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높은 곳에서 부르는 노래 II
방송국에서 주최한 공연은 TV로도 볼 수 있었다. 실시간 생중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연과 같은 날 방송됐다.
게시판에 시청자의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 에이투원은 홍은성이 섬에서 삽 들고 싸운 거로 뜨더니 저기까지 나오네.
- 은하소녀가 갑자기 왜 나오죠?
- 땜빵이요.
- 은하소녀는 왜 안 뜰까요?
- 전보다 많이 뜬 겁니다. 오민하가 캐리하고 있거든요.
- 에이투원도 홍은성이 하드캐리 하던데.
- 와. 천호성 오늘은 엄청 신나 보이네.
- 그러게요. 컨디션이 좋나?
- 우리 호성 오빠 컨디션 완전히 돌아왔거든요? 앞으로 쭉 꽃길만 걸을 거거든요?
- 역시 프린세스 구하니. 클래스가 다르네요.
- 구하니는 요즘은 방송에 잘 안 나와서 아쉽죠.
- 많이 아쉽지요. 요즘은 공연도 잘 안 하거든요.
***
선우현은 구하니와 술을 가볍게 마시며 너튜브에 관해 이야기했다.
구하니는 선우현이 누구의 노래를 너튜브에 올리려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개인 신상은 비밀이라고 했으니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혹시 첩보원이나 특수부대 요원, 아니면 국제 용병 같은 사람인가?’
구하니가 다른 걸 물었다.
“너튜브에 언제 올리실 거예요?”
“빨리 올려야죠.”
“녹음은 어떻게 하시게요? 그냥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면 안 될 텐데.”
“어….”
김수선이 큰소리쳤다.
- 팔찌형 통신기의 음질은 완벽할 겁니다.
“팔찌에서 나오는 소리를 다시 녹음해야 쓸 수 있잖아.”
- 아차.
구하니가 물었다.
“혹시 목소리 파일만 있으면요. 나머지 작업은 제 작업실에서 하셔도 돼요. 악기 녹음 같은 건 따로 하셔야 하잖아요.”
- 구하니가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그 사고 때 살려준 보람이 있습니다!
“넌 그때 레드 포션 쓰는 걸 반대했다.”
- 선장님의 안전을 위해 살짝 반대한 것뿐입니다.
“적극적이었어.”
선우현이 구하니에게 물었다.
“녹음이 가능한 개인 작업실이 있습니까?”
“본격적인 녹음실은 아니에요. 빈 사무실에 기본적인 것만 세팅했어요.”
“그래요? 언제 시간 됩니까?”
“오늘 공연했으니까 당분간은 다른 일정이 없어요.”
“그럼 내일 보죠.”
***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셔 대리기사를 불렀다. 구하니는 얼굴을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로 가렸다.
김수선이 말했다.
- 우리 물주 집에 가시는 길에 사고 위험은 없는지, 어느 길이 빠른지 제가 잘 보겠습니다.
“수선아. 하니 씨 대우가 평소와 너무 다르다?”
- 오늘의 저는 속물입니다.
선우현은 구하니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SNS에 너튜브 링크를 올리려면 노래를 정말 잘해야 해요. 아니면 엄청 재미있든지요. 어정쩡한 수준인데 제가 추천하면 그분과 저 둘 다 욕먹어요.”
“노래를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추천은 안 해도 됩니다.”
- 아니, 선장님. 그건 좀…. 취향이 다르면 평가가 낮아질 수 있는데요.
“수선아. 나는 너를 믿는다.”
- 믿지 마시죠.
선우현이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어떤 노래를 부를 건지 정해야지.”
- 꼭 제일 유명한 작곡가의 곡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저는 관대하니까요.
“수선아. 제일 유명한 작곡가한테 가수의 정체는 밝힐 수 없지만 곡만 달라고 하면 주겠냐?”
- 선장님이 찾아가서 협박하시죠?
“그건 선 넘는 거고.”
- 그럼 두 번째로 유명한 작곡가….
“네 정체를 숨기는데 너한테 곡을 줄 사람은 은하소녀 소속사 사장인 박대석 씨밖에 없어.”
-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나한테 방법이 하나 있다.”
- 듣기 전부터 불안합니다.
“일단 들어봐. 네가 너튜브에 올릴 노래가 꼭 최신 트랜드를 따라야 하는 건 아니잖아.”
- 그건 그렇습니다.
“너는 고대 이집트부터 현대까지 여러 문화권의 노래를 할 줄 알잖아.”
- 노래하는 건 자원을 소모하지 않으니까요.
선우현이 제안했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만한 옛날 곡 중에서 고르는 건 어때?”
- 그러면 내일 바로 녹음할 수 있겠군요. 고대 그리스의 민요 중에 제가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5분 안에 끝내야 하는데, 길이는?”
- 2분 조금 넘습니다.
“그러면 한 곡치고는 좀 짧으니까….”
선우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한국어로 먼저 1절을 부르고, 2절을 고대 그리스어로 부르는 건 어때? 하니 씨한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니까, 한국어 가사를 먼저 들려주면 좋잖아.”
- 5분을 알차게 쓸 수 있겠군요. 딱 좋습니다.
“한국어 가사는 다시 써야겠네.”
- 고대 그리스어 번역쯤이야 금방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번역은 나도 할 줄 알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고대 그리스에도 현지 협력자가 있었다. 그래서 선우현과 김수선은 그 시대 언어를 말할 줄 안다.
“노래의 가사는 그냥 뜻만 번역하는 거로는 부족해. 지금 시대에 맞게 감성을 잘 살려야지.”
- 그러면 손을 좀 봐야겠군요.
“열심히 해봐.”
- 같이 하는 거지요?
“네가 다 해야지?”
- 선장님. 믿습….
“믿지 마라.”
***
이튿날 오후에 선우현이 구하니를 만났다. 약속장소는 구하니의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에는 여러 장비와 함께 방음 녹음 부스도 있었다.
“이 정도면 여기서 음반을 녹음해도 되겠군요.”
“본격적으로 하려면 더 좋은 시설이 있는 곳에 가서 해야죠. 여기는 혼자 미리 만들어보는 용도에요.”
“하니 씨가 작곡도 합니까?”
“틈틈이 해요. 발표한 적도 있어요. 히트는 못 쳤지만요. 제 작곡 실력은 아직 한참 멀었죠.”
선우현이 옥탑방에서 적어온 악보를 넘겨주었다.
구하니가 악보의 제목부터 보았다.
“그리스 민요에요?”
“그 지역에서 옛날에 꽤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렇구나.”
그녀가 악보에 적힌 정보를 장비에 입력하려다가 멈칫했다.
“아…. 좀 독특한 악기를 쓰네요?”
“그거 대신에 쓸 수 있는 요즘 악기도 따로 표시했으니까, 요즘 걸 써도 됩니다.”
“음계도 표시가 독특하네요?”
“옛날 민요라서 그렇습니다. 요즘 음계와 차이 나는 부분은 조정해줄 테니까, 일단 현대 음계라고 생각하고 입력해요.”
그 악보는 악기를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작업량은 많지 않았다.
현대 음계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김수선이 수정사항을 자세히 설명했다.
- 원곡처럼 하려면 그 음은 조금 높여야 해요.
“내가 듣기에도 그러네.”
선우현이 김수선의 설명을 구하니에게 전달했다.
그 작업이 끝난 후에 구하니가 음악을 들었다. 아직 김수선의 목소리는 들어가지 않았다.
구하니가 말했다.
“어머. 이거 노래 진짜 좋네요.”
“민요는 보통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데, 이건 그 시대에 특히 더 인기가 있었던 곡입니다.”
“이제 음성만 입히면 되겠어요. 녹음 파일 가져오셨죠?”
“아니요.”
“네?”
“사정이 있어서 파일로는 줄 수 없습니다. 스피커로 재생하면 그걸 녹음했으면 하는데요.”
“아…. 그러면 음질이 열화가 될 텐데….”
“음질은 충분히 좋을 겁니다.”
선우현이 녹음 부스에 들어갔다. 귀에는 헤드폰을 꼈다.
구하니는 이 녹음이 단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걸 모른다. 실패하면 통신기 문제로 며칠 후에나 다시 시도할 수 있다.
“한 번에 끝냅시다.”
“호호. 네. 그러면 좋죠.”
선우현이 팔찌형 통신기를 녹음 부스의 마이크 앞에 가져갔다.
헤드폰에서 방금 입력한 음악이 들렸다. 그 소리는 귀에만 들리고 마이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김수선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팔찌형 통신기에서 나와 녹음실의 마이크에 전달됐다.
구하니는 녹음 부스 밖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아….”
부스 밖에서 내는 소리는 안에 있는 마이크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가 감탄했다.
“목소리 진짜 좋다.”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다.
“노래 진짜 잘한다. 노래에 담긴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야.”
왜 선우현이 김수선의 노래 실력을 자신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런데 가수가 여자네?”
한국어로 된 1절은 2분 20초 만에 끝났다. 잠시 후에 2절이 시작됐다.
“어머?”
모르는 언어로 된 노래였다.
“그리스 민요라더니, 그 나라 말인가?”
1절을 이미 들었으니 2절이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이 갔다.
그런데 그 느낌이 1절을 들을 때와 또 달랐다.
“아…. 이 노래, 진짜는 2절이구나.”
5분이 되기 직전에 노래가 완전히 끝났다.
선우현이 마이크 앞에 대고 있던 팔찌형 무전기를 손목에 찼다. 그런 후에 녹음 부스를 열고 나왔다.
“어때요?”
구하니가 감탄했다.
“좋아요. 진짜 좋아요. 다시 들어볼게요.”
구하니가 악기 연주 소리와 목소리를 같이 재생했다. 완전한 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 노래 진짜 좋아요.”
“다행이네요.”
“이거 2절하고 1절이 같은 뜻이죠?”
“네. 지금 시대에 맞게 감성을 살려서 번역한 거니까요.”
“노래하신 분이 그리스 분이세요? 아니지. 한국어가 완벽했으니까 한국분이겠죠?”
“그냥 할 줄 아는 외국어가 많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녀가 녹음한 노래를 다시 들어보았다.
“제가 손댈 곳은 없는데요?”
“한 방에 끝낸다고 했잖아요.”
“그럼 이대로 너튜브에 올릴 거예요?”
“그렇죠. 녹음 파일 복사해줘요. 그러고 나서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앗! 그럼 술도 같이 마셔요.”
***
선우현은 술을 마시고 옥탑방으로 돌아오다가 PC방에 들렀다. 그곳에서 김수선의 이름으로 너튜브 계정을 만들고 오늘 녹음한 파일을 올렸다.
“수선아. 이제 네 노래가 이 지구의 인터넷에 올라갔다.”
- 제 존재의 증거가 지상에 새겨졌군요.
“넌 항상 거기 존재했잖아.”
- 지상에요.
“아. 그렇지.”
***
이튿날 선우현이 너튜브에 올린 파일의 반응을 보았다.
“수선아. 조회수가 벌써 백이 넘었어.”
- 실화입니까?
“많아서?”
- 설마 그래서겠습니까? 겨우 백이라니! 중복 조회수까지 따지면 실제로 제 노래를 들어본 사람은 더 적잖습니까?
“대신에 댓글은 많이 달렸는데?”
선우현이 댓글을 확인했다.
- 목소리 진짜 쩌네.
- 노래도 좋아.
- 김수선이 도대체 누구야? 그런 가수는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선우현이 말했다.
“이거 어젯밤에 올린 거잖아. 사람들은 아직은 네 노래가 있는 줄도 모를 거야. 하니 씨가 내일 SNS로 추천해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봐.”
이튿날 구하니가 그녀의 SNS에 김수선의 너튜브 링크를 추가했다.
고교 야구선수 김인혁은 구하니의 팬이다.
“하니 누나 추천은 언제나 확실하지.”
구하니는 가끔 너튜브에 있는 노래를 SNS를 통해 알렸다.
그녀는 이미 유명한 가수의 노래는 굳이 알리지 않았다. 보통은 커버곡이나 자작곡을 올리는 너튜버의 영상 링크를 SNS에 올렸다.
김인혁이 링크를 클릭했다.
김수선이 부른 노래가 흘러나왔다.
“제목이 그리스 민요야? 이게 최선…. 와. 쩐다.”
김인혁이 숨죽이고 집중해서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2절이 나왔다. 영어가 아니라 모르는 언어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 여자 목소리는 진짜 악기 같다.”
2절이 끝났다.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김인혁이 숨을 크게 쉬었다.
“흐아. 역시 하니 누나의 추천 링크는 확실하네. 이번 추천은 아주 역대급인데?”
그녀가 노래를 부른 사람을 검색해보았다.
“김수선이 도대체 누구지?”
***
며칠이 더 지났다.
미국 언어학자 크리스토퍼 알렌이 너튜브에서 들을 음악을 찾았다. 그가 평소에 찾던 정보와 연계돼 추천 영상이 몇 개 떴다. 그중 하나가 김수선의 그리스 민요였다.
언어학자 알렌은 한글을 읽을 줄 안다.
“그리스 민요?”
그가 그 영상을 클릭했다.
너튜브는 동영상 사이트인데 화면에는 단색 배경화면만 나왔다. 대신에 노래가 들렸다. 1절은 한국어였다.
알렌이 피식 웃었다.
“한국어로 부르면서 무슨 그리스 민요라고…. 어?”
알렌이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세웠다.
“이 노래는 고대 민요인데?”
그는 이 곡을 안다. 고대 그리스 언어를 연구하면서 접해본 적이 있다.
“정말 잘 재현했네. 정확하지 않던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어.”
이 곡의 원래 악보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됐다.
유실된 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악보를 보고 채워 넣기는 했다. 하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악보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중 어느 것이 원곡과 같은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복원했는데? 이게 원곡이라도 해도 믿겠어. 누구지? 고대 그리스 음악을 연구하는 사람이겠지?”
언어학자 알렌은 고대 그리스어에 조예가 깊다.
“누군지 몰라도 연락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다.”
한국어로 부른 1절이 끝났다. 그가 등받이에 다시 등을 기댔다.
“이 노래를 힘들게 복원해놓고 왜 굳이 한국어로 부르는지 모르겠….”
김수선은 그 노래의 2절은 고대 그리스 시대 언어로 불렀다.
알렌의 등이 의자에서 튕기듯 떨어졌다.
“어? 이건 헬라어잖아.”
그가 집중해서 노래를 들었다.
“아니, 발음이 어떻게 이렇게….”
김수선의 고대 그리스어 발음이 너무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