 서른이 돼서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서른이 아니라 스무 살짜리도 너처럼 일하면 몸이 못 버텨. 넌 좀 쉬어야 해.”
“안돼. 우리가 청명 백화점에 밀릴 수는 없어. 다른 백화점들은 또 얼마나 치고 들어오는데. 그것들하고 싸워서 이기려면 특별한 게 필요해.”
창업주이자 사장인 그녀의 할머니가 유소율을 물끄러미 보다가 비서에게 손짓했다.
“내 서재에 놔둔 그거. 소율이 줘.”
“네? 하지만 사장님. 그건 사장님이 드셔야 합니다.”
“내 건강 생각하느라 손녀가 일하다 쓰러지는 꼴을 볼 수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윤소율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할머니. 뭔데요? 혹시 산삼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산삼보다 나은 보양식이다.”
“산삼 넣은 삼계탕인가?”
비서가 조그마한 고급 상자를 가져왔다. 유소율이 활짝 웃었다.
“상자 디자인이 진짜 고급스럽다. 엄청 몸에 좋은 게 들어 있나 보다.”
유소율이 잔뜩 기대하며 상자를 열었다. 토마토가 딱 하나 들어 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비서에게 물었다.
“김 실장님? 이게 뭐예요?”
“사장님이 드시려고 어렵게 구한 겁니다.”
“토마토를요? 왜요?”
그녀의 할머니가 말했다.
“몸에 좋거든.”
“토마토는 원래 몸에 좋아요.”
“일단 먹어봐. 구하기 어려워서 나도 몇 번밖에 못 먹어본 건데, 이번에 구한 걸 주는 거야.”
“그럼 접시에 썰어 담아서 시럽이나 꿀이라도 뿌려주던가요. 아니면 치즈라도.”
“안 되겠다. 김 실장. 활토 도로 빼앗아. 내가 먹어야겠다.”
유소율이 토마토를 얼른 꺼냈다.
“먹을게요. 먹는다고요.”
그녀가 토마토를 손으로 들고 한 입 깨물었다.
‘할머니가 왜 겨우 토마토 하나로 생색을….’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일단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