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디자이너
현장에 출동한 형사들이 마약조직원들을 체포해서 경찰서로 데려갔다.
형사팀장이 피디에게 말했다.
“다친 분은 없으니까 다들 댁에 가서 쉬시다가, 나중에 참고인 조사할 때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유. 당연히 협조해야죠. 그런데 우리가 연예인이 좀 있어서, 스케줄은 조정해야 할 겁니다.”
“조정이 어려운 분은 저희 쪽에서 찾아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사라진 한 명 말입니다.”
배우 김승빈은 현장에서 도망쳤다. 출연자와 스태프를 중에 도망친 사람은 김승빈 딱 한 명이었다.
“연락되면 오늘 당장 경찰서로 오라고 하십시오. 안 오면 수배될 수도 있습니다.”
“네? 수배는 왜….”
형사팀장이 바닷가에 묻혀 있다가 캐낸 가방을 보았다.
“대량의 마약에 권총까지 들어 있는 가방을 찾아낸 사람인데, 혼자 도망쳤잖습니까? 수상하니까 일단 용의선상에 올려야지요.”
“아. 그렇죠.”
***
선우현은 집에 가도 된다는 연락을 듣고 말했다.
“수선아. 봐라. 살살 패니까 이렇게 스무스하게 넘어가잖아.”
- 지상 생활에 많이 적응하셨습니다.
“내가 원래 현장 적응이 빨라.”
- 너무 잘 적응하셔서 계획을 내팽개치고 그렇게 펑펑 노시나 봅니다.
“어…. 이제 일할 거야. 하려고 했어. 나 믿지?”
- 안 믿는 거 아시죠?
“알지.”
***
사람들은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촬영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장비는 상태가 멀쩡했지만 사람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총이 발사되고 잭나이프가 날아다니고 사람이 나가떨어지는 싸움을 눈앞에서 보았다. 피디처럼 적에게 붙잡혔다가 구출된 사람도 있었다.
스태프 중 일부는 그 싸움을 보면서 충격을 받거나 멘탈이 나갔다. 당연히 촬영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그런데 충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랐다.
선우현이 구하니와 안유정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제 뭐 할 겁니까?”
막내 작가 안유정이 얼른 대답했다.
“저도 여기 스태프잖아요. 지금은 이 언니 전담하느라고 잠깐 빠져 있지만요. 멘탈 나간 작가님 케어하려고요.”
“케어?”
“바닷가 왔으니까 횟집에서 소주 마시면서요.”
“아아.”
선우현이 구하니를 보았다.
“하니 씨도 같이?”
“아니요.”
“다른 일이 있나 보군요.”
구하니가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나 요즘 스케줄을 줄여서 시간이 남아요. 여기도 그냥 지나간 거예요. 할 일이 없어서.”
그녀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눈웃음을 살짝 치며 물었다.
“유정이는 멘탈 케어하려고 소주 마시러 가는데, 우리는 뭐 안 먹나요?”
“난 멘탈에 스크래치도 안 났는데.”
“총에 맞을 뻔했잖아요.”
“그거 빗나갈 거 알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선우현이 주변을 보았다. 사람들이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남으면 정리라도 좀 돕든가.”
“네?”
“그거 물어보러 온 건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가 팔을 걷으며 물었다.
“어머어. 그럴까요? 뭐 하면 돼요?”
선우현의 오늘 알바는 현장에서 장비 같은 짐을 옮기는 일이다.
“짐이나 같이 정리합시다.”
“어머! 내가 짐 정리 잘하는 건 어떻게 알고!”
안유정이 말했다.
“집도 제대로 안 치우는 사람이….”
“뭐라고 했니?”
“아니야.”
***
사람들이 흩어지기 전에 피디가 선우현을 따로 찾아왔다.
“선우현 씨. 살려줘서 진짜 고맙습니다.”
“아까 서운하진 않으셨고요?”
피디가 손을 흔들었다.
“어휴. 아닙니다. 사실 붙잡혀있을 때는 말이죠. 나는 죽을까 봐 무서워죽겠는데 선우현 씨가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싶긴 했습니다.”
피디가 그때를 생각했다.
“그런데 두목이 권총을 휘두를 때 선우현 씨가 옆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깨달았습니다.”
“어….”
“선우현 씨는 일부러 두목의 어그로를 끌면서 사람들이 없는 방향으로 가더군요. 총에 맞더라도 혼자 맞겠다는 거였지요?”
“그랬나요?”
“저는 보자마자 눈치챘습니다. 권총을 겨눈 놈도 눈치챈 것 같더군요. 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니, 뭘 또….”
“저놈들이 나를 인질로 잡았을 때 선우현 씨가 잘 모르는 사이라고 말한 거, 제가 중요한 인질이 되면 더 위험해지니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는 걸요.”
“어…. 아! 그거 알아보셨구나!”
피디가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제 자리를 내놓으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어? 진짜 방송국 피디 자리를 줍니까?”
피디는 당황했다.
“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하, 하하.”
“저도 농담입니다.”
“그래도 조연출 자리 정도는 가능….”
옆에 있던 조연출이 움찔했다.
선우현이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촬영 구경은 오늘 하루 알바 하면서 충분히 했으니까요.”
조연출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
그날 밤에 광수대 형사 안형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묘하네.”
섬 사건 관할 경찰서의 형사가 물었다.
“네가 알아보는 사건이랑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자료를 보여줬더니,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 표정이야?”
안형준이 모니터를 짚으며 말했다.
“이 사람 무술 실력이 대단한 것만 보면 혹시나 싶긴 한데, 맞은 놈들이 너무 멀쩡해요.”
“호되게 당했던데? 코뼈가 부러진 놈도 있어.”
“제가 찾는 사람에게 당한 놈들은 기본이 팔다리 골절이고, 상태가 심한 놈은 밥숟가락도 겨우 듭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한 거겠지.”
***
디자이너 채연서의 언니 채승아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김승빈? 뭐 그런 개쌍쌍바 새끼가 다 있어!”
“그놈이 나를 칼을 든 놈한테 떠밀 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재성퍼시픽은 이제 우리한테 완전히 아웃이야!”
김승빈은 재성퍼시픽 사장의 아들이다.
“당연하지! 선우현 씨 아니면 나 진짜 큰일 날 뻔했어.”
채승아가 멈칫했다.
“응? 선우현이 누구야?”
“그 상황에서 나를 구해준 분이 있다고 했잖아. 그분.”
“그분? 그부운?”
채승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래서 그분은 직업이 뭐이신가?”
“스태프 알바….”
“난 이 결혼 반대일세.”
“이 언니가 미쳤나? 오늘 처음 본 사람이야!”
“그럼 됐네! 일 이야기나 하자.”
채연서가 투덜대면서 말했다.
“어쨌든 이번 디자인은 대충 다 나왔어. 작업은 금방 끝날 거야.”
“역시 채연서. 감각도 좋아. 손도 빨라. 날 닮아서 그런가?”
“난 아빠 닮고 언니는 엄마 닮았는데?”
“엄마한테 이른다?”
채연서가 말을 돌렸다.
“재성퍼시픽이 아웃이면 스케줄이 비네? 나 이것만 끝내고 당분간 쉬어도 되지?”
채승아가 태블릿에 회사 정보를 띄워 보여주었다.
“내일 미팅 하나 하자. JHC 테크에서 미팅 요청이 들어왔어.”
“응? 여긴 기술 판매 전문 회사인데? 내 전문 분야는 아니잖아. 미팅은 왜 잡았어?”
“너 이번에 그 드라마 촬영 보러 간 거, 길성 비서실에 부탁해서 된 거잖아. 그 비서실 통해서 들어온 미팅 제안이야. 두 회사가 가까운 사이인가 봐.”
“그래? 알았어. 빚은 갚아야지. 근데 미팅만 하고 디자인 제안은 거절한다?”
“맘대로 해.”
***
방송국 제작진이 예능을 촬영하다가 우연히 마약과 권총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발견했다.
그것만 해도 뉴스가 되는데 그걸 찾으러 온 마약 조직의 습격까지 받았다.
그런 사건이 조용히 넘어갈 리 없다. 그 사건이 공중파 뉴스에 나왔다.
기자들의 취재는 구하니에게 집중됐다. 그녀가 그곳에 있던 사람 중에서 제일 유명한 톱스타이기 때문이다.
[구하니 씨는 제작팀 작가 중 한 명인 안유정 씨를 만나러 갔다가 사건에 휘말렸다고 합니다. 구하니 씨는 사건이 해결된 후에 팔을 걷고 현장 정리에 참여….]
길성 기업 회장 박길성이 회장실에서 TV로 뉴스를 보며 말했다.
“저 방송국 사람들 큰일 날 뻔했군.”
비서실장이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협찬하는 방송 프로그램입니다.”
“유명한 방송인가?”
“아닙니다. 대신에 제작비도 적게 드는 방송입니다. 그래서 적은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렸습니다.”
“이번에 유명해졌으니까 진짜 최대 효과를 누리겠어. 저 방송 시청률도 올라가면 효과는 더 커질 테고. 홍보팀에서 누가 제안한 거야? 보너스라도 좀 챙겨줘.”
“박서윤 대리가 추천했습니다.”
박서윤은 비서실 소속이다.
“응? 홍보팀이 아니라?”
비서실장이 설명했다.
“홍보팀에서 협찬 대상 프로그램 사내 추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 대리가 왜 저 방송이 가성비가 좋은지 자료까지 준비해서 추천했습니다. 홍보팀에서 그걸 보고 그대로 채택했다고 들었습니다.”
박길성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역시 박서윤 대리는 감각이 있어.”
“그게 아니라 박 대리가 저 방송 애청자라….”
“본질을 꿰뚫어보는 감각이 있다고.”
“예? 아. 예. 그렇습니다. 감각이 있습니다.”
“그럼 보너스는 박서윤 대리에게 줘.”
“알겠습니다.”
***
이튿날 박서윤은 보너스를 받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백만 원이나요?”
비서실장이 말했다.
“회장님이 그 방송에 협찬하자고 제안한 사람에게 보너스를 주라고 하셨어. 그거 박 대리가 추천했잖아.”
“고맙습니다!”
박서윤은 회장실에 서류를 가지고 들어갔을 때도 인사했다.
“회장님. 보너스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길성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보너스로는 뭘 할 생각인가?”
“이사 갈 때 보증금에 보태려고요.”
“으응? 겨우 이백만 원으로?”
“봐둔 곳이 언덕 위에 있는데, 거기 가려면 보증금 오백이 필요하거든요. 딱 이백이 모자랐어요.”
“아니, 그럼 지금 그 집은 보증금 삼백….”
박길성은 박서윤이 어디 사는지 주소는 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 본 적은 없다.
비서실장을 보내서 거주 환경을 알아볼 수도 없다. 회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재장악할 때까지는 비서실장에게도 이유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길성이 굳어가는 표정을 억지로 펴며 물었다.
“우리 회사 대리 월급이 이백보다는 훨씬 많을 텐데?”
“적금은 깨기 아까워서요.”
“아…. 그래. 알았어. 박 대리 차는 있나?”
“아니요.”
“그런데 왜 힘들게 언덕 위로 가려는 거야?”
박서윤이 방긋 웃었다.
“옥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아서요.”
“전망…. 그렇구나.”
***
박서윤이 나간 후에, 박길성이 JHC 테크 사장 최종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하하. 박 회장님. 디자이너 미팅을 주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그 디자이너를 만나러 왔습니다.
“응? 내가 그런 걸 주선해줬나?”
- 길성 비서실에서…. 알아서 도와준 거군요. 하긴. 디자이너 소개 정도는 박 회장님이 직접 처리할 크기는 아니죠.
“어쨌든 내가 뭔가 해준 거지?”
- 그야 그렇지요?
“그럼 나도 부탁 하나만 하자.”
- 무슨….
“서윤이. 어떻게 사는지 좀 알아봐 줘. 아무에게도 시키지 말고 자네가 직접.”
- 네? 설마 직원 뒷조사를 저한테….
“그냥 직원이 아닌 거, 최 사장은 알잖아.”
최종훈은 박서윤이 박길성의 숨겨둔 딸이라는 걸 안다. 박길성이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다.
- 그렇죠. 제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런 건 처음 해봐서….
“그냥, 사는 집이 어떤 곳인지, 위험한 곳은 아닌지, 그 정도만 알아봐 주면 돼.”
- 아! 그거야 간단하죠. 알겠습니다.
***
최종훈이 전화를 끊자마자 비서 김찬혁이 물었다.
“사장님. 누구 뒷조사인데요? 제가 처리할까요?”
“뒷조사 아니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나오는 간단한 거야. 디자이너 미팅 준비는?”
김찬혁이 태블릿으로 채연서의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름 채연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품 디자이너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채연서의 디자인을 원하는 곳이 국내외에 워낙 많아서 섭외가 어렵습니다.”
“회사는 어때?”
“채연서의 언니인 채승아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합니다. 채연서가 메인 디자이너이고, 나머지 인원은 채연서를 서포트하는 소규모 회사입니다.”
최종훈이 태블릿을 쓱쓱 넘기며 나머지 자료를 확인했다.
“명품 디자인으로 유명한 건 알고 있었는데, 주로 그쪽을 맡았네?”
“스마트한 전자제품도 하기는 합니다만, 주력은 명품 디자인입니다.”
“이러면 농산물인 토마토의 포장 디자인 의뢰는 안 받겠는데?”
“그런 쪽으로는 의뢰를 받아준 적이 없습니다.”
최종훈이 활력 토마토를 하나 챙긴 후에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만나서 잘 설득해 보자.”
***
채연서는 어제 촬영장에서 먹은 활력 토마토가 생각났다.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