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나사
최종훈은 JHC 테크 지분의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다. 회사 설립과 초기 성장의 기반이 된 기술도 최종훈이 개발했다. 그래서 JHC 테크 내에서 최종훈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김충식 본부장과 이백현 연구소장은 차기 사장 자리를 노리고 경쟁한 이력이 있다.
김충식이 본부장실에서 말했다.
“사장님은 그 일을 기억하실 거야.”
그의 파벌인 이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사장님이 아파서 출근도 제대로 못 하실 때였잖습니까? 은퇴하실 줄 알고 본부장님이 회사를 위해서 그러신 건데….”
“내가 사장님을 잘 알잖아? 그래도 기억하실 거야.”
최종훈이 건강을 되찾으면서 두 사람의 경쟁도 무의미한 일이 됐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장 자리를 노리고 경쟁했던 과거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윤 이사. 내가 사장님을 밀어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눈치는 봐야겠지?”
“그러실 것까지야….”
“내가 안 봐도 이백현 쪽에서는 볼걸?”
“그럼 본부장님도 보시는 거로….”
“그런데 말이야. 나사 제작 기술 판매에 영업이 신경을 안 쓰네?”
“본부장님. 그 프로젝트는 초반에는 영업 실무자 한두 명, 연구소 실무자 한두 명이 처리하면 됩니다. 돈이 별로 안 되는 기술이니까요.”
“사장님이 돈이 별로 안 되는 그 프로젝트에 진심이신데?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윤 이사가 즉시 말을 바꾸었다.
“당연히 저희도 진심으로 달려들어야죠.”
김충식이 보고서를 가리켰다.
“그런데 왜 우리 영업부서는 진심이 아니지? 나만 사장님 눈치 봐야 해? 이러다 내가 이백현한테 밀리면 윤 이사는 괜찮겠어?”
“당장 담당 영업팀에 지원을 몰아주겠습니다.”
***
이백현 연구소장도 김충식 본부장과 똑같은 이유로 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대처 방법도 같았다.
나사나 소형 기계 부속을 제조해 판매하는 동서남기공에 JHC 테크의 연구원들이 단체로 찾아왔다. 그들은 사장과 공장 직원들을 만나 생산 장비 개조 방법을 의논했다.
개조는 어렵지 않았다. 동서남기공의 기존 공정을 일부 수정하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동서남기공의 박 사장이 생산 장비 개조 계획서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나사를 만든 후에 강화 처리하는 이 부분 말입니다. 공정이 추가되잖습니까? 이 파트의 장비를 언제 새로 만들어서 언제 설치하라는 겁니까? 그때까지 우리 공장을 세워둘 수가….”
연구소 팀장이 자랑했다.
“그건 저희가 이미 만들어놨습니다.”
“예?”
“저희는 다양한 테스트 장비를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금방입니다. 다 만들어놨으니까 가져와서 설치만 하면 됩니다.”
“어…. 예. 장비를 제작해서 주신다고 듣긴 했는데, 벌써….”
팀장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음음. 드리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죠.”
“아. 예. 그렇게라도 해주시면 저희야 좋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박 사장이 제작 공정의 다른 부분을 짚었다.
“나사의 원재료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든 합금인데….”
“그 정도는 여기서 만들 수 있잖습니까?”
JHC 테크는 나사 제작 기술을 판매할 때 작은 공업사는 처음부터 제외했다. 그 기술을 제대로 쓰려면 나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 능력이 있어야 했다.
동서남기공에는 알루미늄 합금 등을 만드는 장비가 있다.
“있긴 있는데, 그건 안 쓴 지 오래됐습니다. 요즘은 자재를 사다 쓰니까요.”
“그 장비도 저희가 개조해드리죠.”
어디를 어떻게 개조해야 하는지도 이미 파악해 두었다.
선우현은 연구소에 있는 장비를 사용해 그 나사의 샘플을 만들었다. 연구소에서는 선우현이 나중에 보내준 문서를 보면서 그 장비로 제작 기술을 재현하고 연구했다.
선우현은 원래 있던 범용 장비를 이용해서 나사를 만들었지만, 전용 장비를 제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탐사대 현장 지원 기술이 적용된 장비라서 구조가 단순했고 개조 작업도 간단했다.
박 사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사 기술 라이센스 비용은 충분한 수량이 판매된 후에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장비 대여 비용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이야기되지 않았다. 장비를 개조해버리면 반납하기도 어렵다.
“다 좋은데, 이렇게 장비들을 빌려 쓰면 대여료가….”
“나중에 수익이 나면 그때 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장비 대여료도 후불입니까?”
“물론입니다. 많이만 파십시오.”
박 사장이 활짝 웃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
개조 작업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동서남기공의 박 사장은 개조 작업이 완료된 생산 시설을 보며 감탄했다.
“진짜 빠르네.”
공장장이 옆에서 말했다.
“아예 미리 다 만들어뒀나 봅니다. 가져와서 조립만 뚝딱뚝딱하던데요? 테스트 생산까지 포함해서 딱 일주일 걸렸습니다.”
“이번에 들었는데, 일정을 줄이고 싶으면 예산을 퍼부으면 된다더라.”
“JHC 테크니까 가능한 말이네요.”
“괜히 유명한 회사가 아니었어.”
전화가 걸려왔다. 거래처의 이사였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아. 곽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예? 어디요? 그 현장에서 저희 나사를 쓰겠다고요?”
공장장이 옆에서 무슨 통화인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다.
박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유. 문제가 되기는요.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 납품해야지요. 예. 예? 그 나사요? 아니, 그건 아직 생산도 안 한 건데 어떻게 아시고….”
박 사장이 좀 더 통화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이네.”
공장장이 옆에서 물었다.
“나사라니요?”
박 사장이 개조 작업이 완료된 생산 설비를 가리켰다.
“우리 새 장비로 만드는 새 나사. 자기네가 좀 사겠단다.”
“네? 아직 생산하지도 않은 걸 어떻게 알고요?”
“JHC 테크가 우리 대신에 영업했나 봐.”
“예?”
“초반에는 영업을 대신 해주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것도 이 새 기술을 적용한 나사를 여기서 생산하겠다고 동의한 이유 중 하나였다.
“벌써 하나 뚫었나 보다.”
“사장님. 곽 이사의 연락이라면서요. 거기는 이미 우리 거래처 아닙니까?”
“주문 끊긴 지 일 년은 됐잖아.”
동서남기공은 요즘 납품처가 많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납품처 중 하나가 다시 연락했다.
“JHC에서 그걸 다시 연결해주네?”
“얼마나 오더가 들어왔습니까?”
“많은 양은 아니야. 그래도 다시 거래가 재개됐다는 게 중요….”
전화가 또 걸려왔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박 사장은 영업을 직접 뛰기 때문에 모르는 번호라도 일단 받아야 한다.
“여보세요? 네? 어? 네? 아니, 제 번호는 어떻게…. 아아. JHC 테크요. 당연히 알지요. 예. 저희가 JHC와 같이 일하는 거 맞습니다.”
통화가 조금 길어졌다. 박 사장이 물었다.
“어…. 말씀하신 볼트와 너트의 사이즈가 좀 큰데 어디 쓰시려고요? 아. 한강 공원에 전망대용 철탑을 만드신다고요? 잠시만요. 제가 생산 일정을 확인해보고 5분 뒤에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 사장이 전화를 끊었다.
“우리 새 장비로 제작 가능한 나사 스펙 자료 가져와. 빨리.”
공장장이 얼른 근처에 있던 책자를 가져와 펼쳤다.
“여기 있습니다.”
박 사장이 스펙 자료를 확인했다. 공장장이 옆에서 물었다.
“사장님. 전망대용 탑은 또 무슨 말입니까?”
“한강 공원에 예술가가 디자인한 작품을 철탑 형태로 만든대. 그런데 그게 사람이 올라가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네?”
“그러니까 우리 나사를 대형 예술작품 제작에 쓴다는 거네요? 그것도 한강 공원처럼 사람 많은 곳에 설치하는 작품에요.”
“그렇지. 그래서 그런지 나사 사이즈가 좀 커. 어디 보자. 이거, 이거, 이거. 다 되네. 좋았어.”
박 사장이 방금 통화한 번호로 전화를 다시 걸어 큰소리쳤다.
“생산 일정을 확인해봤는데, 충분히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바로 쓰셔야 한다니까 당연히 다른 일정 미뤄두고 최우선으로 만들어드려야죠. 우리 장비가 최신형이라 금방 만들 수 있습니다. 하하하.”
***
이백현 연구소장이 임원회의에서 자랑했다.
“우리 연구소 직원들이 동서남기공의 나사 생산 장비를 순식간에 업그레이드했습니다. 겨우 일주일 만에 생산 테스트까지 다 마쳤단 말이죠. 이건 진짜 우리 우수한 연구원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종훈이 물었다.
“그거 말이야. 개발자가 나사 만들 때 쓴 방법을 그대로, 그리고 보내준 문서 그대로 제작한 거지?”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현장에 적용하는 게 어디 쉽습니까? 원래 장비라는 게 실험실에서 만들어볼 땐 잘 되는 것도 현장에 적용하면 온갖 문제가 나오는 법입니다.”
“구조도 무척 단순하다며?”
“단순하긴 했습니다만.”
“현장에 적용할 때 트러블은 얼마나 있었어?”
“그게요. 없었는데요.”
“와…. 역시 대단하군.”
“예. 우리 연구소가 정말 대단하긴 합니다.”
“개발한 사람이 대단하다고. 처음부터 양산까지 한 방에 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거잖아.”
“그야 그렇죠. 사실 대단하긴 했습니다.”
이백현은 자랑하려다가 본전만 겨우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김충식 본부장이 실실 웃으며 자랑했다.
“사장님. 제가 다섯 개 회사에 영업해서 동서남기공에서 생산한 신형 나사를 납품받도록 했습니다. 하하하.”
최종훈이 물었다.
“얼마나?”
“예?”
“나사 납품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고.”
“아니, 뭐. 일단은 소량이지만…. 그래도 다섯 군데라니까요?”
“우리가 라이센스 비용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수량은 넘긴 거야?”
“그건 아직 아닙니다만….”
최종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구나. 진짜 조금 팔았구나.”
***
최종훈이 선우현의 옥탑방을 찾아갔다. 그가 옥상에서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자랑했다.
“선우현 씨가 개발한 나사 제작 기술 말입니다. 제조 업체의 생산 장비를 그 기술에 맞춰 완벽하게 개조했습니다.”
“벌써요?”
“대단하지요? 제가 힘 좀 썼습니다. 하하하.”
“그럼 이제 팔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것도 다 해결했습니다.”
최종훈이 손바닥을 쫙 폈다.
“우리 회사가 대신 영업을 뛰어서 그 공장에서 생산한 나사를 무려 다섯 개 업체에 팔았습니다.”
“와. 나사가 진짜 많이 팔렸겠네요.”
김수선도 한마디 했다.
- 지구연합의 탐사대 현장 지원 기술로 만든 나사니까 당연히 많이 팔렸겠지요.
최종훈은 멈칫했다.
“마, 많이요?”
“우리는 나사 판매 금액의 일정 비율을 기술 라이센스 비용으로 받잖습니까? 나사가 많이 팔려야 우리도 좋은데…. 어? 혹시 안 팔립니까?”
“팔립니다! 다만 처음에는 시장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소량만 다섯 곳에 납품하게 했습니다. 곧 잔뜩 팔릴 겁니다. 하, 하하.”
***
새로운 기술로 만든 나사가 업체에 공급됐다.
JHC 테크가 대신 영업해준 매입처는 다섯 곳이었다. 네 곳은 원하는 나사가 비슷했다.
다른 한 곳은 대형 구조물 제작용 볼트와 너트를 주문했다.
동서남기공 박 사장이 걱정했다.
“그런데 우리 나사가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지? 신기술이 적용된 장비로는 처음 만들어 파는 거라서 걱정이 되네.”
공장장이 장담했다.
“제가 돌려보고 긁어보고 작은놈을 골라서 전동드라이버로 일부러 나사 대가리를 뭉개보기도 했는데요. 품질이 굉장히 좋던데요?”
“나도 해봤는데 좋긴 하지?”
“특수처리된 나사 수준이더라고요. 그런 나사를 그 단가에 만드는 게 말이 안 될 정도죠.”
“JHC 테크는 기술력으로 알아주는 회사잖아. 역시 나사 하나를 개발해도 다르네, 달라.”
***
납품받은 회사들은 다양한 곳에 나사를 사용했다. 가격이 특별히 비싼 것도 아니라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현장에서 고참 기술자가 신참에게 잔소리했다.
“야. 너 또 장비를 그따위로 쓰냐? 그러면 나사 머리가 빠가가… 안 났네?”
“제 실력이 이제 좀 늘었죠?”
“아니야. 넌 안 늘었어. 너 어제하고 똑같이 엉망으로 했어.”
작업을 한참 더 한 후에 고참 기술자가 말했다.
“이 나사 꽤 좋은데?”
“어디가 좋은데요?”
“나사 머리가 전혀 안 뭉개져.”
“과장님이 작업했는데도 뭉개지면 나사가 불량인 거 아니에요?”
“비싼 건 원래 잘 버티지만 싼 건 내가 해도 실수하면 나가. 오늘 손이 몇 번 삐끗했는데 나사 머리가 전부 너무 멀쩡해.”
“그럼 비싼 나사라서 그런 거겠죠.”
“이거 안 비싸. 신제품이긴 한데 일반 나사와 가격이 비슷하다고 들었어.”
고참 기술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품질이 좋지? 얼마 하지도 않는 나사를 이렇게 만들면 남는 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