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증산
실내 야구연습장을 나온 후에 집으로 가면서 김인혁이 부탁했다.
“형. 나 자세 좀 가르쳐줘요.”
“걸을 때는 똑바로 걸어. 의자에 앉을 때는 허리를 붙여.”
“아니 그거 말고요. 타격 자세요.”
“나 따라 하면 다친다.”
“왜요”
“내 타격은 실전용이거든. 선수가 공 때리는 자세랑은 좀 달라.”
김인혁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에이. 형처럼 칠 수 있으면 자세가 좀 달라도 돼요. 외다리 타법 같은 것도 있잖아요.”
김수선이 말했다.
- 실전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나 봅니다.
사귀지도 않은 여자애에게 차인 이야기로 잡담이나 하며 좀 걷다가 언덕 중간에서 김인혁이 말했다.
“우리 집은 저기에요.”
“가깝네. 정말 악연인가.”
“형은요?”
선우현이 언덕 꼭대기에 있는 4층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구나. 몇 층에 살아요?”
“옥탑방.”
“아. 옥탑방….”
“옥상이 넓어서 거기 사는 거야.”
“네. 그럼요. 괜찮아요. 형. 모듬 순대랑 순댓국 얻어먹어서 미안해요. 야구연습장 배팅비 정도는 내가 냈어야 했는데.”
“내가 설마 고딩보다 돈이 없겠냐?”
김인혁의 얼굴이 펴졌다.
“그렇죠? 안 미안해해도 되죠? 그럼 또 사주….”
“너 집에 안 가냐?”
“갈게요. 그리고 나중에 타격 자세 꼭 좀 봐줘요.”
“내 자세 따라 하는 건 위험해서 안 되지만, 네 자세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은 좀 봐줄게. 내가 원래 보는 건 잘하거든.”
선우현은 지원위성에서 오랜 세월 수많은 경기를 구경했다.
“내가 옛날에는 홈런왕의 경기도 자주 보고 그랬어.”
“믿어도 되나….”
“믿기 싫으면 없던 일로 하자.”
“믿죠! 당연히 믿죠!”
선우현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나 이 동네에 산다고 소문내지 마라. 특히 기자한테는 말하지 마.”
“넵!”
***
선우현은 토마토를 옥상에서 키운다. 얼마 전부터는 화분을 두 배로 늘려 수확량도 두 배가 됐다.
이튿날 낮에, 선우현이 탁자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토마토를 먹으며 말했다.
“이것만 키워서 먹으니 좀 아쉽다.”
- 이제 배가 부르셨군요. 처음에는 진짜 토마토를 먹는다고 되게 좋아하시더니요.
“사람은 원래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거야.”
- 제가 보기엔 처음부터 누워서 뒹굴뒹굴하셨습니다만?
“가끔 일했잖아.”
- 뒹굴뒹굴하다 가끔 기지개 켜는 수준이었죠.
선우현이 토마토 화분들을 보며 말했다.
“사과를 키우고 싶긴 한데, 사과나무는 촉진제를 써서 키워도 좀 오래 걸릴 거야. 화분에 키울 사이즈도 아니고. 그냥 딸기 같은 거라도 키워볼까?”
- 화분이 더 쌓이면 옥상이 좁아 보일 겁니다.
“아. 그건 그렇다.”
선우현은 이 넓고 전망 좋은 옥상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 산다.
여기서 탁 트인 풍경을 보면 가슴 속까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탐사대 지원위성에서 보는 우주는 반대로 답답했다.
“그래. 옥상은 좁아지면 안 돼. 나중에 화분을 좀 빼야겠다.”
- 확장 계획은 접으시는 거지요?
“아니. 다른 데서 키워야지. 그러려면 식물용 급속성장촉진제가 더 필요해.
- 지난번에 보내드린 게 아직 남아 있을 텐데요?
“더 많이 키울 거니까 미리 좀 많이 만들어둬.”
- 선장님. 유기물 재처리 합성장치로 식물 촉진제만 만들 수는 없어요.
“내가 이제 칼로리바를 안 먹으니까 합성장치 가동에 여유가 생겼잖아.”
선우현이 지상에 내려와 있으니 지원위성에서는 그가 먹을 식량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 그래도 대규모 농장을 운영할 만큼 급속성장촉진제를 합성하는 건 무리입니다.
급속성장촉진제는 조금만 써도 효과가 있다. 대신에 비료는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
이 건물 옥상에서 화분을 놓고 토마토를 키우는 정도라면, 필요한 촉진제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규모 농장을 운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촉진제도 대량으로 써야 한다.
- 촉진제를 대량으로 만들려면 레드 포션을 많이 소모해야 합니다.
급속성장촉진제에는 레드 포션이 조금 들어간다.
“포션은 재고가 엄청 많잖아. 어떻게 오천 년이 지났는데도 줄어든 게 표가 안 나.”
- 아주 많죠. 그런데 전부 변질된 상태라 재처리 과정을 거쳐야 하잖습니까? 재처리는 자원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합니다.
지원위성은 자원과 에너지가 항상 부족하다.
- 유기물 재처리 합성장치도 최근에 겨우 수리했습니다. 무리해서 돌리면 아예 터져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설마 대규모 농장을 짓겠냐? 그냥 작게 할 거야.”
- 텃밭은 관리 문제로 쉽지 않을 텐데요? 매일 옥상에서 뒹구시는 분이 어떻게 관리하시게요?
“실내에 스마트 팜을 만들면 해결되잖아.”
스마트 팜은 자동으로 제어되는 시설에서 식물을 키우는 시스템을 말한다. 실내용 스마트 팜은 조명까지 따라온다.
- 지상에서 판매되는 스마트 팜을 설치하시게요?
“아니. 급속성장촉진제를 사용하려면 우리 위성에 있던 걸 써야지. 그래야 문제가 안 생길 테니까.”
탐사대 지원위성에는 전에는 스마트 농장 시설이 있었다. 그 시설에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키우면 승무원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설은 이미 아주 옛날에 다 뜯어내 선체 보수에 사용했다.
- 관련 장비는 전부 자재나 부품으로 사용했습니다만?
“선체 농장 시스템이 어떤 구조인지 자료는 남아 있잖아. 지상에 있는 부품으로 선체에 있던 것과 비슷하게 만들어보려고.”
김수선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좋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저는 여기서 응원이나 하겠습니다.
선우현이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말이야. 선체의 스마트 농장을 자동으로 관리하고 제어하던 장치 말이야. 그거 지금 어디에 쓰고 있지?”
김수선이 단호하게 말했다.
- 꿈도 꾸지 마시죠.
“물어만 본 거야.”
- 선체 안정화 장치의 보조 부품으로 쓰고 있습니다.
“보조 부품이니까 빼도 되나?”
- 선체 안정화 장치가 터지기라도 하면, 수리할 때까지 보조 장치로 버텨야 합니다. 그런데 보조 장치도 부품이 없어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못 빼겠구나.”
- 선체가 대기권으로 추락해서 저까지 활활 불타는 게 보고 싶으면 빼가시던가요.
선우현이 즉시 꼬리를 말았다.
“그걸 참고해서 비슷하게 새로 만들려고 했어. 내가 설마 제어장치를 진짜 떼달라고 했겠어?”
- 진짜입니까?
“너 나 못 믿어?”
- 네. 이미 레이저 방어 포탑의 제어장치를 떼어가셨습니다만?
그 제어장치를 베이스로 만들어 옥상에 설치한 저출력 레이저 포탑은 벌레의 침입을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다.
“하긴. 나도 나를 못 믿긴 해.”
김수연이 물었다.
-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지상에서 살 수 있는 것들로 잘 만들어 봐야지.”
- 선장님은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안 믿잖아.”
- 어차피 지원위성에 있는 자재를 소모하는 건 아니니까 실컷 말아먹으셔도 괜찮습니다.
“말아먹기를 바라는 것 같다.”
- 스마트 팜을 어디에 만드실 겁니까?
“이 건물에서 하면 딱 좋잖아.”
- 옥상은 비워두겠다면서요.
“그래서 방금 든 생각인데, 이 건물 사버릴까?”
- 네?
“여기는 산동네 언덕 위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잖아. 그렇게 비싸진 않을걸?”
- 선장님. 돈은 충분히 있으시고요? 기술 라이센스는 아직 돈이 별로 안 들어왔고, 토마토 판 돈은 건물 살 만큼 안 될 텐데요?
“내가 나쁜 놈들을 때려잡고 챙긴 금괴가 많이 있는데…. 그걸로 건물을 사면 이상하지?”
- 건물 매입 대금을 금괴로 주시게요? 높은 확률로 신고당할 겁니다.
“금괴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
- 선장님. 최종훈의 차가 건물 앞에 섰습니다.
***
최종훈이 옥상 출입을 잡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어?”
그가 옥상으로 들어왔다.
“아. 선우현 씨. 계셨군요. 전화가 되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뭘 좀 구상하느라 꺼놨습니다.”
최종훈이 다가오다 멈칫했다. 테이블에 토마토가 접시에 담겨 올려져 있었다.
“혹시 누가 여기로 또 옵니까?”
“아니요. 최 사장님 겁니다.”
“제가 오는 줄 어떻게 아시고.”
“밑에 차 대는 게 보여서요.”
“아. 고맙습니다.”
최종훈이 앞자리에 앉아 토마토부터 한 입 먹었다.
“크으. 진짜 이 토마토는 먹을 때마다 항상 맛있습니다. 먹으면 힘도 나고요.”
선우현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최종훈이 씩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소형 금속 부품 제조 기술 라이센스를 원하는 회사가 네 곳이 더 생겼습니다.”
선우현이 서류를 쓱 훑어보았다.
“다 영어 이름이네요?”
“그중 두 개는 국내 회사고 두 개만 외국 회사입니다. 외국 회사들은 한국 지사를 통해 기존 회사의 양산품을 테스트해보고 라이센스를 요청했습니다.”
기술 지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계약은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새 회사들을 기존 명단 어느 위치에 넣을지 정해주시죠.”
“그런 건 최 사장님이 알아서 하시면 되죠.”
“그럴까요? 그럼 기존 명단 뒤에 붙이겠습니다.”
최종훈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좋은 기술을 어떻게 그렇게 뚝딱 만드신 겁니까? 폐기 장비들을 가지고 연구하다가 만드셨다던데.”
“그냥 하다 보니 되던데요.”
최종훈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분야의 천재가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천재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니까.’
기술 개발 회사를 운영하는 최종훈은 그런 사람을 몇 명 안다. 선우현이 그 사람들보다 특별하긴 하지만 납득을 못할 건 없다.
선우현이 서류를 보며 물었다.
“이 회사 중에 문제 될 곳은요?”
“재성퍼시픽 같은 회사들은 확실히 걸러냈습니다.”
“앞으로 이 회사들과 전부 계약하는 거겠지요?”
“예. 협의도 더 필요하고, 계약 후에도 기술 지원을 해야 하니까 동시에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결국엔 라이센스 공급 계약을 체결하게 될 겁니다. 기술 격차가 확실하니까요.”
“돈이 좀 될까요?”
최종훈이 웃었다.
“하하하. 물론이죠. 우리 회사가 원래 기술을 비싸게 파는 걸 잘합니다.”
JHC 테크는 기술 개발 및 라이센스 판매로 먹고사는 회사다. 그게 최종훈이 현지 협력자가 된 이유다.
선우현이 말했다.
“그럼 이건 다 알아서 진행하시고.”
“좋은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라이센스비를 선불로 좀 땡겨주시죠.”
“예?”
선우현이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이게 좀 필요해서요.”
최종훈은 선우현의 옥탑방을 보았다.
“갑자기 돈을 어디 쓰시려고…. 아. 혹시 이사를….”
“이 건물을 사려고요.”
“예? 이 건물을요?”
최종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4층 건물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다. 전망은 좋지만 입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건물도 오래됐다.
선우현이 물었다.
“아. 라이센스를 팔아서는 수익이 그 정도는 안 나오나요?”
최종훈이 손을 흔들었다.
“안 나오기는요. 이런 언덕 위 낡은 건물 정도는 지금 명단에 있는 회사들과 계약하면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장기적인 로열티 수입까지 고려하면 더 큰 건물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더 좋은 곳이 많은데 왜 굳이 이 건물을….”
선우현이 씩 웃었다.
“이 건물을 사서 스마트팜을 만들 겁니다. 여기가 언덕 위라서 햇볕이 잘 드니까요.”
선우현은 건물 외부의 태양광을 4층 내부로 끌어들여 에너지를 절약할 생각이다. 지원위성에서 비슷한 방식을 썼다.
최종훈의 눈이 자연스럽게 옥상에서 키우고 있는 토마토로 향했다.
“아. 그러니까 이 건물 4층에서도 토마토를 재배하시려고….”
그의 눈이 번뜩였다.
‘잠깐. 지금은 이 토마토를 옥상에서 화분에 재배하니까 생산량이 부족한 건데, 4층 전체에서 재배하게 되면?’
그래도 수요를 공급이 못 따라간다.
‘작은 건물 한 층에서 생산하는 양으로는 어차피 대규모 판매는 어렵지만.’
그래도 좋다.
‘생산량이 늘어나면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도 많아지겠는데? 게다가 활력 토마토가 많아지면 인맥을 더 넓힐 수 있어.’
기존 고객에게는 현재 판매하는 수량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좋은 걸 맛보여준 후에 더 좋은 인맥으로 갈아타려고 기존 공급은 끊으면, 인맥 관리는 망한다. 기존 인맥으로부터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공급을 끊으려면 갈아타기가 아닌 다른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좀처럼 없다.
활력 토마토가 몸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팔아달라는 요청이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여유분이 없어서 신규 고객에게는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방금 선우현이 활력 토마토 증산 계획을 꺼냈다.
최종훈이 흥분한 벌떡 일어났다.
“제 사재를 털어서라도 당장 투자하겠습니다! 얼마면 됩니까!”
“투자는 됐으니까 돈만 땡겨주시죠. 이 건물 살 만큼만.”
“당장 땡겨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