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장명현 피디에게 지나가던 직원이 말을 걸었다.
“장 피디님. 이번에 섬에서 찍은 방송이요. 반응 엄청 좋던데요?”
장명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약 조직이 쳐들어왔는데도 내가 목숨 걸고 찍은 거야. 당연히 반응이 좋아야지.”
“그 프로그램 이제 살아날 거 같아요.”
“야. 우리 방송 원래 안 죽었었거든? 내가 살리고 있었거든?”
“하하. 알죠. 어디 가세요?”
“국장님이 좀 보자고 하시네? 고기라도 사주려고 그러시나? 으흐흐흐.”
국장이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야. 김승빈이 사고 친 그 장면, 꼭 내보냈어야 했냐? 그거 빼자고 했잖아.”
장명현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놈 때문에 채연서 씨가 마약조직원의 칼을 맞을 뻔했습니다.”
“그거야…. 김승빈도 무서우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랬겠지. 무서우니까.”
“왜 국장님께서 그놈을 편들어주시는 느낌이 납니까?”
“편든 게 아니라, 시끄러워졌으니까 그러지.”
“김승빈이 항의라도 했습니까?”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배우가 항의하든 말든 상관없는데.”
국장이 인상을 구겼다.
“걔가 재성퍼시픽 사장 아들이잖아.”
“알죠.”
“네 프로그램의 중요 협찬사는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재성퍼시픽의 거래처인 건 아냐?”
“알긴 알죠. 김승빈은 그 빽으로 게스트로 나온 건데….”
“협찬 빠지겠단다.”
장명현이 욕을 했다.
“와. 그 새끼. 진짜 치사하게 나오네요. 뺄 테면 빼라고 하시죠. 중요 협찬사는 아직 하나 남았….”
그의 방송은 원래 시청률이 낮았다.
“어? 국장님. 설마 협찬사가 다 빠지고 방송 접는 건 아니죠?”
“그러게 그 영상 빼라고 했더니….”
***
길성 기업 회장 박길성에게 박서윤이 차를 가져왔다. 박길성은 박서윤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그러다 방송 이야기가 나왔다. 박서윤이 말했다.
“촬영 현장에서 마약 조직을 물리쳤다는 사람, 선우현 씨일 겁니다.”
“우리나라에 그 정도 무술 고수가 선우현 한 명뿐인 건 아닐 텐데? 그냥 지레짐작한 건가?”
“아닙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채연서 디자이너가 우리 비서실을 통해 그날 그 방송 촬영 참관 허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협찬사니까 도와줄 수 있었겠군.”
“최근에 JHC 테크 최종훈 사장이 채연서와의 미팅을 주선해줄 수 있냐고 문의했습니다.”
“그건 최 사장에게 들었다.”
“JHC는 사업 특성상 채연서 같은 명품 전문 디자이너에게 의뢰할 일이 딱히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활력 토마토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채연서는 농산물 관련 디자인은 한 적이 없습니다. 전문 분야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JHC의 의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JHC 측에서 고맙다며 비서실 직원 단체 식사권을 보내왔습니다.”
“그럼 채연서가 전문 분야가 아닌데도 디자인을 맡은 이유가….”
“선우현이 촬영 현장에서 구해줬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경우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박길성이 박서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분석 능력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았겠지?”
“예?”
“아니다. 계속 이야기해라.”
“그 방송의 핵심 협찬사는 우리 회사와 오마오션스입니다. 오마오션스는 재성퍼시픽의 중요 거래처인데, 재성퍼시픽의 사장은 채연서를 위험에 빠뜨린 김승빈의 아버지입니다. 오마오션스가 협찬을 중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산 부족으로 그 방송이 없어질 수도 있겠구나.”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서 협찬을 늘려서라도 계속 제작되게 해야 합니다.”
“응?”
“그 방송은 이번 일을 계기로 시청률이 올라갈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회사가 먼저, 단독 중요 협찬사가 되겠다고 제안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면 더 고마워하는 법입니다. 지금 도와주면 앞으로 쭉 특별대우 수준의 홍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신나서 설명하던 박서윤이 정신을 차리고 사과했다.
“말하다 보니 제가 다른 부서의 업무 범위까지 이야기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잘했어. 비서실이 하는 게 그런 일이지. 말 나온 김에 홍보팀하고 같이 회의 좀 하자. 난 한쪽에서 보기만 할 테니까 박서윤 대리가 회의 주도해봐.”
***
방송국 예능국장이 말했다.
“네 방송은 안 없어질 거야. 길성에서 연락이 와서 오마오션스가 빠진 것만큼 채워주겠대.”
장명현 피디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길성에서요?”
“어. 아예 자기네가 메인 협찬사가 되겠다네?”
“으하하하. 다행입니다. 아. 제가 길성에 전화라도 해야겠지요?”
“안 하려고 했냐?”
***
장명현은 아예 길성을 찾아갔다. 그는 길성 본사 홍보팀을 만나서 인사하고, 앞으로의 협찬 계획도 협의했다.
그러고 나서 비서실도 찾아갔다. 추가 협찬을 제안한 곳이 비서실이라고 들어서였다.
장명현은 그곳에서 박서윤을 보고 멈칫했다.
“어?”
“왜 그러시죠?”
“아.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비주얼이어서 좀 놀랐습니다. 하하하. 연기 쪽으로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아는 기획사에 소개해주고 싶군요.”
갑자기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장명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박서윤이 말했다.
“회장님. 장명현 피디입니다. 피디님. 박길성 회장님이십니다.”
“헉!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장명현입니다!”
“안녕은 무슨. 그러니까 우리 박서윤 대리를 빼가겠다?”
“예?”
장명현 피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장이 빈정이 상하면 협찬이 취소될 수도 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예의상, 그러니까 예의상 한 말입니다. 하하하. 회사원한테 갑자기 배우를 하라니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박서윤 대리가 배우한테는 밀린다?”
“그, 그게 아니라….”
박길성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장명현에게 말했다.
“농담입니다. 내 방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박서윤 대리도 같이 가지.”
“예.”
박길성은 일주일에 이틀은 활력 토마토를 먹고 회사를 계열사까지 다 뒤집는다. 반면에 토마토가 없는 사흘은 가벼운 업무만 조금 보면서 쉬엄쉬엄 보낸다.
오늘은 토마토가 없는 날이다.
장명현는 회장실에서 조금 긴장하며 협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촬영장 이야기가 나왔다.
박서윤이 물었다.
“선우현 씨를 아시죠?”
장명현은 움찔했다.
“어? 그 이름은 소문 안 내기로 했는데 어디서….”
“정황을 보고 짐작했어요. 선우현 씨가 그날 그곳에 있었죠?”
“예. 스태프 알바를 했습니다. 하루짜리 땜빵 알바였습니다.”
“알바….”
박서윤은 전에도 선우현이 알바를 하는 모습을 봤다. 그때는 결혼식 파티 일일 알바였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선우현 씨는 원래 그런 분이죠.”
“네? 선우현 씨를 아십니까?”
“웅…. 네. 알아요.”
박길성도 한마디 했다.
“그럼 현장을 습격한 마약 조직 놈들을 잡은 건 역시 선우현 씨였군.”
“네? 회장님도 선우현 씨를 아십니까?”
“알지. 나한테는 중요한 거래 파트너니까.”
“네? 알바가 어떻게 길성의 파트너….”
“아. 이런. 내가 너무 많은 걸 알려줬군. 그런 게 있습니다. 박 피디. 방송 이야기나 계속합시다.”
***
김승빈이 술병을 집어 던졌다.
“제기랄! 길성이 왜 끼어들어!”
그는 집안 인맥을 동원해 장명현 피디를 괴롭히고 압박하려 했다. 그런데 그 계획은 길성이 협찬 규모를 늘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젠장. 피디는 방송국 소속이니까 어려운 거야. 하지만 채연서는 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
***
채연서가 저녁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음?”
채승아가 물었다.
“왜?”
“누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채승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
“아니야. 착각인가 봐.”
***
김승빈이 대포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약점이 나올 게 없을 거라니! 그걸 어떻게 벌써 알아!”
- 내가 이런 일을 많이 해봐서 아는데, 저런 여자는 좋은 사진이 쉽게 안 나와. 일단 남자가 없어 보여. 게다가 눈치도 빨라. 그러니까 남자랑 뒤엉켜서 음탕하게 노는 사진 같은 건 찍기 어렵다고.
“그 여자가 결벽증이 있는 소녀는 아닐 거 아냐!”
- 물론 시간을 길게 잡고 일하면 언젠가는 찍을 수 있겠지. 그런데 빨리 결과를 내라며?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찍어야지!”
- 내 말이 그 말이야. 배우를 더 섭외하면 그림을 만들 수 있거든? 예를 들면 원나잇으로 꼬신 후에 몰카를 찍는다든지, 아니면 아예 약을 먹이고 찍는다든지?
김승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거 좋은데?”
- 그러려면 사람이 더 필요한데, 활동비는 선금으로 줘야 해. 돈을 더 줘야겠어.
“선금을 더 줄 테니까 영상이나 잘 찍어. 대신에 영상이 없으면 잔금도 없다.”
김승빈이 전화를 끊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그년 때문에 경력을 다 날리게 생겼는데, 그년의 이미지도 같이 무너뜨리는 영상을 퍼트린다? 나 잘하면 복귀할 수도 있겠는데?”
김승빈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는 피디와 채연서, 그리고 선우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피디는 실패했지만 채연서는 이용할 방법을 찾았다.
“그 알바 새끼. 그 새끼도 밟아버려야지.”
김승빈이 전화를 걸었다. 장물아비가 전화를 받았다.
“기술자는 준비됐지?”
- 네가 말한 대로 감시와 침입 기술이 있는 놈으로 준비했다.
“그럼 시작해야지.”
***
최두식은 예전에 흥신소에서 일했다.
그는 그때 배운 기술로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을 찾아 감시하다가, 집이 비었을 때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방식으로 도둑질을 했다.
대포폰에서 의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일단 어디서 알바를 하는지 알아내.
“쉬운 일이군.”
선우현의 집 주소는 김승빈이 방송국 직원을 매수해 알아냈다. 그 직원은 촬영팀에서 폐기하려던 서류를 훔쳐본 후에 김승빈에게 알려주었다.
최두식이 그 주소로 찾아갔다.
“여기 옥탑방에 산단 말이지.”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 지금 그 건물을 감시하는 놈이 있습니다.
선우현은 옥상 평상에서 뒹굴다가 몸을 일으켰다.
“누구를 감시하는데?”
- 밑에서 옥상을 몇 번 올려다봤습니다. 그럼 누구겠습니까?
“나네.”
선우현이 1층으로 내려갔다.
최두식의 차는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선우현이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봐요.”
최두식은 선우현이 대놓고 찾아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다고 바로 도망치는 아마추어 짓은 하지 않았다.
최두식이 창문 유리를 내리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 주차하면 안 됩니다.”
“아, 예. 바로 차 빼겠습니다.”
최두식이 시동을 걸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들킨 줄 알았네.”
선우현이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며 말했다.
“수선아. 저놈 추적 중이지?”
- 물론입니다.
최두식은 감시 방법을 바꾸었다.
선우현이 있는 건물은 언덕 꼭대기에 있다. 근처에는 더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 옥상을 직접 감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망원경을 챙긴 후에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감시하면 선우현의 옥상 바닥은 볼 수 없어도 난간이나 옥탑방 창문은 살필 수 있다.
“여기 숨어서 보면 눈치 못 채겠지.”
그가 그 옥상 난간 사이에 망원경을 설치한 후에 선우현이 사는 건물을 감시했다.
***
김수선이 보고했다.
- 적이 300m 밖에서 망원경으로 옥상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저격이냐?”
- 평범한 망원경만 있습니다. 총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
최두식의 망원경에 선우현이 옥상 난간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멍청한 놈.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지도 모르….”
최두식의 표정이 굳었다. 망원경 너머로 선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선우현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최두식을 가리켰다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최두식은 기겁했다.
“으헉!”
그는 즉시 옥상 난간 아래에 바짝 엎드렸다.
“뭐, 뭐야? 내가 보인 거야?”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낌이 너무 안 좋아. 이번 의뢰는 때려치워야겠다.”
그는 옥상 바닥에 엎드린 채로 망원경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런 후에는 자세를 낮춰 옥상을 이동한 후에 건물 계단을 내려갔다.
“어차피 선금은 받았으니까, 그것만 그냥 떼먹….”
최두식은 화들짝 놀랐다. 방금 망원경으로 본 선우현이 1층 현관 바깥에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조금 전까지 거기 있던 사람이 여기에….”
“너 잡으러 왔지. 너 나 감시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