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은하
공연장 뒷문 앞에 서 있던 경비원이 선우현을 인식했다. 이제 스태프가 짐을 옮길 때 안으로 침투하는 건 어려워졌다.
선우현이 홍은성을 타박했다.
“너 때문에 들켰다고.”
“형님! 진짜 여기서 볼 줄은 몰랐습니다!”
“내 이야기 안 듣는구나.”
아이돌 그룹 에이투원은 원래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홍은성이 예능 방송에 가끔 나가는 덕분에 그나마 팀의 이름이라도 알리는 수준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홍은성이 갑자기 선우현에게 달려가는 걸 보고 왜 그러는지 궁금해했다.
“누구야? 연예계 관계자인가?”
“형이 아니라 형님이라잖아. 연예인 아닐까?”
“얼굴이 아닌데?”
선우현이 말했다.
“다 들리는데.”
홍은성이 선우현을 가리키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야! 이 형님이 그 형님이야! 그 섬 촬영장에 쳐들어온 마약조직을 파바박 날려버린 그 형님!”
멤버들은 깜짝 놀라 달려와 폴더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그날 일은 홍은성이 멤버들에게 여러 번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안다. 만약 거기서 홍은성이 죽거나 크게 다쳤으면 에이투원은 해체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홍은성은 삽을 들고 마약조직과 싸우려고 했다. 그 모습이 잘 편집돼서 나간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걸 본 다른 피디가 에이투원을 생활 예능 프로그램에 섭외해 그들의 평소 모습을 두 회차에 걸쳐 방송했다.
에이투원은 원래는 비인기 그룹이라 다들 배가 고팠는데, 이제는 팀원들도 홍은성만큼은 아니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그들은 선우현을 보자마자 인사했다.
“은성이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우현이 말했다.
“얼굴이 아닌 사람한테 연예인들이 뭘 이렇게 단체로 인사합니까? 그냥 지나가는 사람 1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다. 1은 얼굴이라도 나오니까 3 정도가 좋겠네. 뒤통수만 보이게.”
“헉! 죄송합니다!”
선우현이 손을 흔들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김수선이 말했다.
- 농담 아니신데요?
선우현이 에이투원을 보며 작게 말했다.
“수선아. 굳이 침투하지 않아도 되겠다.”
-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들어가려고.”
선우현이 말했다.
“나는 구하니 씨를 만나러 왔는데, 그냥 같이 들어갑시다.”
홍은성이 손뼉을 쳤다.
“역시 구하니 선배님과 잘 아시는군요!”
그 섬 촬영 사건 때 구하니도 그곳에 있었다.
“잘 아는 건 아니고.”
선우현이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전해줄 게 있어서.”
선우현은 네 사람과 같이 공연장 뒷문으로 들어갔다. 경비원은 선우현이 오늘 출연자와 같이 들어오는 걸 보고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홍은성이 선우현을 안내했다.
“구하니 선배님 대기실은 저쪽입니다.”
“대기실에 같이 가게?”
“아. 그럴….”
“굳이 같이 가게?”
“아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우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데 홍은성이 떠나지 않았다.
“뭐지?”
“형님. 저기, 휴대폰 번호 좀….”
“남자가 내 번호를 왜 따?”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연락처를 몰라서요!”
“그냥 명함 있으면 주고 가.”
“넵!”
홍은성이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연예인이 공연하러 왔는데 명함을 들고 다닐 리 없다.
“아….”
“번호 불러봐. 외울 테니까.”
홍은성이 얼른 전화번호를 불렀다. 선우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가서 공연이나 준비해라. 내가 관객석에서 지켜볼 테니까.”
“앗! 네!”
홍은성이 직각 인사를 하고 떠났다.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왜 일부러 쫓아버리셨습니까?
“같이 들어갔는데 하니 씨가 나를 멕인 거면, 쪽팔리잖아.”
- 그건 그렇습니다.
“번호 외웠지?”
- 그런 건 좀 직접 외우십시오.
선우현이 대기실로 걸어갔다. 문에 구하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가 문을 두드린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구하니와 예능 막내 작가 안유정이 같이 있었다.
“자리에 있었네.”
구하니는 소속사도 없고 매니저도 없다. 요즘은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 대부분의 일을 혼자 처리한다.
그렇지만 오늘 방송국 공연 같은 스케줄이 있을 때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녀는 그럴 때는 친한 동생인 안유정을 불러 일일 임시 매니저를 맡겼다.
구하니는 선우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대기실로 오라면서요?”
“그랬죠. 그런데 입장권이 없으실 텐데. 아니, 입장권이 있어도 대기실 쪽으로는 출입이 안 될 텐데.”
삐뚤어진 김수선이 말했다.
- 역시 구하니가 선장님을 멕인 거 맞습니다.
“그런가 보다.”
구하니가 설명했다.
“저한테 도착했다고 전화 주셨으면 유정이가 나가서 모시고 들어왔을 텐데요.”
“전화 안 받던데.”
“네? 그럴 리가 없는데.”
구하니가 스마트폰을 가방에서 꺼내 확인했다.
“어머. 조금 전에 미팅 때문에 꺼놨다가 켜는 걸 까먹었어요.”
안유정이 한마디 했다.
“언니 그거 온종일 붙들고 있더니, 정작 중요할 때는 꺼놨네?”
“그러게.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지?”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수선아. 멕인 거 아니란다.”
- 쳇.
“기대했나 보다?”
구하니가 물었다.
“진짜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잘?”
안유정이 옆에서 인사했다.
“우현 오빠! 오랜만이에요!”
“내가 오빠입니까?”
“당연하죠! 전에 결혼식 파티 때도 오빠라고 불렀잖아요.”
김수선이 딴죽을 걸었다.
- 나이 차이가 오천 살쯤 나는 오빠군요.
어쨌든 오해는 풀렸다.
스태프가 문을 열었다.
“매니저분 잠깐 나와서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습니까?”
“네. 나갈게요.”
안유정이 나가는 바람에 대기실에는 두 명만 남았다.
구하니가 물었다.
“그런데 손에 그건 뭔가요?”
선우현이 고급 종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작은 종이상자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입장권을 준다는데 빈손으로 오기는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간식으로 먹어요.”
그녀가 가벼운 마음으로 쇼핑백을 받고 상자를 꺼냈다.
“어머. 상자가 참 고급지네요. 간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목걸이나 지갑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에이. 그런 걸 줄 리가.”
그녀가 작은 상자를 열며 말했다.
“그럼 역시 고급 과자점….”
고급 상자 안에는 토마토가 들어 있었다. 그런 상자가 다섯 개였다.
“토마토네요?”
“토마토죠.”
“토마토가 엄청 고급스러운 상자에 들어 있어요. 왜죠?”
“고급 토마토니까요.”
구하니는 섬 촬영 사건 때 선우현이 가져온 토마토를 얻어먹었다.
“아. 혹시 전에 먹었던 그 직접 키우신 토마토?”
“예. 그거입니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 근데 그때는 비닐봉지에 담아오시더니, 포장이 고급 상자로 바뀌었네요?”
“채연서 씨가 디자인해줬습니다.”
섬 사건 때는 명품 디자이너 채연서도 같이 휘말렸다. 그곳에서 채연서는 마약조직원에게 잠깐 붙잡혔다가 구출됐다.
“그때 선우현 씨가 연서 씨를 구해주셔서, 보답으로 디자인해줬나 보다. 쇼핑백까지 다 해준 거죠?”
채연서가 패키지 디자인을 맡은 이유는 다르지만 선우현은 대충 넘어갔다.
“뭐, 그렇죠.”
구하니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연서 씨가 사람이 참 괜찮네. 이거 공을 많이 들인 고급 디자인 같은데.’
그녀가 작은 상자 다섯 개를 쇼핑백에서 꺼내 대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녀는 따로 챙겨둔 입장권을 가방에서 꺼냈다.
“오늘 공연 좌석표예요. 근데 이거 일반 관객석이 아니라 관계자용 자리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불편하시면 제가 일반 표로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관계자용 자리가 더 좋습니까?”
“제일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 이상은 갈 거예요. 옆쪽이긴 하지만 뒷자리는 아니니까요.”
“그럼 이걸로 하죠.”
선우현은 좌석 번호가 적힌 입장권을 받고 싱글벙글 웃었다.
“이거 추첨 떨어졌을 땐 실망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구하니가 그의 웃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선우현 씨는 이런 공연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합니다. 전에는 보고 싶어도 못 봤지만요.”
“네? 왜….”
“여기까지 올 수가 없어서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섬 같은 곳에서 사셨나? 아니면 외국에서?’
밖에 나갔던 안유정이 돌아왔다.
“언니. 제작진이 동선 문제로 협의 좀 하재.”
“알았어. 금방 갈게.”
선우현도 입장권을 흔들며 말했다.
“저도 가야겠네요. 공연 잘 보겠습니다.”
“네. 이런 자리 또 생기면 입장권 보내드릴게요. 물론 이런 거 좋아하시면요.”
“하니 씨. 당연히 좋아합니다.”
“그, 그래요? 꼭 보내드릴게요.”
***
선우현이 관객석을 찾아 복도를 걸었다. 맞은편에서 걸그룹 은하소녀 네 명이 걸어왔다.
갑자기 은하소녀 멤버 오민하가 선우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앗! 앗”!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아. 이런.”
오민하가 쪼르르 달려와 선우현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환성을 질렀다.
“꺄아! 찾았다!”
“여기서 마주치네.”
김수선이 물었다.
- 누군데 그러십니까?
“전에 구하니 씨 노리고 교통사고를 일으킨 청부업자들 있잖아.”
- 구하니 씨의 목에 레드 포션을 쓰게 만든 그놈들 말이군요. 그런데 그놈들은 다 쓸어버리셨잖습니까? 거기서 마주칠 수 없을 텐데요?
“그때 그놈들한테 목격자라서 납치된 여자애 말이야. 그것들을 쓸어버릴 때 덤으로 구출했잖아.”
- 은하소녀의 오민하 말입니까?
“어. 지금 마주쳤다. 근데 나를 알아봤다.”
오민하가 환하게 웃으며 선우현을 껴안으려고 두 팔을 내밀고 달려들었다.
선우현이 냉큼 옆으로 피했다.
오민하가 허공을 껴안았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 후에 선우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저 기억하시죠?”
“은하소녀 오민하.”
“네! 그날 저 구해주신 분 맞죠?”
“사람 잘못 보셨….”
뒤에서 걸어오던 로드 메니저가 갑자기 후다닥 달려와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다시 뵙게 돼서 영광, 아니, 살려주셔서 진짜 고맙습니다!”
“이제 나 아니라고 해도 안 믿겠네.”
- 그러게요. 왜 거기서 딱 마주쳤을까요? 조심 좀 하시지.
오민하가 환성을 질렀다.
“거봐요! 맞잖아요! 보자마자 딱 알아봤어요!”
은하소녀 멤버가 물었다.
“민하야. 누구신데 그래?”
“내가 납치됐을 때 나 구해준 분! 내 생명의 은인!”
“뭐? 네가 맨날 말하던 그분?”
다른 세 명이 얼른 선우현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은하소녀입니다!”
“민하를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희 요즘 좀 알려졌어요! 이번 공연에 대타로 들어간 것도 다 민하 언니가 그때 얻은 인기로 스노우볼을 굴리고 하드 캐리해서 그런 거예요!”
선우현이 입장권을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오늘 노래 잘해요. 난 공연 보러 왔으니까 관객석으로 갑니다.”
오민하가 급히 물었다.
“앗! 잠깐만요! 연락처, 아니, 명함 좀 주세요!”
“내가 명함이 없어서.”
“네?”
“그리고.”
선우현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복도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날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나한테 좋을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쉿.”
오민하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때 선우현이 때려잡은 청부업자들은 모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다.
그 싸움을 목격한 오민하는 일부러 경찰서에서는 그의 인상착의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앗!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저희는 입 꾹 다물게요. 그리고요.”
그녀가 로드 매니저의 팔을 툭툭 치며 손을 내밀었다. 로드 매니저가 왜 그러는지 몰라 눈을 껌벅였다.
“명함요. 명함.”
“아!”
로드 매니저가 얼른 명함을 꺼내주었다. 오민하가 그 명함을 선우현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주며 말했다.
“꼭 연락 주세요.”
“어…. 시간 나면요.”
“시간 꼭 내주세요.”
***
오민하의 소속사인 기획사 폴라시의 사장 박대석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 그분을 만났어? 어디서?”
“여기 복도에서요.”
“어? 여기는 공연 관계자나 방송 관계자가 아니면 못 들어오는 곳인데?”
오민하가 손뼉을 쳤다.
“앗! 그러면 우리 쪽에 계시는 분인가 보다! 나랑 가까운 분이셨네!”
로드 매니저가 맞장구쳤다.
“그러고 보니까, 들고 계신 입장권이 일반 관객용이 아니라 관계자용이었습니다.”
박대식이 말했다.
“관계자 관람객은 앉는 자리가 한쪽에 모여 있지?”
“예. 맞습니다.”
“그럼 공연 끝나고 나서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박대석은 오민하의 외삼촌이다.
“우리 조카를 살려준 은인인데 내가 인사 정도는 해야지.”
오민하가 말렸다.
“그분이 저를 구해줬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실 수 있어요. 그때 그분이 그 청부업자들을 완전히 부숴버려서, 경찰에 신분이 알려지면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요.
박대석이 손을 흔들었다.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겠냐? 괜찮아. 그분이 누군지 말 안 하고, 업계 관계자에게 하듯이 인사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