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패키지 디자인
나사를 구입한 업체들은 신형 나사가 꼭 필요했던 건 아니다. JHC 테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샀을 뿐이다.
대량으로 산 것도 아니다. 처음에 공급한 물량은 적었다. 추가 구매는 써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러 현장에 자재가 풀리면서 품질 이야기가 조금씩 나왔다.
“요즘 좋은 나사 나왔다며?”
“좋더라고.”
“비싸?”
“아니. 가격은 비슷해.”
“그러면 우리도 좀 써볼까? 어디서 팔아?”
“우리는 회사에서 직접 납품받았다는데? 아는 자재상에 물건이 없으면 공장에 전화해봐.”
일단 써본 현장에는 싸고 좋은 나사가 들어왔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작업하기 더 편하다는 말도 많았다.
기존 나사를 쓴다고 해서 며칠 만에 제품이 망가지지는 않는다. 내구성 문제를 체감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런데도 소문을 듣고 주문하는 곳이 조금씩 늘어났다.
***
채연서가 선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활력 토마토 포장 패키지 샘플이 나왔는데 보실래요?
“아. 벌써 나왔습니까?”
- 필이 팍팍 와서 만들었죠.
“음. 그러면 케이크가 맛있는 카페에서….”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저도 보고 싶습니다.
채연서도 망설였다.
- 아직 미공개 디자인인데 사람이 많은 카페는 좀….
샘플을 실내 카페에서 보면, 지원위성에 있는 김수선은 볼 수 없다. 옥상에 테이블이 있는 카페로 가면 되긴 하지만, 그러면 채연서의 말처럼 패키지 디자인을 남들이 보게 된다.
“연구소로 갈까….”
JHC 테크 연구소에는 옥상 정원이 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거기까지 가기는 귀찮았다. 게다가 거기도 연구소 직원 같은 외부인은 있다.
선우현이 주변을 쓱 보았다. 이 옥상은 그가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한다.
“여기로 오면 토마토 주스 한 잔 줄게요. 내가 사는 곳인데….”
- 갈게요! 지금 갈게요!
***
채연서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와. 선우현 씨는 언덕 꼭대기에 사는구나. 그러니까 5층…. 응?”
그녀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층을 다시 셌다. 4층까지밖에 없었다.
“으응?”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계단을 올라갔다.
“가끔 4층은 재수 없다고 5층이라고 표시하는 곳도 있잖아. 옛날 건물이니까 여기도 그런….”
4층은 정상적으로 4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그녀가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마저 올라간 후에 문을 두드렸다.
선우현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옥상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5층이라는 게 옥상 이야기였어요?”
“4층 위에 있으니까 5층이죠.”
그녀가 문을 통해 옥상에 들어갔다. 탁 트인 전망이 보였다.
“와. 여기 전망 진짜 좋….”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옥상 한쪽으로 뛰어갔다.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린 화분이 여러 개 있었다.
“어머나. 이 귀하고 맛있는 게 이렇게 많아! 세상에!”
선우현은 그녀가 보고 있는 화분에서 토마토 하나를 따서 믹서기로 갈았다. 설탕을 추가하지 않고 물도 넣지 않았다.
선우현이 유리잔을 탁자에 올려놓고 토마토 주스를 따라 넣었다.
“어머! 그 귀한 걸 딱 봐도 천냥샵에서 샀을 것 같은 유리컵에…. 제가 다음에 올 때 유리잔 좀 가져올게요. 저한테 좋은 거 있어요.”
“그러던가요.”
채연서가 손을 살짝 쥐었다.
‘아싸. 여기 또 올 핑계를 만들었다.’
선우현이 유리컵을 내밀었다.
“마셔요.”
“네에!”
채연서가 옥상에 선 채로 토마토 주스를 마셨다. 아무것도 섞지 않고 갈았을 뿐인데 속이 다 시원해지는 청량한 맛이 느껴졌다. 옥상에 부는 바람이 숲에서 느끼는 것처럼 시원했다.
“와. 진짜 맛있어요.”
그녀가 주스를 마시며 화분을 힐끗거렸다.
“그런데요. 왜 여기서 활력 토마토를 키우는 거예요? 그것도 저런 화분에?”
선우현이 옥탑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이 저기니까, 여기서 키워야 편하죠.”
채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게 농막이나 창고 대신인가요?”
“집이 저기라니까요?”
“네? 저건 옥탑방인데요?”
“옥탑방 무시하시네.”
“아니, 저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짜 저기서 사신다고요? 왜요?”
선우현이 옥상을 가리켰다.
“여기가 옥상이 넓고 전망도 좋으니까요. 이 옥상 전체를 내가 혼자 씁니다.”
채연서가 옥상 바깥쪽을 보았다. 앞쪽은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전망이 좋긴 좋네요.”
채연서가 화분 여러 개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토마토들을 보았다.
채연서는 일주일에 토마토 한 개씩 살 수 있는 구매권을 가지고 있다.
‘저 토마토 하나가 백만 원이라고 들었는데?’
채연서는 담당 디자이너 특별 할인가로 저렴하게 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백만 원을 내야 한다.
‘JHC 테크는 유통 비용을 거의 안 받는다고 들었어.’
활력 토마토는 먹으면 몸에 좋다는 느낌이 바로 오는 과일이다. 그래서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생산량이 적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가 컸다.
그런데 활력 토마토의 가격은 깎아주는 경우는 있어도 더 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면 웃돈을 주고 살 수도 없다.
덕분에 판매를 책임지는 최종훈의 재계 인맥이 조금씩 넓어지고, 그만큼 영향력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선우현과 최종훈은 처음부터 그런 현상을 예상하고 가격을 동결했다.
채연서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거 하나만 팔아도 백만 원이 그대로 떨어지는데.’
채연서가 토마토를 보며 계산했다.
‘지금 옥상 화분에 매달려 있는 토마토만 다 팔아도 돈이 얼마야? 한 달에 하나만 팔아도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고, 두세 개를 팔면 한강 전망 아파트나 오피스텔 월세를 내겠는데?’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옥탑방에 사는데?’
선우현은 전망 좋고 넓은 이 옥상이 좋았다. 탐사대 지원위성의 주거공간에 비하면 여기는 무척 넓고 쾌적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계속 살았다.
채연서는 박서윤과 술을 마실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 선우현 씨는 가끔 이런저런 알바를 해요. 활력 토마토를 만든 분이 왜 알바를 하는지는 몰라요. 저는요. 선우현 씨가 뭘 하든, 그리고 뭘 해내든 그냥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토마토 주스를 마셨다. 맛있었다.
‘에잇! 모르겠다. 예술 하는 사람이 취향 특이한 거 한두 번 보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자.’
그녀가 머리를 한 번 흔든 후에,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건 활력 토마토를 한 개씩 담는 상자예요.”
김수선이 말했다.
- 잘 나왔네요.
상자는 고급스러웠다.
채연서가 자랑했다.
“비단 스카프나 지갑, 아니면 반지나 목걸이가 들어 있어도 잘 어울리겠죠?”
“향수가 들어가도 어울리겠네요.”
선우현이 그려준 스케치는 향수가 들어있는 보급품 상자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
채연서가 물개 박수를 쳤다.
“어머. 진짜 향수가 제일 어울리겠다. 역시 선우현 씨는 감각이 다르다니까.”
김수선이 상자 디자인을 평가했다.
- 크리스털 핑거의 스타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좀 있네요.
채연서는 선우현의 디자인을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그걸 베이스로 채연서 스타일을 적당히 추가했다.
선우현이 상자를 손으로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좋네요.”
그가 상자를 열었다. 뚜껑이 부드럽게 열렸다.
내부에는 토마토를 감싸는 포장지가 들어 있었다. 그 포장지에도 상자 표면에 있는 것과 같은 문양이 보였다.
채연서가 설명했다.
“토마토를 실크로 감싸볼까 했는데, 그건 좀 오버더라고요. 너무 하드한 소재를 쓰기도 그렇고요. 그래서 이 종이로 선택했어요. 이건 전통 한지로 만든 건데요, 자연스러운 형태로 구겨지면서 토마토를 보호해요.”
채연서는 작은 쇼핑백도 꺼냈다.
“이건 상자를 한 개만 넣는 소형 쇼핑백이에요.”
그 쇼핑백에도 같은 문양이 인쇄되어 있었다.
“손님은 보통 한 개씩 살 테니까 작은 크기로 만들었어요. 물론 두 개나 세 개 전용 쇼핑백도 따로 있고요.”
채연서가 태블릿PC로 사진을 하나 띄웠다.
“이건 택배나 퀵서비스로 배달할 때 쓰는 전용 상자예요. 이 안에 개별 상자를 다시 넣는 거죠.”
그런데 그 상자는 디자인이 달랐다.
“이 배달 상자에는 활력 토마토 문양은 넣지 않았어요. 배달 과정에서 문양이 오염될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뺐죠. 대신에 깔끔해 보이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기 이 내부 구조는 충격흡수 설계예요.”
“배달용 상자까지 전용으로 만들 줄은 몰랐는데.”
채연서가 씩 웃으며 자랑했다.
“당연히 다 새로 만들어야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럭셔리하게 디자인했답니다.”
“럭셔리하긴 합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내가 괜히 건드리면 잘 나온 디자인을 망칠 겁니다.”
“어머. 무슨 그런 겸손한 말씀을.”
“지금 이 상태가 딱 마음에 듭니다.”
“그럼 이대로 양산해요?”
“그렇게 해요.”
채연서가 상자와 쇼핑백을 챙긴 후에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요. 다른 디자인 작업에도 참여할 수 있어요?”
“채연서 씨 일을 왜 나한테 물어봅니까?”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선우현 씨의 그 디자인 능력으로, 본격적으로 이쪽 일을 할 생각이 있냐고요.”
선우현이 눈을 껌뻑였다.
“내가요?”
“네. 아니면 아예 본인 이름 걸고 디자이너로 활동할 건가요? 그럴 거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제가 업계에 인맥이 좀 있거든요.”
선우현이 딱 잘라 거절했다.
“디자인 쪽은 안 할 겁니다.”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어차피 할 줄 모르시잖아요.
“모르는 건 아니지. 내가 낙서는 좀 하잖아.”
-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다양한 민간 기업에서 보낸 보급품과 상자가….
대부분의 보급품은 상자까지 알뜰하게 수리용 자재로 사용해 실물이 없다.
- 사진으로는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디자인을 팔아보시죠.
“내가 낙서는 좀 하는데, 지구연합에서 유행한 디자인이 지금 시대에 통할지는 알 수 없어. 이번에는 연서 씨의 스케치가 마침 크리스털 핑거의 히트작 디자인과 비슷해서 참견한 것뿐이니까.”
- 아! 우주왕복선이 조금 더 멀어졌습니다. 언제 여기까지 올까요?
***
며칠 뒤에 최종훈이 활력 토마토 세 개를 가지고 박길성 회장을 만났다.
평소에는 활력 토마토를 JHC 테크에서 길성으로 퀵으로 보낸다. 그 일은 비서 김찬혁이 전담한다.
가끔 수확량 문제로 한 번에 세 개나 보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박서윤이 선우현을 직접 만나 받아갔다.
그런데 오늘은 최종훈이 박길성을 찾아왔다. 자랑할 게 있어서였다.
최종훈이 작은 상자 세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박길성이 물었다.
“그게 뭐지?”
“채연서 디자이너 아시죠? 그 사람에게 의뢰해서 이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역시 그 사람이 실력은 확실하군. 그럼 거기에 명품이 들어 있는 건가?”
“명품 중의 명품이죠.”
최종훈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활력 토마토가 들어 있었다.
박길성이 그걸 보고 웃었다.
“하하하. 진짜 명품 중의 명품이구나.”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채연서가 과일 상자 디자인을 맡은 적이 있나?”
“전에는 없었죠.”
“그럼 이번에는 왜?”
“활력 토마토의 맛을 보여줬거든요. 선우현 씨가 구해주기도 했고요. 거기다 토마토 구매권까지 걸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개.”
“그 정도면 토마토 상자만이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까지 다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그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
최종훈이 선우현을 찾아와 토마토 판매 상황을 설명했다.
“진짜 잘 팔립니다. 일단 한 번 먹어본 사람은 다들 환장합니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활력 효과가 낮을 텐데요?”
이 건물에 사는 신나리가 그런 경우다. 그녀는 토마토를 곧잘 얻어먹지만, 활력 효과는 딱히 느끼지 못했다. 나이도 젊은 데다가 원래 활력이 넘쳐서 사는 사람이어서다.
최종훈이 설명했다.
“활력 토마토를 사는 사람은 제 인맥으로 연결되는 기업체 사장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보통 체력이 떨어졌을 나이죠.”
처음에는 최종훈의 인맥을 통해 토마토를 팔았다. 지금은 그 인맥의 인맥으로 판매망이 넓어졌다.
“그런 분에게는 활력 효과가 직빵입니다. 다들 이십 년은 젊어진 것 같다더군요.”
활력 토마토의 효과는 딱 하루만 유지된다.
“그래서 다들 더 팔아달라고 난리입니다.”
선우현이 물었다.
“토마토는 잘 팔리는데, 나사 기술 판매는 어떻게 됐습니까?”
“어…. 아! 뚝섬 한강공원에 예술가가 설계한 전망대용 철탑이 완성돼서 바로 오늘 공개됐습니다. 그 탑에 우리 신형 나사가 사용됐습니다.”
“그래요? 구경하러 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