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퍼포먼스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은 그의 여동생 최민영이 그린 그림을 보며 물었다.
“꿈 그림이네? 요즘도 꿔?”
최민영은 어렸을 때 같은 꿈을 며칠씩 반복해서 꾸곤 했다.
그렇다고 매번 같은 꿈만 꾼 건 아니다. 짧으면 며칠, 길면 한 달 정도 같은 꿈만 꾸다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일단 평소 상태로 돌아오면 다시 같은 현상을 겪더라도 꿈은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활력 토마토 먹은 후부터 그런 건 아예 안 꿔. 컨디션이 좋아져서 그런가 봐.”
최종훈이 장담했다.
“토마토는 내가 앞으로도 계속 받아올 테니까, 넌 나만 믿어라.”
최민영이 전부터 걱정하던 걸 물었다.
“오빠. 토마토가 일 년 내내 자라진 않잖아?”
“어?”
“옥상 화분에서 키우는 거면, 추워지면 못 먹을 텐데?”
최종훈은 당황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어?”
***
배우 김승빈이 지금 지내는 곳은 본가도 아니고 독립해서 사는 집도 아니다. 그는 기자를 피해 평소에 비밀 아지트로 쓰던 오피스텔에서 지냈다.
“젠장. 내가 거기서 도망치는 모습을 굳이 방송에 내보낼 필요는 없잖아.”
김승빈은 경찰에서 그를 수배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형사들을 만나 조사를 받았다. 집안의 인맥을 동원해 비공개로 만나 조사받았기 때문에 기자들은 마주치지 않았다.
“경찰 쪽은 어떻게든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는 그날 채연서를 칼을 들고 뛰어오는 놈을 향해 밀쳤다. 그는 그건 합의를 하고 정상참작까지 받으면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안 다쳤으니까 됐잖아.”
그런데 그가 그녀를 밀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그 순간 그의 배우 경력은 끝났다. 그래서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그놈들 때문이야!”
김승빈은 언제나 남의 탓을 했다. 지금도 탓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피디와 채연서, 그리고 선우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런데 방송국 피디는 직접 복수하면 뒤탈이 너무 크다. 들키면 진짜로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
“피디 놈은 회사를 통해서 괴롭혀야지. 우리 집이랑 잘 아는 기업이 한두 곳인 줄 알아?”
채연서가 유명한 디자이너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년은 돈으로는 합의가 안 될 것 같지만.”
그래서 돈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약점을 잡아야지. 약점이 없으면 만들어내서라도 괴롭힐 테다. 그러면 합의도 공짜로 받아낼 수 있겠지.”
그가 마지막으로 선우현을 떠올렸다.
“그 알바 새끼. 그 새끼는 내가 확실히 박살 낸다. 좀 치는 놈들을 데려가서….”
그는 그날 도망치느라 바빠서 선우현이 마약조직원들을 어떻게 때려잡는지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선우현이 조직원 다섯 명을 때려잡았다는 건 안다. 뉴스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모를 수가 없다.
“서너 놈 데려가 봤자 거꾸로 당하겠는데?”
김승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가만. 그 새끼는 알바잖아. 싸움만 잘하지 돈도 없고 빽도 없어. 좋았어. 돈과 빽으로 알바 자리조차 못 얻게 하자. 그러면 기가 죽겠지. 그래놓고 밟자.”
계획이 떠올랐다. 옛날에도 해본 짓이었다.
하지만 선우현의 기를 죽였다 해도 혼자서 밟을 자신은 없었다.
김승빈이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더니 실실 웃었다.
- 흐흐. 너 드라마에 나왔을 때보다 더 유명해졌더라?
김승빈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아쉬운 게 있어서 참았다.
“너, 요즘도 장물아비 하냐?”
- 너는 잘나가서 배우가 됐지만, 나는 이게 밥벌이니까. 아니다. 넌 돈이 없어서 훔친 게 아니지. 재미로 한 거지. 이래서 금수저 새끼들은 재수가 없다니까.
“내 덕에 재미 많이 본 새끼가. 닥치고, 네 손님 중에 적당한 놈 좀 소개해줘.”
- 어떤 놈?
“내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몰라야 하니까 돈만 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든 하는 놈.”
- 손님 중에 그런 놈 많지. 그럼 나한테는 얼마가 떨어지나?
“소개비 백.”
- 금수저면서 너무 싼 거 아냐? 좀 더 쓰지?
“한 놈당 백. 기술 가진 놈으로 몇 놈 필요해.”
-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콜. 흐흐.
김승빈이 전화를 끊고 이죽거렸다.
“알바 새끼. 넌 이제 뒈졌어.”
***
최종훈은 동생과 헤어져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영업과 마케팅을 책임지는 김충식 본부장을 만났다.
“나사 제작 기술 라이센스 판매. 어떻게 됐어?”
“영업팀에서 두 곳과 접촉했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생산 설비 개조와 세팅까지 우리가 다 도와준다고 했어?”
“예. 그런데 두 회사 다 기존 생산 설비를 바꾸면서까지 거래할 생각은 없다고 합니다.”
최종훈은 초조했다.
“젠장. 빨리 성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는 토마토도 제철이 따로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대안이 필요했다. 대안을 부탁하려면, 먼저 선우현에게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업체는 더 작은 곳을 알아봐. 기왕이면 매출이 부진한 곳으로.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추가 조건을 걸자.”
“사장님. 천천히 알아보면 하겠다는 업체가 결국은 나올 겁니다. 지금 조건도 좋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그럴 필요가 생겼어.”
***
동서남기공은 크고 작은 볼트와 너트, 작은 금속 부품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그 회사에 JHC 테크의 영업팀장이 찾아왔다.
동서남기공의 박 사장이 기술 문서와 나사 샘플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JHC 테크에서 이 나사 제조 기술을 판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생산할 수 있는 라이센스만 파는 거지요. 당연히 동서남기공에 독점 공급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기존에 생산하던 게 있고 재고도 많은데, 굳이 라이센스 비용까지 내면서 이걸….”
영업팀장도 안다.
“일단 생산만 하시면, 초기 판매처는 저희가 알아봐 드리죠.”
“예?”
“저희가 거래하는 회사 몇 곳에 납품할 수 있게 중간에서 주선하겠습니다.”
박 사장이 자세를 바로 했다.
물건은 만든다고 다가 아니다. 팔 곳이 있어야 한다.
동서남기공은 요즘 창고에 재고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새 거래처를 알아보려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성과가 별로 없었다. 이러다 회사 문 닫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런데 중견기업 JHC 테크가 영업을 대신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박 사장이 머리를 굴렸다.
‘일단 새로 거래만 트면, 새 나사도 팔고 기존에 재고로 쌓여 있는 것도 처분할 수 있겠는데?’
당장 이 제안을 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받을 수는 없다. 여유 자금이 간당간당하다.
“라이센스비는 어떻게….”
“판매량에 비례해서 후불로 받겠습니다. 일정량 이상이 판매되지 않으면 안 받는 거로 하고요.”
사장이 생각했다.
‘괜찮은 조건인데? 많이 팔리면 나눠 먹으면 되고, 조금 팔리면 새 거래처만 챙겨도 되고.’
욕심이 났다. 사장이 서류를 보며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려면 설비 투자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점점 더 많은 걸 바라십니다?”
사장이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이 서류를 보면 제조법은 간단합니다만, 그렇다고 기존 기계에서 그냥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설비가 바뀌는 부분이 좀 있습니다.”
팀장은 최종훈이 말한 추가 조건을 떠올렸다.
김충식 본부장은 그것만은 피해 보라고 했다. 그 정도면 초기 투자 비용을 JHC 테크가 다 부담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팀장은 김충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그러다 손해를 보면 사장님이 다 물어주기로 하셨어. 말은 그렇게 해도 손해가 나면 사장님이 좋아하시겠냐? 돈 잃고 속 좋은 사람 없다는 말 알지? 마지막 조건은 어떻게든 피해 봐.
팀장은 잠깐 갈등했다.
‘반응을 보니까 그 문제만 해결해주면 라이센스를 팔 수 있을 것 같은데….’
최종훈은 이 기술을 즉시 팔라고 했다. 본부장보다는 사장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
팀장이 제안했다.
“그 설비, 우리가 다 만들어서 빌려드리죠. 무상으로.”
“예?”
“우리 회사 연구소는 못 만드는 장비가 없습니다. 우리가 대량생산을 안 해서 그렇지, 이 공장에서 필요한 장비 정도는 금방 만듭니다.”
사장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차피 나사 재고가 많아서 설비를 바꾸는 동안 공장을 세워둬도 문제는 없다. 기존 거래처에서 주문이 새로 들어오면 재고에서 꺼내주면 된다.
이런 조건이면 안 받을 이유가 없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가 계약이 파토가 나면 나만 망하는 거지.’
사장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업팀장의 얼굴도 확 밝아졌다.
‘됐다!’
“저야말로 빠른 생산 부탁드립니다. 나사가 현장에 사용되는 걸 빨리 보고 싶어서요. 하하하.”
***
최종훈은 계약 체결 소식을 듣자마자 선우현을 찾아갔다.
“나사 제작 기술의 라이센스가 팔렸습니다.”
그가 여기 온 건 그 기술을 팔았다고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선우현이 활짝 웃었다.
“이야아. 그 기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회사가 벌써 나왔군요. 하긴. 장님이 아니면 모를 수가 없지요.”
김수선도 맞장구쳤다.
- 탐사대의 현장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선정된 기술입니다. 나사 생산 기업의 전문가들이 감탄했을 겁니다.
그 기술의 가치를 알아본 나사 회사는 아직 없다.
동서남기공은 나사 기술의 가치를 알아보고 산 게 아니다. JHC 테크의 조건이 워낙 좋아서 사는 것뿐이다.
어쨌든 성과가 나왔다. 기술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하겠다는 곳이 생겼다.
최종훈이 자랑했다.
“제가 열심히 뛰었습니다. 하하하.”
“주스라도 한 잔 쭉 드시죠.”
최종훈이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화분 쪽을 보았다. 그가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이 토마토 말입니다.”
그의 여동생인 최민영이 토마토는 나오는 철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려줬다. 그런데 이건 평범한 토마토가 아니다.
“활력 토마토는 언제까지 수확할 수 있습니까?”
“음…. 겨울에는 저렇게 화분에 키우는 건 못 하겠지요?”
“그러면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수확해서 가공 처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가공이요?”
“그러니까 전문업체에 맡겨서 토마토 통조림으로 만든다든지….”
“신선해야 맛있는데.”
“그렇죠. 맞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방법은 당연히 있습니다.”
최종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 겨울에도 키울 수 있습니까? 비닐하우스, 아니, 온실 같은 건가요?”
지원위성 선체에는 예전에는 식물 재배실이 있었다. 그 시설은 이미 다 뜯어내서 다른 장비를 수리하는 데 사용했다.
그때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면 겨울을 날 수 있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꼭 필요한 장비가 있는데….”
“아! 그건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못 구하실 겁니다.”
***
최종훈은 선우현이 개발한 나사 기술로 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다.
“그래야 활력 토마토를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어. 계절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다고.”
비서 김찬혁이 물었다.
“사장님. 활력 토마토가 맛있고 몸에 좋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 있어.”
“민영 씨가 건강해졌다는 말도 들었고, 길성 박 회장님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다른 회사에서도 찾는 분들이 많은 것도 알고요.”
그래도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이 오려면 멀었잖습니까? 천천히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종훈은 제일 중요한 비밀은 김찬혁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레드 포션의 비밀은 절대로 말할 수 없지.’
그는 지난 일 년 사이에 두 번이나 죽을 뻔한 사고를 겪었다.
‘두 번 생긴 일은 세 번도 생길 수 있어.’
남의 일이라면 설마 또 그러겠냐며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건 그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조그만 가능성조차 무시할 수가 없다.
‘레드 포션이 생명보험보다 나아. 이렇게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 하나쯤은 살 수 있을 거야.’
최종훈이 말했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하는 거야.”
“사실 말입니다.”
김찬혁이 물어본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회사 내부에서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 돈 투자해서 진행하는데 말이 왜 나와?”
“기술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 퍼포먼스 아닌가 하는 말이….”
“직원들이 눈치 챘….”
“예?”
“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