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남는 거
가수 천호성이 말했다.
“하니야. 너 그렇게 큰소리치다가 목소리 다시 상하면 어쩌려고? 줬다 뺏으면 더 아쉽다던데.”
구하니가 인상을 썼다.
“호성아. 네가 원래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오는 또라이라는 건 아는데.”
두 사람은 가수를 꿈꾸던 아마추어 햇병아리 때부터 알던 사이다. 그때는 목표가 같아서 죽이 잘 맞았다.
그런데 천호성은 그때도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다.
구하니가 천호성를 째려보았다.
“나라고 이 목소리를 다시 잃는 게 무섭지 않은 줄 알아?”
그녀는 사고로 목을 다쳤다가 일 년 동안 계속 굴러떨어지기만 했었다. 은퇴를 고려하던 그 암울한 상황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공연이나 방송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인기 욕심을 버렸더니 삶의 질이 올라갔다.
그렇다고 인기가 떨어진 것도 아니다. 섭외하기 어려워졌는데도 그녀를 찾는 곳은 더 많아졌다.
“너 오늘 선 넘었어.”
구하니의 매서운 눈빛을 본 천호성은 복도에서 선우현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구하니의 눈빛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괜히 뜨끔했다.
천호성이 손을 흔들었다.
“야. 아니야.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한 말이야.”
“네 걱정이나 해. 너 요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은 거 알지?”
천호성의 눈빛이 대놓고 흔들렸다.
“야. 내 목은 언제나 완벽해.”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천호성은 요즘 목 컨디션이 나빠져서 고민이 많았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예전보다 못하다는 건 느꼈다.
그는 구하니가 목을 다쳤을 때 얼마나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지 봤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그는 구하니를 찾아왔다.
‘목소리가 돌아온 비결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그는 양미나를 통해 구하니가 목에 좋은 것을 먹고 목소리를 회복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니야. 미나가 그러던데, 굼벵이 그거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아?”
“응? 너도 그거 먹었니?”
“어. 목에 좋다고 해서.”
“맛은 어때?”
“건조 굼벵이 분말을 캡슐에 넣어서 먹었더니 먹을 만했어. 생으로 구워 먹거나 삶아 먹는 건 아직 도전을….”
천호성이 멈칫했다.
“잠깐. 왜 맛을 물어봐? 넌 골고루 먹어봤다던데? 그럼 맛을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굼벵이는 미나 놀리려고 그렇게 말한 거야. 너까지 먹을 줄은 몰랐네.”
“네 이년! 나도 그거 먹었는데!”
“물어보지 그랬니?”
“젠장. 괜히 먹었네. 손해 봤다.”
천호성이 대기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굼벵이는 아니란 거지? 그럼 뭔가 다른 좋은 걸 먹고 있나? 천연 벌꿀이라든지, 로얄제리라든지, 희귀한 차라든지….’
구하니의 스마트폰에 문자가 들어왔다. 그녀가 스마트폰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뒤쪽 탁자가 천호선의 시선에 들어왔다. 탁자 위에 작은 상자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천호성의 눈이 커졌다. 그는 똑같은 상자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어? 저게 왜 여기 있어?”
그가 급히 탁자로 다가가 상자 하나를 손으로 잡고 열어보았다.
안에는 활력 토마토가 들어 있었다. 그는 이 토마토도 본 적이 있다.
천호성이 구하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이거 어디서 구했어? 이거 진짜 귀한 건데.”
***
관계자 관람석에 있는 선우현에게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티켓의 답례로는 활토를 하나만 줘도 되는 거 아닌가요?
“4층 스마트 농장에 오늘 활토가 많이 열렸잖아. 어차피 남는 거야.”
***
구하니가 말했다.
“그냥 토마토잖아.”
“아니야. 이건 달라.”
천호성이 설명했다.
“내가 얼마 전에 광고주의 집에 초대된 적이 있거든? 거기서 이걸 봤어.”
천호진이 토마토를 조명에 비춰보았다.
“이 고급진 붉은색. 이 균형 잡힌 모양. 게다가 이 상자. 내가 그때 이 상자도 봤거든? 이 독특한 고급 디자인을 착각할 리가 없잖아.”
“그거 고급 토마토인 건 맞아. 맛있거든.”
천호성이 그때 일을 떠올렸다.
“맞아. 내가 그날 한 조각 얻어먹었는데, 진짜 맛있어. 그리고 이게 몸에 그렇게 좋다고 들었….”
그는 문득 그날 노래를 평소보다 편하게 불렀다는 게 생각났다.
“어?”
그날 초대된 건 광고주의 딸이 그의 팬이어서였다. 손님 대접도 제대로 받았고 팬의 반짝거리는 눈빛도 봤다. 그런 상황에서 노래를 한 곡도 안 부르고 올 수는 없었다.
그는 그날따라 목 컨디션이 평소보다 좋아서 신나게 세 곡을 불렀다.
‘그날은 분위기가 좋고 맛있는 음식을 잘 먹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평소보다 편하게 나오는 현상은 금방 사라졌다. 그 작은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효과가 없었다.
‘그 분위기에 취해서 노래가 잘 나온 줄 알았는데.’
광고주는 그 토마토 하나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천호성에게 한 조각 나눠주었다. 그러면서 그게 산삼 녹용보다 더 몸에 좋다고 자랑했다.
천호성는 구하니가 목에 좋은 걸 먹고 목소리를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하니의 목소리가 다시 좋아진 비결이 설마 이건가?’
그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하니야.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선물 받았어.”
선우현이 오늘 공연 표를 받은 답례라며 주고 갔다.
천호성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그 집에서도 구하기 어려워서 하나를 몇 조각으로 잘라서 나눠 먹은 걸, 다섯 개나 선물 받아?’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누가 그럴 수 있는지 고민했다.
최근에 다른 여자 가수가 보석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고 자랑한 게 생각났다.
“너 재벌 2세랑 사귀냐? 조심해라. 엔조이일 수 있다.”
“너 헛소리 하러 왔니?”
“아니야? 그러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들이미는 거야?”
“꺼져줄래?”
“아니, 그게 아니면 이 구하기 어려운 걸 누가….”
“가라고.”
“알았어. 갈 테니까 이 토마토 하나만 줘.”
“사 먹어. 너 돈 많잖아.”
“나도 전에 이거 먹어보고 나서 사려고 했지. 그런데 백화점에 가도 없어.”
“그러면 과일가게를 가.”
천호성은 멈칫했다.
“뭐야? 너 모르는구나?”
“뭘?”
“이건 돈이 있어도 인맥이 없으면 못 구하는 거라더라. 그날은 광고주의 딸이 부탁해서 큰마음 먹고 나눠준 거야.”
“응?”
“인맥이 있어도 한 번에 여러 개는 못 사.”
구하니는 궁금해졌다.
‘정말 선우현 씨가 준 토마토가 쟤가 말하는 그 토마토일까?’
천호성이 군침을 삼키며 물었다.
“역시 재벌 2세가 너한테 들이대….”
“이거 맛보기 싫지?”
천호성이 즉시 말을 바꾸었다.
“내가 씻어올까?”
“농약 안 치고 키운 거라서 그냥 먹어도 된대.”
“당연히 그렇겠지! 완전 친환경 유기농일 줄 알았어!”
천호성이 상자를 열어보고 다섯 개중에 제일 큰 걸 골랐다.
“그럼 난 이걸….”
“작은 거로 골라.”
천호성의 손이 즉시 옆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제일 작은 걸 먹으려고 했어.”
그는 토마토를 꺼내 불빛에 비춰보았다.
“진짜 이 완벽한 색과 모양 좀 봐. 이건 과일의 왕이야. 아니, 황제야!”
구하니가 과도를 꺼냈다. 천호성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야. 무섭게 칼은 왜….”
“내놔.”
“드리겠습니다.”
구하니가 토마토 하나를 반으로 자르고 다시 자르고 또 잘랐다. 여덟 조각으로 자른 후에 한 조각을 내밀었다.
“네가 말한 그거 맞는지 먹어봐.”
천호성이 냉큼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곧바로 환성을 질렀다.
“맞아! 이 맛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고!”
“확실해?”
“당연하지! 이 맛은 그냥 토마토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달고 상큼하고 진한 맛이니까.”
천호성이 그렇게 말하며 접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구하니가 과도를 흔들었다.
“어딜 손을 대?”
“어? 그 토마토 하나는 나 주는 거 아냐?”
“맛은 보여줬다.”
천호성이 항의했다.
“야! 먹던 거 빼앗는 게 어디 있냐?”
“응. 여기 있어. 이제 확인했으니까 꺼져줄래?”
“줬다 빼앗는 게 제일 치사한 짓이야!”
“너 좀 전에도 나한테 그렇게 말했지? 내 목소리 다시 망가질 수 있다면서.”
“내가 그랬다고?”
“내 목소리 망가지면 줬다 빼앗은 거라 더 아쉽겠다며?”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 내 손에 칼 있다. 당장 꺼지든지 아니면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라.”
구하니는 이 토마토를 공연 전에 하나 먹을까 생각하던 중이다.
어차피 하나는 칼로 잘랐다. 한 조각은 천호성을 줬지만 일곱 조각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녀가 그 토마토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과즙이 달고 시원해서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맛있어.”
천호성이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치? 이건 정말 명품 과일이야. 너도 전에 먹어본 거 맞지?”
“당연하지.”
처음 먹어본 건 섬 촬영 사건 때다. 그때는 빵을 주고 토마토를 받았다.
구하니가 토마토를 한 조각씩 먹었다. 다시 먹어도 너무 맛있었다. 일곱 조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호성에게 준 한 조각이 아까워졌다.
‘괜히 줬나?’
구하니가 천호성을 보았다. 천호성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다른 상자들을 보고 있었다.
구하니가 경고했다.
“야. 꿈도 꾸지 마라.”
“너는 아직 네 개나 있는데….”
“오늘 나 도와주는 동생 하나 주고, 나머지는 집에 가져갈 거야. 이거 많은 거 아니야. 모자라.”
천호성이 입맛을 다셨지만 어쩔 수 없다. 구하니가 칼을 들고 있는데 억지로 빼앗을 수는 없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이거 누가 준 거야?”
“있어.”
“내가 너 걱정돼서 그래. 이런 건 공짜가 아니라고. 대가 없이 사주는 건 돼지고기까지란 말도 있잖아. 분명히 너한테 원하는 게 있을 거야.”
구하니는 처음에는 빵을 주고 토마토를 받았다. 오늘은 공연 티켓을 한 장 주고 답례로 다섯 개를 받았다.
“아니야. 그런 거 없어.”
“없을 리가 있어? 이걸 구하려고 돈을 얼마나 썼을지 모르….”
“그분이 이 토마토를 직접 키우니까 나눠줄 수 있는 거야.”
천호성는 화들짝 놀랐다.
“헉! 토마토의 현인을 알아!”
“응? 현인이라니?”
“인생을 맛있는 토마토를 키우는 데 바친 토마토의 현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원래 다른 걸 더 잘하는 분이셔.”
“뭐? 말도 안 돼.”
“말 돼. 너도 그런 사람 본 적 있잖아.”
가수나 배우가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구하니가 말했다.
“아마 그분이 원예에 취미가 있어서 토마토도 잘 키우는 거겠지.”
천호성의 생각은 달랐다.
“이게 어떻게 취미 수준이냐고. 최소한으로 쳐도 명인이지.”
“그래. 그럼 명인이라고 하자.”
천호성이 과즙이 묻은 손가락을 빨면서 말했다.
“그럼 하니야. 네가 말 좀 잘해서 나한테도 이 토마토 좀 팔아달라고 해주라.”
“이거 귀한 거라며?”
“엄청 귀하지. 인맥이 없으면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으니까.”
“그 귀한 걸 내가 부탁한다고 너한테 주겠냐? 포기해.”
***
천호성이 그의 대기실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그가 노래를 불러보았다.
스타일리스트가 칭찬했다.
“오늘 오빠 컨디션이 좋나 봐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맑게 들려요.”
“네가 듣기에도 그렇지? 나도 그래. 소리 내는 게 훨씬 편해.”
목소리 자체가 바뀐 건 아니다. 상태가 나빴던 목의 컨디션이 좋아졌을 뿐이다.
‘그날 광고주 집에서 한 조각 먹었을 때도 이랬어.’
천호성이 방금 먹은 토마토를 떠올렸다.
‘역시 하니 목소리가 좋아진 건, 그 명품을 많이 먹어서일 거야.’
구하니는 활력 토마토 때문에 목소리를 회복한 게 아니다. 목에 레드 포션을 직접 맞았다.
천호성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하니처럼 토마토 명인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혹시 만나게 되면 예의 바르게 공손히 인사해야지.”
***
공연이 시작됐다.
홍은성이 소속된 에이투원은 공연 초반에 무대에 올라왔다.
김수선이 에이투원의 실력을 평가했다.
- 노래는 그럭저럭하는군요.
“그럭저럭조차 안 되는데? 춤은 더 문제가 많아. 쟤들은 앞으로 연습 많이 해야겠다.”
홍은성이 무대에서 춤을 추다가 선우현이 있는 관계자 관람석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래 안무에는 없던 동작이었다.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는데? 나한테 인사하나 보다.”
- 타깃을 공격하라는 지시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건 어떠신지?
“수선아. 그냥 공연 직관이 부럽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