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방송
선우현은 스케치북에 선을 거침없이 그었다. 연필을 누르는 압력과 각도가 바뀔 때마다 선의 색과 두께가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그리는 속도도 빨랐다. 빨리 그리는데도 결과가 좋았다.
그 선이 모여 그림이 되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채연서가 선우현이 스케치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선 긋는 거 되게 잘하시네요?”
“낙서나 좀 하는 거지요.”
탐사대 지원위성이 지구 위성궤도에 조난된 지 5000년이 지났다.
선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기타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생명유지장치에서 나와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나오면 다시 생명유지장치로 들어갈 때까지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선우현이 깨어나 활동한 시간을 다 모으면 120년쯤 된다.
20세기부터는 라디오나 TV 전파를 수신할 수 있어서 좀 낫지만, 예전에는 그 기간에 할 일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취미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그중 하나가 낙서였다.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라 낙서로 낭비할 종이는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 제어용 입력패널에 그려야 했다.
지상의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위성궤도에서 어깨너머로 구경하며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낙서를 하도 오랜 세월 동안 하다 보니 선은 좀 그을 줄 알게 됐다.
채연서가 생각했다.
‘낙서나 해서는 저런 선 못 긋는데….’
그녀가 선우현이 그리는 모습을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선우현은 연필로 그림을 쓱쓱 그렸다.
‘정말 능숙하게 그리….’
그녀의 상체가 자기도 모르게 스케치북 쪽으로 기울어졌다.
선우현이 그림에는 원래 그녀가 그렸던 스케치와 비슷한 부분이 꽤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다른 특징도 많았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참견했다.
“아. 거길 그렇게 할 게 아니라….”
선우현은 그녀의 참견을 무시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말리려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 그 그림이 그렇게…. 와아….”
선우현은 기억을 떠올리고 김수선의 조언까지 들어가며 스케치를 마쳤다. 그런 후에 채연서를 보며 물었다.
“연서 씨 스케치를 좀 고쳐봤는데 어떻습니까?”
채연서는 이미 머리를 스케치북에 들이밀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거 좋아요. 진짜 좋아요.”
“아이디어가 괜찮지요?”
“단순히 아이디어만 좋은 게 아니에요. 모든 선의 위치가 기품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정교하게 계산된 느낌이 들어요.”
김수선이 말했다.
- 지구연합에서 알아주는 명품 회사인 크리스탈핑거의 히트작 디자인을 그대로 베꼈는데, 당연히 기품이 있겠지요.
채연서가 스케치를 살펴보며 계속 감탄했다.
“와. 이건 느낌이 진짜….”
그러다 갑자기 머리를 휙 들고 선우현을 빤히 보았다.
선우현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나한테 디자인 의뢰를 맡겼어요? 이런 실력이 있으면 직접 하면 되잖아요.”
“마음에 드나 보군요.”
그녀가 얼른 엄지를 세웠다.
“최고예요.”
“그럼 이 디자인으로 결정?”
“당연하죠!”
“난 그냥 스케치만 한 거니까, 디테일한 부분이나 실제 적용은 앞으로 연서 씨가 알아서 해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저한테 다 맡긴다고요? 진짜 그래도 돼요?”
“돼요.”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돼요가 아니라 꼭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셔야죠. 선장님은 크리스탈핑거의 히트작 디자인을 옮겨 그리기만 했으니까요.
“수선아. 우주왕복선은 필요 없나 보다?”
- 크리스탈핑거의 그 디자인이 나온 지 5000년이 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시대에 석판에 새겨진 문양을 지금 디자인에 적용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크리스탈핑거의 디자인도 비슷한 상황이니까 그냥 우리 거로 하죠.
“그러고 보니까 그 석판 중에 우리를 묘사한 것도 있었는데.”
- 고대 이집트의 현지 협력자가 그때 괜한 짓을 했죠.
***
채연서가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고 친언니인 사장 채승아가 물었다.
“어땠어? 깐깐해? 말이 안 통해?”
채연서가 스케치북을 펼쳤다. 선우현이 그린 스케치가 나왔다.
채승아는 디자인 회사의 사장답게 보는 눈이 좋다. 그녀는 한눈에 그 디자인의 가치를 알아봤다.
채승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채연서! 이번 거 너무 잘 나왔다. 이 디자인은 토마토에 쓰기엔 아까울 정도야.”
그래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연서야. 이 디자인은 진짜 명품 의뢰에 쓰고, 그 토마토는 새로 디자인하자.”
“안돼.”
“이렇게 잘 나왔는데 아깝잖아. 이 품격을 봐. 이건 독립적인 명품 디자인으로 써도 될 정도야.”
“내가 한 거 아니야.”
“아니긴. 네가 저번에 스케치한 거랑 느낌이 비슷한데.”
채연서가 스케치북을 보며 말했다.
“내 스케치가 원형인 건 맞아. 맞는데, 그걸 보고 그 사람이 이걸 새로 그렸어. 이거 내가 혼자 그린 거 아니야. 공동 제작이야.”
“응? 그 사람이라니? JHC 테크의 디자이너랑 만났어?”
“아니.”
“그럼?”
“선우현.”
채승아는 당황했다.
“토마토 농부?”
“어.”
채승아가 스케치를 다시 확인했다.
“네가 그린 그림을 베이스로 한 건 맞아. 맞는데, 이러면 완전히 뜯어고친 거네? 게다가 디테일한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어. 완성도도 높아. 채색만 하면 그대로 쓸 수 있을 정도야. 이런 수준으로 작업하려면 필요한 시간이….”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채연서를 보았다.
“너 이 스케치 오늘 가져가서 처음 보여준 거잖아.”
“그랬지.”
“거기서 두 시간쯤 있었니?”
“응.”
“두 시간 만에 이런 완성도의 디자인이 나와?”
“두 시간 아니야.”
“그럼?”
“10분도 안 걸렸어.”
채승아는 말문이 막혀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물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왜 우리 회사에 의뢰한 거래?”
“내 말이. 그냥 직접 하면 되는데 말이야. 되게 금방 했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람 맞니?”
채연서가 선우현이 이 그림을 그릴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세상에 그런 완벽한 사람도 있더라. 무술고수니까 힘은 당연히 세겠지. 생명공학자니까 머리도 좋겠지. 상남자이지. 거기까진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예술적 감각은 진짜 천재야.”
갑자기 채연서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면 완전 내 이상형인데?”
채승아가 얼른 말했다.
“난 이 결혼 반대일세.”
“그런 거 아니라고! 이제 겨우 두 번 만났다고!”
“발끈하니까 더 수상하네.”
“됐고, 이제 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작업해야 해. 개별 포장용 상자도 만들고, 포장지, 쇼핑백, 브로슈어, 기타 등등 다 만들 거야.”
그런 작업은 채연서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채승아가 운영하는 디자인 회사가 그런 일을 하는 곳이다.
채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접수.”
채연서가 물었다.
“회사 일정에 여유는 있어?”
“김승빈 때문에 재성퍼시픽이 스케줄에서 빠졌잖아. 그 자리에 넣으면 돼.”
***
섬 해안가에서 발생한 마약 가방 사건은 예능 촬영 도중에 일어났다.
피디는 그때 촬영본을 최선을 다해 편집했다.
방송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예능 촬영 중간에 실제 상황이, 그것도 대형으로 터진 사건이라 시청자들의 관심도 많았다.
그 예능 프로그램이 드디어 방송됐다.
아이돌 가수 홍은성과 배우 김승빈이 파도가 크게 칠 때 바닷물을 뒤집어쓰는 모습이 나왔다.
그 영상에는 여러 효과가 화려하게 들어갔다. 같은 영상에 슬로우모션을 사용한 것을 다시 보여주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방송을 본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 일부러 위험한 것처럼 영상을 과장하는데?
- 그러게요. 오버하는 게 티가 나네요.
- 그래도 재미있잖아요.
그런데 그 장면은 구하니가 파도에 휩쓸릴 뻔했다가 선우현에게 구출된 직후에 촬영됐다.
피디는 구하니가 위험해지는 장면은 아예 빼버렸다. 그 영상이 나가면 욕을 많이 먹을 게 뻔했다.
게다가 선우현도 그 부분을 편집해달라고 했다.
피디는 생명의 은인인 무술고수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피디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뺐지만, 그래도 눈치챈 사람들이 있었다.
- 구하니도 젖어있는데?
- 구하니가 파도를 맞는 모습은 없었는데요?
- 뉴스에는 구하니도 위험했었다고 했는데?
- 뭐지? 그런 영상을 못 찍었을 리는 없는데? 왜 안 내보냈지?
- 내보내기엔 너무 위험했나?
배우 김승빈이 마약이 들어있는 가방을 찾아내는 장면은 편집되지 않았다. 가방을 열려고 철사를 이용하는 장면도 그대로 나왔다.
그런데 선우현이 마약조직원들과 싸우는 장면은 카메라에 찍히지 않았다. 카메라가 모두 바다 쪽을 향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때 바다 쪽에 있던 스태프나 게스트의 모습만 영상에 나왔다.
- 와아. 사람들 놀라는 거 봐라.
- 어? 잠깐. 저거 뭐야?
피디는 김승빈이 채연서를 밀치는 장면도 그대로 살렸다.
피디가 방송국에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재성퍼시픽에서 저 장면 찍힌 게 있으면 넣지 말라고 난리를 치더라.”
“그래도 넣으셨네요?”
채연서가 조직원에게 붙잡히는 모습은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신고하는 마음으로 넣었다. 그 새끼가 저런 짓을 해놓고 혼자 도망쳤잖아.”
김승빈이 도망치는 방향은 바다 쪽이었다. 그래서 뒤를 힐끔거리며 도망치는 모습이 영상에 제대로 나왔다.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시청자들이 화를 냈다.
- 아니, 저건 아니지!
- 와. 김승빈 그렇게 안 봤는데….
- 개아들이었네.
홍은성이 삽을 휘두르며 조직원을 견제하는 모습도 나왔다. 겁에 질린 얼굴이긴 했지만, 도망치는 김승빈의 뒷모습과 달리 홍은성은 앞모습이 제대로 나왔다.
- 김승빈하고 다르게 멋진 사람도 있네. 그런데 쟤가 누구라고요?
- 아이돌 홍은성입니다. 에이투원 멤버죠.
싸우는 장면은 찍히지 않았지만 소리는 녹음됐다. 조직원들의 비명이 들렸다.
- 와. 싸우나 보다.
- 어? 방금 그 목소리, 구하니가 외친 거야?
- ‘조심’까지만 들었는데, 더 안 들리네요.
총소리도 났다.
- 총은 누가 쏜 겁니까?
- 뉴스에서 마약 조직 두목이 쐈다고 하던데요.
선우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 그래서 누가 마약 조직을 잡은 거죠?
- 스태프 중에 무술고수가 있었대요.
- 무술감독인가? 예능에 무술감독이 왜 있지?
선우현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마약 조직의 잔당이 남아 있을 수 있어서, 경찰에서 일부러 이름을 발표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대신에 톱스타 구하니에 대한 뉴스를 많이 써서 내보냈다.
피디는 구하니가 사람들 사이에서 뒷정리를 돕는 영상을 방송에 내보냈다.
- 지나가다 들른 구하니가 왜 짐을 같이 정리하고 있지?
- 요즘 활동을 줄였다더니 시간이 남나 보죠.
- 시간이 남는다고 톱스타가 스태프처럼 일하나요?
- 큰 사건을 같이 치렀으니까 같이 정리하나 보죠.
- 구하니가 성격이 좋나 봐요.
구하니가 그 댓글을 보며 말했다.
“봤어? 그날 내가 현장에서 선우현 씨 일을 도와준 게 반응이 좋아. 역시, 이러려고 선우현 씨가 나한테 일을 시킨 거구나.”
막내 작가 안유정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맞는 거 같은데?”
“그 영상은 피디님이 언니가 위험했다는 거 숨기려고 일부러 넣은 거야. 언니가 멀쩡하게 일하는 모습 보여줘서, 파도에 휩쓸릴 뻔했던 게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되게 한 거라고.”
“유정아.”
“응?”
“아닌 거 알더라도 그냥 기분이라도 좋아지라고 말해줄 수도 있잖아?”
“그런 걸 전문용어로 아부라고 하지.”
“너 방송 작가잖아. 더 좋은 표현 없어?”
“없어.”
선우현이 마약조직원들을 때려잡는 장면은 영상으로 찍힌 게 하나도 없어서 내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내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피디는 방송 후반부에 스태프와 출연진들의 목격담을 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어휴. 휙휙 날아다녔죠.”
“발차기 한 방이면 한 놈씩 나가떨어지고, 업어치기도 스케일이 완전히 달랐어요. 달려드는 놈을 탁 잡아서 던지니까, 하늘에 붕 떴다가 떨어졌거든요.”
개인적인 추측을 사실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태권도, 유도, 그 외에 다양한 무술에 능통한 분입니다.”
디자이너 채연서도 특별히 인터뷰에 참여했다.
“두목이 총을 겨눠도 총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와. 진짜 상남자였어요.”
그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한 피디는 자기 자신을 인터뷰했다.
“두목이 총으로 나를 겨누고 협박하니까, 나랑 잘 모르는 사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물론 두목을 속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작전에 호응해 두목을 속이려고 연기를….”
***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은 그 부분을 보고 당황했다.
“어? 설마….”
그는 선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우현 씨. 혹시 채연서 씨를 만난 곳이, 해변에서 예능 촬영을 하다가 마약 조직의 습격을 받은 그 현장입니까?
- 아는 줄 아셨는데.
“아뇨. 몰랐습니다.”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이 전화를 끊은 후에 아쉬워했다.
“채연서 씨의 생명의 은인인 줄 알았으면 디자인 의뢰비를 더 깎을 수 있었는데. 아깝다.”
그의 여동생 최민영이 말했다.
“돈도 많은 사람이 없어 보이게.”
“돈이 문제가 아니야. 의뢰비에 활력 토마토 구매권이 포함되어 있어.”
“뭐? 구매권이 걸려 있었으면 나한테 맡겼어야지! 나도 그림쟁이인데!”
최종훈이 최민영이 그린 그림을 보며 말했다.
“어…. 그건 아니지. 우리가 파는 건 활력 토마토이지 괴물 토마토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