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탑
최종훈은 잘 익은 토마토만 골라서 수십 개를 따갔다.
그가 간 후에 선우현이 책을 폈다.
그 버드형 정찰드론의 몸체는 JHC 연구소에 있던 폐기 장비를 모아 만들었다. 그런데 제어 소프트웨어가 없었다.
그래서 선우현은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책의 제목은 ‘전문가를 위한 임베디드 프로그래밍’이었다.
“이 책을 보자마자 이거다 싶더라. 내가 이것만 다 배우면 정찰드론의 펌웨어를 개발할 수 있어.”
- 선장님. 믿습니다.
30분 후에 선우현이 하품을 했다.
“어우. 왜 졸리지?”
- 선장님. 진도가 너무 느립니다. 계속 같은 곳을 보고 있습니다.
“수선아. 내가 원래 전략전술이랑 현장 전투 전문이잖아. 그래서 이런 소프트웨어 개발 쪽은 좀 약해.”
- 지구연합의 소프트웨어 기술에 비하면 간단한 겁니다.
“그치? 간단하지?”
-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배우면 되겠다. 이런 건 네가 전문가잖아.”
- 책을 여기로 보내줘 보시던가요. 아! 그러려면 최소한 위성용 로켓이라도 필요하겠군요.
선우현이 탁자 위에 책을 활짝 펼쳤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펼쳐놓고 있을 테니까 네가 읽으면서 공부해. 페이지 넘기는 건 내가 해줄게.”
김수선이 즉시 말을 바꾸었다.
- 지구연합의 소프트웨어 개발은 콘셉트 모듈 방식이어서 그 책에 나온 기술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봐도 모릅니다.
“말 바꾸기냐?”
- 네.
“나도 바꾸는 거 잘한다.”
선우현이 프로그래밍 책을 평상 위에 던져버렸다.
“좀 쉬어야겠다.”
- 공부하신다면서요?
“나도 손바닥 뒤집는 거 잘한다고.”
- 뒤집기의 달인이시죠.
“수선아. 무리해서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는 거야.”
- 무리 안 하셨는데요? 그 책 30분 보셨는데요?
선우현이 벌떡 일어났다.
“아! 한강공원에 오늘 세웠다는 탑이나 구경하러 가야겠다.”
***
선우현이 한강공원에 설치된 20m짜리 대형 금속 구조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수선아. 저 탑을 봐라.”
- 탑이 좀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설계할 때 예술이 들어가서 그래. 최 사장님이 그러는데 저게 현대 미술이 적용된 체험형 예술 작품이라더라.”
- 예술 작품이라면 더 대단한 걸 옛날부터 많이 봤잖습니까? 그리스의 석상들이 더 아름답습니다.
“저건 금속으로 만들었어.”
- 그 시대에도 청동상이 있었습니다만? 옛날에 언덕에 묻힌 건 어떻게 됐나 모르겠습니다.
“저건 동상이 아니라 탑이라고.”
- 에펠탑에 비하면 너무 작은데요?
“쌓인 게 많구나?”
- 선장님이 30분 만에 지상의 소프트웨어 기술 습득을 때려치웠는데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래도 나사 제작 기술은 팔았잖아. 저 탑이 그 결과라고. 이렇게 탐사대의 현장 지원 기술을 하나씩 팔다 보면 네가 있는 곳까지 가는 우주왕복선을 살 수 있다니까?”
한강공원에 설치된 철탑은 높이가 20m 정도였다. 탑 내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이 올라갈 수 있었다.
선우현이 탑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탑 자체에 전망대가 있는 건 아니네.”
철탑은 하나가 아니었다. 똑같은 모양으로 두 개가 서 있었다. 두 개의 탑은 중간에 금속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건 탑이 아니라 그 출렁다리였다.
이미 많은 시민이 그 다리 위에 올라가서 한강과 공원을 구경했다. 다리 위에는 커플이 특히 많이 보였다.
어떤 커플은 가만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예 철제 다리 위에서 깡충깡충 뛰면서 사진을 찍는 커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가 살짝 출렁거렸지만, 사람이 중심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선우현이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선아. 저 다리를 만드는 데 내가 개발한 나사가 사용됐다. 시작은 작은 나사지만 그 끝은 우주왕복선이리라.”
- 선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우현이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탑을 만드니까 뭐 뜯어먹을 게 있나 싶어서 찾아온 양아치들인가? 옛날에도 그런 놈들이 종종 있었지. 감히 내 나사로 만든 탑을 노려? 어디냐? 어디 있냐?”
- 그런 철탑을 노리는 놈이 왜 있겠습니까? 뜯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응? 문제가 생겼다며?”
- 탑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선우현이 두 개의 탑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느 탑인데?”
- 왼쪽 탑입니다. 이쪽 모니터에 뜨는 탑의 영상에 수직으로 선을 그어보았습니다. 탑이 직선으로 서 있지 않습니다.
“기울어졌다는 거야?”
- 모양 자체가 특이해서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탑 중간이 약간 비틀어져 있습니다.
선우현이 철탑을 보았다. 탑 중간에 조금 비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예술 작품이니까 일부러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겠지. 저 옆에 탑을 보면 똑같이…. 음…. 안 똑같네?”
- 반대편 탑은 똑바로 서 있습니다. 왼쪽 탑만 비틀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관측하면 그 차이가 보여서 말씀드린 겁니다.
선우현도 진지해졌다.
“양쪽 탑 이미지를 시스템에 넣어서 분석 돌려.”
- 알겠습니다.
지원위성에는 탐사대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한 환경 위험 분석 기능이 있다. 그 기능을 쓰면 나무가 쓰러져 생긴 다리가 사람이 지나갈 때 안 무너지고 버틸 수 있는지 계산할 수 있다.
지원위성은 평소에는 에너지 절약 모드로 유지된다. 자원과 에너지가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석 기능을 쓰려면 에너지를 추가로 소모해야 한다.
- 시스템에 에너지를 더 공급하고 탑의 영상을 넣어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 나사로 연결된 중간 부분에서 비틀림을 확인했습니다.
선우현의 표정이 굳었다.
“수선아.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개발한 나사에 결함이 있다는 거냐?”
- 선장님? 왜 말을 ‘우리’로 바꾸십니까? 조금 전에는 선장님이 개발한 나사라면서요?
“책임은 나눠야지.”
- 역시 나쁜 건 나누고 좋은 건 혼자 드시는 선장님답습니다.
“하여간 우리 나사가 문제라는 걸 알았으니까, 최종훈 사장한테 연락해서 나사를 교체하라고….”
갑자기 금속이 뒤틀릴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잠깐. 이 소리 뭐야? 선체에서 많이 듣던 소리가 왜 여기서 나?”
- 방금 그 탑의 중간 구조물이 조금 더 뒤틀렸….
곧바로 탱 하는 소리가 났다. 김수선이 재빨리 보고했다.
- 나사가 부러졌습니다!
“젠장!”
탱 소리가 또 났다.
- 금속 구조물 연결에 사용한 나사가 또 부러졌습니다. 선장님! 나사가 계속 부러지면 그 탑은 무너집니다!
철탑이 무너져도 선우현은 안전하다. 기껏해야 부러져서 튕겨 나오는 나사만 조심하면 된다.
그런데 한강공원에 설치된 그 철탑은 사람이 직접 올라갈 수 있는 체험형 시설이다. 현재 이십여 명의 사람이 두 개의 탑 사이에 연결된 다리 위에 올라가 있다.
20m짜리 철탑 두 개는 금속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다리 위에서 걸음을 걷거나 제자리에서 살짝 뛰었다. 그때마다 한쪽 탑의 비틀림이 커졌다.
사람들은 출렁다리의 흔들림이 조금 커지자 재미를 느끼고 더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 충격이 더해져 반대편 탑에도 영향을 끼쳤다.
“으하하하. 흔들린다!”
“이래도 괜찮나?”
“쇠로 만들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괜찮지.”
이제 반대편 철탑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수선아. 해결법을 찾아!”
- 반대편 탑은 구조물은 휘지 않았습니다! 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다리 위의 사람들을 반대편으로 보내야 합니다!
선우현이 탑을 향해 달렸다. 김수선이 경고했다.
- 어쩌시게요?
“사람들을 저기서 내보내려면 올라가야지!”
- 그냥 내려오라고 소리를 지르세요!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
- 지금 탑을 올라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저 탑에 우리 나사를 썼어! 사망자라도 나오면 우주왕복선 회사는 못 만들어!”
- 그런 건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우주왕복선이 없으면 김수선이 있는 탐사대 지원위성으로 물자를 보낼 수 없다.
김수선이 소리를 질렀다.
- 선장님! 더 뛰세요! 모두 살려요! 죽을 거 같으면 레드 포션이라도 쓰세요! 아낄 때가 아닙니다!
“그럴 거야!”
선우현이 탑의 입구로 들어갔다. 막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이 보였다.
선우현이 그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 바깥으로 던지듯이 밀었다. 미는 속도를 조절해 상대가 다치지는 않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바닥에 나자빠지는 것까지 막아줄 여유는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사람이 비명과 욕을 동시에 내질렀다.
“으악! 너 이 새끼 뭐야!”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선우현이 20m짜리 철탑을 순식간에 뛰어 올라갔다. 탑은 20m지만 다리는 15m 높이에 있었다.
오늘은 체험형 예술 작품인 전망 철탑이 설치된 첫날이다. 그래서 출렁다리 위에는 구경하러 온 이십여 명이나 됐다. 일부는 선우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려 했다.
김수선이 보고했다.
-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면 그쪽 탑의 붕괴가 더 빨라질 겁니다.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15m 높이에서 사람들에게 뛰어내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한다고 뛰어내릴 리도 없지만,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
그렇다고 천천히 사람들을 구출할 수도 없다. 그때까지 탑이 버티지 못한다.
선우현이 왼쪽 탑에서 출렁다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반대쪽 탑으로 가!”
앞에서 그쪽으로 걸어오던 젊은 남자 김인혁은 선우현이 탑을 오르려던 사람을 밀어버린 걸 봤다. 그래서 그는 선우현을 좋게 보지 않았다.
김인혁도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뭔데 가라 마라야!”
“이 다리는 곧 무….”
김수선이 재빨리 경고했다.
- 선장님! 잠깐만요! 다리가 무너진다는 건 알리면 안 됩니다!
“왜!”
- 지금 그 다리에 있는 사람들이 겁먹고 동시에 뛰면 탑이 더 빨리 무너집니다! 그러면 아무도 탈출할 수 없습니다!
선우현이 말을 얼른 바꾸었다.
“당장 꺼져! 이 다리는 이제 내 거야!”
선우현은 다리 끝에 서서 두 팔을 옆으로 활짝 펴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바로 두 개의 탑의 주인이다! 으아아아!”
다리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반대편으로 내려갔다.
“미친 사람인가 봐.”
“옮는 거 아니지?”
“괜히 엮이면 피곤해질 거야. 가자.”
모두 반대편으로 이동한 건 아니다. 처음에 다가오다가 소리를 질렀던 김인혁이 남았다.
김인혁의 일행인 여자가 팔을 당겼다.
“그냥 가자. 똥이 무서워서 피해? 더러워서 피하지.”
“아니. 기다려봐. 똥을 봤으면 치워야지. 내가 스포츠맨으로서 이런 걸 그냥 볼 수는….”
김수선이 경고했다.
- 사람들의 이동으로 그쪽 탑의 상태가 더 나빠졌습니다!
“반대편으로 보냈잖아!”
- 그러니까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겁니다! 선장님이 계신 쪽으로 갔으면 벌써 무너졌습니다! 이제 곧 무너집니다!
“젠장!”
선우현이 탑을 벗어나 철제 출렁다리로 올라갔다. 그는 출렁다리에 충격을 덜 주려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는 걸 보고 김인혁이 두 주먹을 들었다.
“덤비는 거냐? 미리 경고하는데 나 운동하는 사람…. 어? 계속 오는 거야?”
거리가 가까워졌다. 김인혁이 견제를 위해 선우현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가벼운 잽이지만 주먹의 속도는 빨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턱을 얻어맞을 각도였다.
선우현은 지구연합에서 선발대인 지원위성의 선장으로 선정된 사람이다.
치명적인 공격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그에게 김인혁의 잽은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상대의 주먹을 슬쩍 피하며 전진해 순식간에 김인혁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김인혁이 운동선수이긴 하지만 종목은 권투가 아니다. 그는 반대쪽 주먹을 미처 내지르지 못했다.
선우현이 상대의 멱살을 콱 잡고 앞으로 이동했다.
바로 뒤에는 김인혁의 친구가 있었다. 선우현이 그녀의 멱살도 손으로 잡고 반대편 탑으로 걸어갔다.
“꺄악!”
김인혁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순식간에 멱살을 제압당하는 바람에 당황했는데, 곧바로 친구의 비명이 들렸다.
김인혁이 선우현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 새끼야! 놔라!”
갑자기 출렁다리가 크게 흔들렸다. 그래도 상관없이 선우현의 손을 멱살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기계 팔을 잡은 기분이었다.
‘무슨 힘이 이렇게….’
“어?”
김인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선우현의 뒤쪽 철탑 중간이 서서히 꺾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 어? 저, 저거! 으아아아! 무, 무….”
“무너지는 거 아니까 좀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