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숨찐 옥탑방 억만장자-58화 (58/281)

58. 스케치

오후 임원회의에 나사 제작 기술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영업과 마케팅 담당 본부장인 김충식이 이백현 연구소장을 보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이제 나사도 만드나? 연구소가 시간이 남나 봐?”

그들은 최종훈이 사고 후유증으로 은퇴를 고민할 때 차기 사장 자리를 놓고 파벌을 동원해 경쟁하던 사이다.

이제 최종훈이 후유증을 완치하고 복귀했지만 둘 사이에는 그때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김충식이 연구소를 먼저 건드렸다.

이백현이 즉시 반격했다.

“이건 사장님이 외부에서 가져오신 기술이다.”

윗사람을 등에 업고 반격한 효과는 확실했다. 김충식이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했다.

“어? 사장님이?”

최종훈이 쐐기를 박았다. 그가 임원들을 보며 말했다.

“이 기술을 빨리 팔았으면 좋겠군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이 안건을 미리 알고 있던 연구소장 이백현이 얼른 말했다.

“기술을 팔 때 생산 설비를 우리가 다 개조하고 세팅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리 연구소의 역량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기는 장점은요?”

이백현은 최종훈이 그 기술로 수익을 내는 것보다 파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안다.

“상대의 규모와 기술력에 상관없이, 작은 중소기업에도 라이센스를 팔 수 있습니다.”

최종훈이 씩 웃었다.

“그거 좋군요.”

김충식 파벌의 이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겨우 나사 기술을 파는데 그렇게까지 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손실이 생기면 내가 사재를 털어서 채울 겁니다.”

“예?”

“영업에서 못 팔겠으면 연구소에서 직접….”

김충식 본부장은 이 일이 어떤 성격인지 깨달았다.

‘돈보다 중요한 뭔가가 있구나! 이건 무조건 찬성해야 해!’

그가 얼른 말했다.

“사장님. 영업본부는 사장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남극에 가서 얼음이라도 팔 수 있습니다.”

이백현이 당황해서 따졌다.

“김 본부장! 아부가 너무 심하잖아!”

김충식이 생각해도 아부가 좀 과하긴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그래서 대놓고 큰소리쳤다.

“사장님! 이 나사 제작 기술의 라이센스는 영업본부에서 즉시 팔겠습니다.”

***

이튿날 최종훈은 선우현을 찾아가 활력 토마토를 받으며 말했다.

“라이센스 판매는 영업본부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곧 성과가 나올 겁니다.”

“고생하시는 분들한테 토마토라도 하나씩 돌려야겠네요.”

“이 아까운 걸 굳이….”

“예?”

“아닙니다. 영업본부 이사들한테 하나씩 먹여 활력이 생기게 한 후에 더 굴리겠습니다.”

“급한 거 아니니까 그럴 필요까지야….”

- 선장님. 전 급합니다.

선우현이 말을 바꾸었다.

“결과가 빨리 나오면 좋지요.”

최종훈이 디자이너 채연서와 만난 이야기도 했다. 그런 후에 물었다.

“채연서 씨와 아는 사이라고….”

“알긴 하죠.”

“아. 다행입니다. 혹시 속았나 했더니, 진짜였군요. 채연서 씨와의 미팅은 언제로 잡을까요? 디자인 콘셉트 회의를 원하던데요.”

- 선장님. 내일부터는 일 좀 하시죠?

“내일?”

“딱 좋군요. 내일.”

최종훈은 채연서에게 연락해 시간을 조율했다.

그런데 그는 미팅 장소를 선우현의 옥탑방 옥상이 아니라 JHC 테크 연구소로 잡았다.

이튿날 선우현은 오랜만에 연구소에 왔다.

“여기 오랜만이네.”

- 그만 놀고 일하시죠.

“수선아. 공부하려고 마음 딱 먹었는데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면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 거 알아?”

- 선장님은 공부 안 하시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는 연구소에서 외부 연구 협력자에게 제공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와. 이게 아직도 그대로 있네.”

지원위성에서는 실내가 보이지 않는다.

- 뭐가 말입니까?

“탐사대용 버드 타입 정찰드론 만든 거. 책상 위에 펼쳐놨는데 아직도 그대로야.”

그 드론은 외형만 보면 새처럼 생겼다. 부품이 노출되어 있어 기계라는 건 알 수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새와 비슷했다.

- 그동안 쭉 노셨으니까 당연히 아직도 그대로죠. 출근을 좀 하셔야 뭐가 바뀔 텐데요.

채연서도 그 사무실에 들어왔다.

“어머. 선우현 씨. 다시 만나니까 너무 반가워요.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주세요?”

“전화번호를 모르니까?”

“아. 그렇죠.”

채연서는 해안가 촬영 현장에서 선우현의 번호를 따려다가 실패했다.

선우현이 물었다.

“연서 씨는 토마토 포장지를 디자인하려는 거지요?”

채연서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놉! 포장지와 포장 상자, 쇼핑백, 제품 설명용 브로슈어, 그 외에도 활력 토마토와 관계된 모든 디자인을 맡으려고요.”

“음…. 디자인은 좀 하시나?”

채연서는 당황했다.

“어머. 저 채연서예요.”

“이름은 압니다.”

“아니, 그러니까….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포장 디자이너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검색 한 번을 안 해요?”

“어? 검색하면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었습니까? 와. 유명인이셨네.”

채연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제가요. 품격 있는 디자인으로 쪼끔 유명해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어머. 잠깐만요.”

채연서가 책상 쪽으로 다가와 정찰드론을 살폈다.

“이건 뭐예요? 새 모형이에요? 아닌가? 새처럼 생긴 기계인가? 무슨 예술 작품 같다.”

“이야아. 볼 줄 아시네. 제가 만들었습니다.”

“이 라인 좀 봐. 감각 있으시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정찰드론 제작 지침서대로 만들다 보니 형태가 그렇게 나온 겁니다만?

“원형과 좀 다르잖아.”

- 그거야 선장님이 만들다 실수도 하고 망치기도 하고, 부품이 부족해서 다른 거로 때우기도 했으니까 그렇죠.

“수선아. 우주왕복선 필요 없냐?”

- 그 정도면 선장님의 고유 디자인이죠. 원형보다 낫습니다.

디자인 회의 참석자는 선우현과 채연서 두 명뿐이다.

선우현은 토마토를 갈아서 투명한 병에 담아 왔다.

“생과일주스인데 한 잔 드릴까요?”

채연서는 그 주스가 뭔지 한눈에 알아봤다.

“어머어! 당연하죠!”

그녀가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와…. 주스로 만들어도 맛있네요. 이 정도면 활력 포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최 사장님도 그렇게 부르더군요.”

채연서가 그 주스를 아껴 마시며 질문을 쏟아냈다.

“이거 먹으니까 진짜 활력이 넘치던데요? 이런 거 어떻게 키우는 거예요? 저도 키울 수 있어요? 고객 중에 기업가가 많다던데, 그런 사람이면 개인 농장에서 몰래 키울 수도 있잖아요.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요?”

“특별한 식물 영양제로 키워야 해서, 종자를 훔쳐가 봐야 의미 없습니다.”

“아! 역시 뭔가 비법이 있군요!”

그녀는 최종훈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생명공학의 천재라더니, 특별한 식물 영양제를 만들었나 봐.’

지금 회의하는 곳은 JHC 테크 연구소 내부 사무실이다.

‘JHC랑은 연구 협력 관계라고 했지.’

그녀가 선우현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총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남자이면서 지적인 과학자. 몸과 머리 모두 최고의 명품이네.’

그런 사람이 왜 그날 스태프 알바를 했나 싶었다.

‘이유가 뭐면 어때? 덕분에 만났으면 됐지.’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토마토 주스의 맛이 느껴졌다.

선우현이 말했다.

“디자인 회의는?”

채연서가 정신을 차렸다.

“아! 해야죠!”

그녀가 스케치북을 꺼냈다. 거기에는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들이 있었다.

“일단 제가 몇 가지 디자인을 러프하게 스케치해 봤어요. 제 마음에 드는 건 없으니까 느낌만 참고해 주세요. 본격적인 작업은 활력 토마토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할게요.”

선우현이 스케치북을 넘겨 첫 장을 본 후에 말했다.

“나도 이런 디자인 하는 사람을 아는데. 혹시 베르트랑 벨몽도라고 들어봤어요?”

“어머. 무슨 그런 실례가 되는 말씀을.”

김수선이 말했다.

- 예전 현지 협력자의 현재 평가가 많이 안 좋은가 봅니다. 베르트랑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긴 했습니다.

채연서가 정색을 하고 설명했다.

“명품 디자인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정립한 분인데 당연히 알죠. 이쪽 일 하는 사람이 그분을 모르면 사기꾼 취급받아요.”

- 사실 베르트랑이 실력 하나는 확실했습니다.

“내가 좀 아는 사이인데.”

“네? 19세기에 폭발 사고로 돌아가신 분을요?”

김수선이 아쉬워했다.

- 그 사고로 현지 협력자도 죽고 통신기도 파괴됐지요.

“아니, 그러니까 베르트랑 벨몽도가 작업한 걸 예전에 많이 봐서 좀 아는데.”

선우현이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스케치에서 그 사람 느낌이 좀 나서요.”

“디자인 좀 볼 줄 아시나 보다. 전문용어로 벨몽도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첫 페이지는 그 느낌으로 그려본 거 맞아요.”

선우현이 스케치를 몇 장 더 넘겨보았다. 다른 스케치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 눈에 익숙한 걸 발견했다.

“어라?”

“아. 그건 망한 거예요. 느낌이 팍 와서 그려봤는데 뭔가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착각이었던 거죠.”

선우현은 그 그림이 익숙했다.

‘이거 보급품 상자에서 본 거와 비슷한데?’

지원위성의 보급품은 다양한 상자에 담겨 있다. 플라스틱 상자에 쌓여 있는 게 제일 많았고, 금속 상자에 보관된 것도 꽤 있었다.

지금은 남아 있는 보급품이 거의 없다. 보급품을 사용하고 남은 빈 상자도 선체 수리나 강하 캡슐의 소재로 사용했다.

모든 상자가 재활용되는 건 아니다. 레드 포션 보관 용기처럼 재활용이 어려운 것도 있다.

군용 보급품 상자에는 지구연합군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런데 보급품은 군용만 있는 게 아니다.

탐사대 프로젝트에는 지구연합의 민간 기업들도 참여했다. 그래서 각 기업이 생산한 다양한 제품들이 각자 회사의 디자인을 살린 상자에 담겨 보급품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 보급품 상자 중에 이것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크리스탈 핑거에서 보낸 보급품 상자의 디자인과 비슷한 걸 그려왔네. 상자 형태도 비슷하고 시그니처 디자인도 비슷해.”

- 크리스탈 핑거에서 제공한 보급품이면, 스카프와 향수군요.

“어. 향수 상자와 비슷하다. 탐사대 보급품으로 참 별걸 다 넣어준다 했지.”

- 광고 목적이었을 겁니다. 탐사대원들이 현장에서 크리스탈 핑거의 스카프들 두르고 향수를 뿌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고 싶었겠죠.

“근데 하도 오래전에 봐서 그 디자인의 정확한 형태가 가물가물하네.”

- 스카프는 이미 다 사용했습니다만, 향수는 쓸모가 없어서 창고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생산된 지 오천 년이 지났으니 향수는 이제 못 쓰겠지만, 상자는 미개봉 상태로 있습니다.

“향수 하나 꺼내 놔. 개별 포장된 상태 그대로.”

선우현이 스케치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연서 씨. 옥상에 가서 커피라도 마시죠. 여기 옥상 공원이 꽤 좋습니다.”

“어머. 커피 좋죠. 토마토 주스는 더 좋고요.”

“주스는 지금 마신 게 다라서.”

“커피 마실게요. 사주시는 건가요?”

“이 연구소는 커피가 공짜입니다.”

두 사람은 연구소 옥상으로 올라갔다. 선우현이 옥상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스케치북을 올려놓았다.

선우현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연서 씨가 그린 이 스케치를 좀 바꿔봅시다.”

그는 스케치북을 하얀 종이가 나올 때까지 넘긴 후에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채연서가 그려온 것과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다.

김수선이 지원위성에서 실물 상자를 보면서 조언했다.

- 거기가 아니라 그 옆으로 선이 지나갑니다. 그 각도가 아니라 좀 더 아래로요.

선우현이 스케치북에서 연필의 끝을 살짝 떼고 허공에 몇 번 그려본 후에 실제로 선을 그었다.

채연서가 생각했다.

‘졸라맨 스타일로 그리겠지?’

클라이언트 중에는 희망하는 디자인을 선 몇 개로 묘사하는 곳이 가끔 있다. 구도만 제대로 들어 있고 아이디어만 확실하다면 그 정도만 그려줘도 의미는 전달된다.

반대로 의뢰한 회사의 자체 디자인팀이 구체적인 부분까지 자세히 그리는 곳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디자인할 거니까.’

클라이언트가 상상한 것보다 좋은 걸 디자인하면 원래 의도와 달라도 고객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아했다.

그녀는 선우현이 어떤 낙서를 하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려고 했다.

‘초보자가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내가 문제점들을 찾아서 지적질이나 실컷…. 어? 어?’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선우현이 그리는 선이 평범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