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보물 상자
촬영이 재개됐다.
이번에는 바위나 암초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아예 해변 안쪽에 자리를 잡고 통에 담긴 물을 뿌려대면서 찍었다.
피디는 일부러 그런 과장된 장면을 만들어 넣었다. 그는 그 영상을 이용해 조금 전 사고가 해프닝처럼 보이게 편집할 계획이다.
그 위치까지는 물이 잘 들어오지 않아 조개가 잡히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구하니에게는 바닷물은 한 방울 날아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에게는 생수를 살짝 뿌려 촉촉하게 젖은 모습을 표현했다.
다른 출연진들은 대우가 달랐다. 특히 배우 김승빈과 아이돌 가수 홍은성은 바가지로 바닷물을 맞으며 찍었다.
김승빈이 선우현 쪽을 슬쩍 보며 불평했다.
“저기 저놈 말이야. 아까 구하니만 구해주고 우리는 물에 빠지게 놔뒀어.”
홍은성이 슬쩍 편을 들었다.
“우리도 구해주셨잖아. 밧줄을 안 던져주셨으면 우리는 그냥 바다로 쓸려나갔을 거야.”
“미리 피하라고 경고를 해줬으면 우리가 바다에 빠졌겠냐고.”
“경고하면 우리가 듣기는 했을까?”
그때는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김승빈이 말을 돌렸다.
“하여간 기분 나빠. 저놈 분명히 구하니를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나를 밀어내려고 경고 안 한 거라고.”
홍은성이 한마디 했다.
“살려준 분한테 저놈은 좀 아니지 않냐?”
“난 그 밧줄 안 잡았다.”
“넌 그 밧줄을 잡은 나를 잡았잖아.”
“어쨌든 저놈은 방해된다고.”
***
채연서는 오늘 이 촬영 현장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 현장을 찍으며 말했다.
“맛있는 토마토도 먹고, 잘생긴 연예인들이 물 맞는 것도 실컷 보고.”
그녀의 카메라가 옆으로 조금 돌아갔다. 선우현이 보였다.
“진짜 잘 왔다니까.”
그녀는 선우현을 보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스케치북을 꺼냈다.
“이번 디자인은 야성미와 인간미의 조화를 모티브로 해야지.”
***
김승빈이 조금 전에 바닷가에서 캐낸 가방은 방수처리가 된 특제품이었다. 가방에는 열쇠로 여는 잠금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피디가 가방을 보며 말했다.
“이건 유실물이니까 경찰에 넘겨야겠지?”
작가가 반대했다.
“우리가 열어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누가 잃어버린 걸 우리가 찾아준 거니까, 열어서 카메라 촬영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알맹이만 안 훔쳐가면 되잖아요.”
“그럴까? 그런데 저 잠금장치는 어떻게 열지?”
“자물쇠 따기 예능? 아무도 못 열면 잠금장치를 부수는 예능으로 한 번 더 가고요. 가방값은 나중에 방송국에서 물어주면 되니까.”
“그거 재미있겠네. 해적의 보물 상자 타이틀을 딱 붙여놓고 방송하는 거야.”
피디가 게스트들을 불러모았다.
“바닷물에서 조개 캐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해적이 숨겨둔 보물 상자를 찾았습니다.”
김승빈이 손을 번쩍 들었다.
“보물은 제가 찾았습니다!”
“승점 10점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 상자를 열어야겠지요? 자물쇠 따는 데 성공하는 사람에게도 10점 드리겠습니다.”
김승빈이 다시 손을 들었다.
“제가 딸 줄 압니다!”
“어? 의외네요? 그런 건 어디서 배웠습니까?”
“네? 어…. 호기심에 인터넷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자. 그럼 김승빈 씨부터 해봅시다.”
선우현은 예능이 진행되는 걸 보며 말했다.
“보물찾기라…. JHC 테크 연구소의 폐기 장비 적치장이 진짜 보물섬이던데.”
- 거기 있는 자원을 여기로 보내줄 우주왕복선만 있다면 말이죠.
“그나저나.”
선우현이 산을 슬쩍 보았다.
“다 내려왔지?”
- 곧 접근할 겁니다.
김승빈이 철사 두 개를 자물쇠의 구멍에 넣고 긁으며 설명했다.
“이게 그냥 긁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손끝의 감각으로 여는 거죠.”
디자이너 채연서는 원래는 촬영장 외곽에서 참관했다. 그러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안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그녀는 다른 출연자와 스태프들 사이에서 김승빈이 자물쇠를 따는 모습을 구경했다.
“잘 안 열리나 봐요?”
“이거 아무래도 특수 자물쇠인 것 같습니다.”
피디가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두 명쯤 더 해보고 공구 써서 자르자.”
갑자기 그들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누구 허락 맡고 촬영하는 겁니까?”
피디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 다섯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검은색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피디가 조연출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여기 장소 협찬 된 거 아녔어?”
“여기는 아무도 안 오는 곳이라서 그냥….”
“일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피디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섯 사람에게 말했다.
“하하하. 장소 협찬이라면 이미 다 받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압니다. 그래도 우리한테 인사는 하고 했어야지.”
“예?”
“그리고 그 가방은 우리가 여기 놔둔 겁니다. 이리 내놔요.”
피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만요. 장소 협찬이 되어 있다는 건 거짓말인데…. 당신들 누구야? 저 가방도 당신들 거 아니지?”
두목도 당황했다.
“젠장. 연예인들 앞에서 감독이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부하가 물었다.
“형님. 안 속는데 이제 어떻게 하죠?”
“두 번째 계획으로 가야지.”
두목이 사람들을 쓱 훑어보며 계산했다.
‘힘이 약한 여자가 제압하기 쉽지. 제일 유명한 연예인이 인질로서의 가치도 제일 높고.’
그가 부하들에게 작은 소리로 지시했다.
“너희 둘은 구하니를 잡아.”
“알겠습니다.”
그들이 여기 온 목적은 구하니가 아니다.
‘우리 물건도 확보해야지.’
“너희 둘은 가방을 빼앗아.”
“확실히 챙기겠습니다.”
두목이 양쪽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쳐라!”
그의 부하 중 둘은 구하니를 향해, 다른 둘은 가방을 향해 뛰었다.
두목도 칼을 꺼내 피디를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내가 감독을 잡으면….”
“케에엑!”
갑자기 옆에서 비명이 들렸다. 두목이 옆을 휙 돌아보았다.
구하니를 노리고 돌진하던 놈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구하니의 앞에서 선우현이 내질렀던 다리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 뭐야!”
구하니는 두 놈이 칼을 들고 덤비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옆에 선우현이 나타났다가 앞으로 툭 튀어나갔다.
선우현이 제일 먼저 덤빈 놈을 걷어찼다. 달려들던 놈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그 뒤에서 쫓아오던 놈이 주춤거리다가 다시 선우현 쪽으로 돌진하며 칼을 앞으로 쭉 뻗었다.
선우현도 앞으로 나가며 적의 팔을 덥석 잡았다.
구하니가 외쳤다.
“조심….
선우현이 적을 위로 집어 던졌다. 적은 위로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져 처박혔다.
“케에엑!”
선우현이 구하니를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구하니는 안유정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무장강도 몇 명쯤은 맨손으로 순식간에 쓸어버린다더니.”
한강공원 주차장에서 청부업자들을 때려잡던 모습은 흐릿한 영상으로 봤다.
“실제로 보니까.”
영상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눈앞에서 한 방에 한 놈씩 날아갔다.
“우현 씨는 진짜 강하구나.”
선우현이 말했다.
“이것들이 세 방향으로 갈라졌네.”
- 미리 요격하셨어야죠.
“내가 먼저 저놈들을 치면 정당방위가 아니잖아.”
- 언제부터 그런 걸 따지셨는데요?
“목격자가 많을 때만. 그래서 저놈들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지.”
- 잘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살아남겠죠.
김승빈은 가방의 자물쇠를 따다가 적의 습격을 받았다. 칼을 들고 달려드는 놈들을 본 김승빈이 겁을 먹고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그가 휘젓는 손에 옆에 있던 사람의 팔이 잡혔다. 그는 그 사람을 잡아당겨 앞으로 확 밀었다.
“까악!”
갑자기 앞으로 떠밀린 채연서는 달려들던 놈과 충돌해 그대로 붙잡혔다.
적은 한 놈이 더 있었다. 홍은성이 황급히 삽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 오지 마!”
김승빈은 그 틈에 바다 쪽으로 도망쳤다.
피디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뭐야!”
두목이 피디에게 쓱 다가가 칼을 들이댔다.
“조용히 해라.”
“으헉!”
두목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원은 촬영팀이 훨씬 더 많았다. 그의 패거리 다섯 명은 칼을 가지고 있지만, 촬영팀이 삼각대 같은 장비를 휘두르며 적극적으로 저항하면 제압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는 가방과 인질을 동시에 확보하려고 했다.
‘제일 높은 사람인 감독과 제일 유명한 구하니를 인질로 잡아야 해. 그래야 신고를 못 하게 막을 수 있어. 가방을 확보해서 빠져나갈 수도 있고.’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가 가방 쪽을 보았다. 부하 하나는 여자와 충돌했고 다른 하나는 삽을 들고 저항하는 놈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쪽은 상황이 유리해 보였다.
‘가방은 확보할 수 있고, 나도 감독은 잡았는데.’
구하니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그쪽으로 보낸 부하들이 당했다.
“젠장.”
선우현이 구하니의 앞에 서서 말했다.
“정당방위 조건 맞추려다 보니까 일이 좀 복잡해졌네.”
- 그러게 말입니다.
두목이 소리를 질렀다.
“넌 누구냐!”
“넌 몰라도 돼.”
두목이 피디의 가슴에 칼을 들이댔다.
“저 새끼 누구야!”
피디가 다급히 대답했다.
“저, 저 사람은 우리 스태프입니다!”
“그럼 당장 항복하라고 명령해!”
“그, 그런데 오늘만 일하는 알바라서 제 말을 잘 안 듣….”
“어쨌든 네 부하잖아!”
“그리고 저보다 구하니 씨랑 더 잘 아는 사이라서….”
“이 새끼가!”
선우현이 두목을 향해 손짓했다.
“야. 꺼져. 그러면 살려는 줄게.”
“뭐?”
“우리 쪽에 다친 사람이 없으니까 보내준다고. 꺼져.”
그럴 수가 없다. 두목의 눈이 가방을 향했다.
‘가방만 달라고 할까?’
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떠난 후에 촬영팀이 경찰에 신고하면 일이 어려워진다.
‘충분히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벌려면, 이놈들을 완전히 제압해야 해.’
그러려면 촬영팀의 손을 모두 묶거나 최소한 휴대폰이라도 다 빼앗아야 한다. 그런데 선우현이 순순히 묶여줄 것 같지 않았다.
두목이 피디에게 칼을 겨눈 채로 소리를 질렀다.
“닥쳐! 당장 항복해! 안 그러면 이 새끼 죽는다.”
선우현이 말했다.
“난 잘 모르는 사이야. 그러니까 인질의 가치가 좀 떨어지지? 항복은 좀 그러네?”
“뭐?”
“방금 내가 일일 알바라고 한 거 들었잖아. 그 피디는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
선우현이 구하니의 옆에 섰다.
“하니 씨랑은 잘 아는 사이지. 내가 누굴 지킬 거 같냐?”
“이, 이 새끼….”
피디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나도 좀 살려주면…..”
“살려줄 테니까 기다려요.”
“어, 어떻게?”
선우현이 두목에게 제안했다.
“야. 내가 인질이 될게.”
“뭐?”
선우현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두목에게 걸어갔다.
“나를 잡고 피디는 풀어줘.”
두목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놈 고수 같은데, 나 혼자 잡으려다가 거꾸로 내가 당하면?’
그가 대안을 찾았다.
“나 말고, 저기 내 부하들한테 가라!”
구하니를 노렸던 두 놈은 이미 기절했다. 다른 두 놈은 가방 근처에서 채연서를 붙잡고 홍은성과 대치하고 있었다.
선우현이 구하니에게 말했다.
“사람들 쪽으로 가 있어요.”
“저기, 조심….”
“나 알잖아요.”
“아. 그쵸. 실력 알죠.”
구하니가 얼른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선우현은 채연서와 홍은성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후에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묶어라.”
한 놈은 채연서의 몸에 칼을 들이댔다. 다른 놈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끈을 주워 선우현의 손을 단단히 묶었다.
선우현이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 뭐 하는 놈들이냐?”
“뒈지기 싫으면 닥쳐라.”
“이제 곧 너희가 뒈질 거 같은데.”
채연서를 붙잡고 있던 놈은 선우현의 손이 단단히 묶인 걸 확인하고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너 이 새끼. 칼침 맞고 싶어서 그렇게 건방….”
선우현이 갑자기 채연서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이동하며 적의 오른손을 발로 걷어찼다. 적의 손에 있던 칼이 손에서 튕겨 나와 위로 떠올랐다.
“으헉!”
선우현이 적에게 더 다가가며 발차기를 날렸다. 발끝에 적의 턱이 걸렸다.
“켁!”
적이 짧은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위로 날아간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선우현이 묶인 손으로 그 칼을 잡았다가 빙글 돌렸다. 칼날이 손목을 묶은 끈을 깔끔하게 잘랐다.
선우현이 두 손을 가볍게 흔들어 끈 조각을 떨어뜨리며 채연서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네? 네!”
“다행이네요. 내 뒤에 있어요.”
“네!”
선우현이 홍은성과 대치하고 있는 놈에게 물었다.
“너 말이야. 이제 인질도 없는데 혼자서 우리와 싸우면 너만 뒈지겠는데?”
홍은성이 얼른 삽을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이야아압! 내가 바로 우리 중 하나다!”
두목도 소리를 질렀다.
“씨발! 야! 가방 가져와! 너! 그놈 건드리면 이 감독 새끼 죽여버린다!”
피디가 겁을 집어먹고 외쳤다.
“보, 보내줘요! 제발 보내줘!”
선우현이 말했다.
“피디님. 두 놈이나 피디님 옆으로 가면 구출하기 어려워집니다만? 이놈은 여기서 처리하죠?”
“내가 당장 죽게 생겼잖아!”
“뭐, 본인이 원한다면야.”
선우현이 말했다.
“야. 가라.”
하나 남은 놈이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리며 가방을 들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좌우로 휘저으며 두목을 향해 뛰어갔다.
두목이 부하에게 외쳤다.
“여기 감독 잡고 있어!”
“예!”
두목이 부하에게 감독을 넘기고 가방을 받았다. 그는 가방의 잠금장치에 열쇠를 집어넣고 돌렸다.
가방이 철컥 열렸다. 가방 안에는 하얀 가루가 담긴 비닐 팩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비닐 팩 사이에 권총도 한 자루 놓여있었다.
두목의 눈이 번뜩였다.
“있다!”
그가 권총을 들고 일어서며 웃었다.
“으하하하! 이제 됐다! 이 새끼들아! 다 꿇어!”
선우현이 불평했다.
“아. 저놈도 총이 있네. 다들 총이 있는데 나만 총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