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조연출 박성훈
입장권을 받았으니 관계자들이 있는 곳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 선우현이 대기실을 떠나 관객석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공연장의 복도는 복잡하게 얽혀 있고 안내 표지판도 부족했다.
“갈림길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관객석이 나오려나.”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은 오염지역 침투 작전을 여러 번 성공적으로 완수한 베테랑 맞으시지요? 그동안 말씀하신 전투 경력이 다 뻥인 건 아니지요?
“당연하지. 탐사대 선발대 선장을 아무나 시키겠냐? 나 오염지역 장거리 침투 작전의 베테랑이었어.”
- 그런 분이 어떻게 공연장 복도에서 길을 잃을 수 있나요?
“응? 그러게?”
- 선장님?
“비좁은 지원위성 선체에서 너무 오래 지내서, 아직 감이 안 돌아와서 그래.”
- 지상에 내려가신 지 좀 되셨습니다만?
“느낌 왔다. 왼쪽으로 가야겠다.”
가수 천호성이 스마트폰을 보며 복도를 걸어왔다.
천호성은 오늘 공연에서 구하니와 함께 남녀 메인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가수다.
그가 복도를 걷다가 갈림길에 서 있던 선우현과 어깨가 툭 부딪혔다.
천호성이 옆으로 휘청 밀렸다. 손에 든 스마트폰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천호성이 선우현을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씁!”
“씁?”
천호성이 선우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선우현의 옷은 유명 브랜드가 아니다. 몸에 걸친 것 중에 특이한 건 팔찌형 통신 중계기 딱 하나였다.
천호성이 선우현이 입고 있는 옷의 견적을 낸 후에 째려보며 말했다.
“거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말이야.”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다가 부딪힌 건 천호성이다.
선우현이 말했다.
“음…. 또라이인가?”
“뭐? 이 새끼가.”
천호성이 선우현의 멱살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방금 어깨가 부딪쳤을 때 천호성 혼자 옆으로 튕겼다. 선우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깨가 되게 단단하던데, 좀 치나?’
천호성이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말로 협박했다.
“이쪽에 있는 걸 보면 관계자 같은데, 나한테 이러고 괜찮을 거 같아? 너 그러다 모가지 날아간다?”
모가지를 자른다는 말은 보통 회사에서 쫓아낸다는 의미로 쓴다. 그런데 선우현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가 대가리 잘 날리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먼저 날리나 해보자.”
선우현이 천호성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김수선이 다급히 말렸다.
- 선장님! 거기서 상대의 머리를 날리면 뒷감당이 안 됩니다!
“그러면 머리는 안 날리고 목만 꺾으면 될까?”
- 될 리가 있습니까?
“이놈이 먼저 내 목을 친다고 했는데?”
- 설마 진심이겠습니까? 선장님을 직장에서 쫓아내겠다는 말이겠지요.
“난 직장 안 다니잖아.”
- 그렇죠. 맨날 노시죠.
천호성도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아 더 물러날 곳이 없어졌다.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내, 내 목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 가수야!”
“음? 아. 야.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놀라냐? 보기보다 겁이 많네?”
- 선장님. 그냥 가시죠? 그러다 진짜 머리 날리면 큰일 납니다.
“가려고 했어.”
선우현이 왼쪽 복도로 걸어갔다.
천호성은 선우현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 보이지 않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우. 무슨 사람 눈빛이…. 진짜 목을 따려는 줄 알았네.”
천호성이 선우현이 사라진 방향을 힐끗거리며 바닥에 떨어뜨린 스마트폰을 주웠다.
“에이. 설마 진짜로 그러려던 건 아니겠…. 어? 액정에 금 갔네. 젠장.”
***
박성훈은 KMTV 방송국의 PD다. 아직은 경력이 길지 않아 그동안은 예능 프로의 조연출로 일했다.
그는 저번에 충청도 산속 식당에서 막내 작가 안유정과 함께 밥을 먹으려다가 칼잡이 조성철 패거리에게 붙잡혔다.
선우현은 그날 팔찌형 통신기를 찾으러 그 식당에 들렀다가 안유정과 박성훈을 구해주었다.
박성훈은 그날 이후에 밀린 연차를 몰아 쓰며 쉬었다. 복귀한 후에는 내근 위주로 일했다.
이번에 방송국에서 그에게 한 시간짜리 단편 특집 프로그램을 단독으로 맡겼다.
박성훈이 복도에서 막내 작가 안유정을 만났다.
“유정 씨는 오늘 무슨 일로 온 거야?”
“하니 언니 일일 매니저요. 저 요즘 여기저기 땜빵만 하잖아요.”
“그렇구나. 소식 들었어? 나 한 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 하나 맡기로 했거든?”
“어머! 드디어!”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말이야. 아무래도 그날 우리가 산속 식당에서 겪은 사건 때문에 방송국에서 보상 차원에서 맡긴 거 같아. 그거 출장 중에 일어난 일이잖아.”
“에이. 설마 그래서겠어요? 피디님도 이제 맡을 때가 됐잖아요. 능력을 인정받은 거겠죠.”
“고마워. 흐흐. 그런데 그날 나만 그 일을 겪은 거 아니잖아. 그래서 유정 씨한테 연락하려고 했어. 이거 같이 만들어야지?”
“막내 자리가 비어 있어요?”
“아니. 한 시간짜리 단편인데 막내는 무슨. 당연히 유정 씨가 메인 작가이지.”
“넹? 진짜요?”
“응. 진짜야.”
“그럼 여기는 저 섭외하려고 오신 거예요? 대박!”
박성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아니고, 내가 남들 눈에는 시간이 많아 보였나 봐. 나도 빈자리 땜빵하러 왔어.”
“아…. 우리 둘 다 땜빵이네요.”
“그래서 대답은? 같이 할 거지?”
“당연히 콜이죠.”
***
선우현은 입장권에 적힌 좌석 위치를 찾아냈다.
“그 복도에서 오른쪽이 맞는 길이었네.”
- 반대쪽으로 삥 돌아서 오셨습니다.
“어쨌든 도착했으면 됐지.”
관계자용 관람 공간은 오른쪽에 치우쳐있었다. 그 주변에는 기둥과 카메라 같은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어 일반 관객석과는 조금 분리되어 있었다.
그가 번호를 확인하고 의자에 앉았다.
공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어서 주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옆자리에만 딱 한 명이 와 있었다.
먼저 와서 혼자 앉아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SNY 이태균 실장입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SNY는 복도에서 만난 가수 천호성의 소속사이다.
선우현이 대답했다.
“아는 사람이 표를 줘서 구경 온 겁니다.”
구하니가 입장권을 주었다.
“아하. 저도 호성이가 표를 줬습니다. 그럼 아는 사람이 오늘 노래하는 분 중에 있나 봅니다.”
“그렇죠.”
“역시 그러시구나.”
이태균이 선우현의 얼굴을 확인했다.
‘일단 배우는 아닐 테고.’
옷차림과 헤어스타일도 훑어보았다.
‘옷도 싸 보이고…. 시계가 좀 특이한데 디지털이니까 명품은 아니겠네. 동종 업계 관계자면 안면이나 트려고 했더니,’
그는 선우현의 외모로 판단을 끝냈다.
‘일반인이구나.’
이태균이 부담 없이 자랑을 시작했다.
“제가 천호성이랑 참 친합니다. 친형 같은 사이죠. 제가 호성이를 어느 정도는 키웠거든요.”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선장님. 시끄럽다고 전해주시죠.
“잡음이다 생각하고 그냥 들으면 되지. 볼륨을 좀 낮춰. 지정석이라 자리 옮길 수도 없…. 누가 이쪽으로 오는데?”
- 적입니까?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
박성훈 피디는 그가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
“유정 씨 인맥으로 구하니 씨를 섭외할 수 있으면 대박인데…. 구하니 씨가 내 프로그램에 나와줄 리는 없겠지.”
출연할 사람을 섭외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벌써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
하지만 기획사에서 출연을 제안한 연예인이 너무 신인인 데다가, 그가 생각하는 콘셉트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조건까지 따라붙었다.
그는 첫 방송은 그런 간섭 없이 마음대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관계자 관람석에 누가 있는지 확인했다.
“저기 괜찮은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여기서 섭외를…. 어?”
박성훈이 눈을 비볐다.
선우현이 보였다. 그는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다.
그가 다급히 선우현 쪽으로 걸어갔다. 거의 뛰는 것처럼 빠른 걸음이었다.
선우현은 옆에 앉은 이태균이 자기 자랑을 하다가 박성훈을 발견했다.
“어? 박성훈 피디?”
박성훈은 그들의 옆 통로로 와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이태균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성훈 피디님. 마침 뵙고 싶었습니다.”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SNY의 이태균 실장입니다. 이번에 하시는 프로그램에 저희 애들….”
“잠깐만 좀, 조금 비켜봐요.”
“예?”
박성훈이 선우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누구시더라….”
“충청….”
박성훈은 멈칫했다.
경찰은 그날 조성철 패거리를 박살 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했다. 박성훈은 혹시 선우현에게 피해가 갈까 봐 경찰에 인상착의를 말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옆에서 그의 말을 기획사 사람이 듣고 있었다.
박성훈이 하려던 말을 살짝 바꾸었다.
“한두 달 전에 뵈었습니다.”
선우현은 박성훈이 누군지 깨달았다.
“아. 그날 거기서…. 컨디션은 괜찮습니까?”
“네! 덕분에 다 괜찮습니다! 제 이름 걸고 방송도 하나 만듭니다! 한 시간짜리입니다!”
“잘됐네요.”
박성훈은 그날 선우현이 보여준 무술 실력을 떠올렸다.
‘어? 잠깐. 이분을 섭외하면?’
액션 위주의 콘텐츠가 생각났다.
‘대박 나겠는데?’
박성훈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제 방송에 출연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저한테 액션 시나리오가 하나 있….”
“안 합니다.”
“아…. 그러시겠죠.”
‘그 엄청난 액션을 방송에서 보여주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지.’
“그럼 방송 콘셉트를 바꾸면 됩니다. 전문 스포츠 콘텐츠로….”
“안 한다니까요.”
박성훈을 찾는 연락이 무전으로 들어왔다. 박성훈이 무전기에 대고 대답했다.
“지금 갑니다.”
그는 급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꼭 연락 주십시오.”
박성훈이 명함을 준 후에 선우현의 명함을 기다렸다.
돌아오는 게 없었다. 선우현이 말했다.
“내가 명함을 안 가지고 다녀서.”
“아…. 그럼 꼭 연락 주십시오! 제가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식사라는 말에 선우현이 입맛을 다셨다.
“나 맛있는 거 먹는데.”
“적금을 깨서라도 최고의 진미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냥 맛집이면 됩니다. 밥 먹는데 적금을 왜 깹니까?”
“알겠습니다!”
박성훈은 꼭 연락을 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자리를 떠났다.
김수선이 말했다.
- 저도 먹을 줄 압니다.
“어…. 나중에 우주왕복선에 맛있는 거 많이 채워서 보내줄게.”
- 어떤 맛있는 것 말입니까?
“전투식량?”
- 많이 드십시오.
옆자리에 있던 기획사 실장 이태균은 당황했다.
그는 선우현의 옷과 시계만 보고 일반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박성훈 피디가 너무 공손히, 그리고 반갑게 선우현을 대했다.
‘박 피디가 아무리 이제 막 자기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박성훈은 조연출 생활을 할 때도 실력을 꽤 인정받았다. 그런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방송을 만들게 됐다.
기획사 SNY는 그 프로그램에 소속 신인 연예인을 넣으려고 이리저리 줄을 대던 중이다.
‘첫 방송에서 맺은 인연이 나중에 인기 피디가 됐을 때도 이어지게 해야 하는데….’
이태균이 선우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어디 계신 분인지….”
“옥탑방이요.”
이태균이 머리를 굴렸다.
‘옥탑방? 예명인가? 회사 이름인가? 새 기획사? 아니면 음악 전문가 그룹? 작곡 팀? 뭐지? 어디지?’
***
구하니는 선우현이 주고 간 활력 토마토 상자 다섯 개를 보았다.
“이거 진짜 맛있었는데.”
지금은 중요한 공연 전이라 미리 확인하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게 좋다. 만약 음식을 먹었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공연을 망칠 수 있다.
“이건 선우현 씨가 준 과일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하나만 먹을까?”
대기실 문이 열렸다. 가수 천호성이 들어오며 말했다.
“야. 공연 준비는 잘 되고 있냐?”
구하니가 돌아앉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렇게 돌아다닐 시간에 네 공연 준비나 신경 써. 나는 완벽하니까.”
“너 제2의 전성기라고 너무 자신하는 거 아니냐?”
요즘 그녀가 노래할 때의 목소리는 스무 살 때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 목소리에 그동안 쌓은 기교와 감정 표현력이 더해져서 노래가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활동을 줄였다. 인기 욕심도 좀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
“나는 지금이 내 인생의 진짜 전성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