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바다
일부러 도로를 피해 산을 넘던 다섯 명이 불평했다.
“여긴 왜 길이 없어?”
“길은 저 아래에 있지. 저 도로에는 집도 있고 주차된 차의 블랙박스도 있고 다 있지. 목격자가 많다고.”
그들은 그래서 이 산을 넘고 있다. 해안가의 산은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거기는 진짜 괜찮을까?”
“당연하지. 거긴 이 계절에는 아무도 안 와. 조개 조금 말고는 나오는 게 없거든.”
그들은 산을 넘어 해안가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어? 형님? 저거….”
두목도 당황했다.
“뭐야? 저 새끼들 뭐야?”
그들의 목적지인 바닷가 좁은 공간에서 방송국 예능팀이 촬영 중이었다.
“저기는 해수욕장도 아닌데 뭐야?”
예능 제작팀도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그곳을 촬영지로 골랐다. 이 시기에 그곳에는 섬 주민도 오지 않는다.
두목이 인상을 구기며 부하 탓을 했다.
“야. 저기가 제일 안전한 곳이라며? 왜 사람이 있어?”
“저, 저럴 리가 없는데 이상합니다.”
“어? 형님. 저것들이 바닷가를 호미랑 삽으로 파는데요?”
제작진은 연예인들이 조개를 캐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위치였다.
“형님. 우리 물건이 저기 묻혀있는데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
우두머리가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물건 못 찾고 철수하면 놔두는데, 물건 나오면 쳐야지.”
“하지만 방송하는 놈들을 치면 뒷감당이….”
“그게 경찰한테 넘어가면 우리는 어차피 끝장이야.”
***
구하니는 바닷가 낮은 바위지대에 서 있었다. 게스트 연예인들은 바닷가에서 조개를 캤다.
김수선이 보고했다.
- 산에 있는 사람들은 촬영 현장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거 애매하게 수상하네.”
- 바다의 상태도 수상합니다.
“그래서 여기를 떠나 산으로 가기도 그러네.”
촬영 중간에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구하니는 피디와 작가가 챙겼다.
배우 김승빈이 선우현에게 다가왔다. 아이돌 가수 홍은성은 눈치를 살짝 보며 뒤따라왔다.
김승빈이 선우현에게 캔커피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마셔요.”
그건 매니저가 스태프들에게 돌리고 남은 것이었다. 그가 커피를 주며 물었다.
“아까 구하니 씨하고 이야기하던데, 어떤 사이입니까?”
레드 포션을 써서 살려준 사이다. 그걸 알려줄 수는 없다.
“전에 구하니 씨 매니저를 하루 봐준 적이 있습니다.”
김승빈은 구하니가 1인 기획사를 차렸다는 걸 안다. 원래는 몰랐는데 조금 전에 검색해보고 알았다.
‘예전 기획사에서 했단 이야기인가? 하지만 톱스타의 매니저를 할 정도의 경력자가 여기서 스태프 땜빵 알바를 할 리가 없는데?’
김승빈이 손뼉을 쳤다.
“아하! 운전! 로드를 잠깐 하셨구나.”
“틀린 말은 아닌데….”
그날 오토바이에 구하니를 태우고 달리긴 했다.
김승빈이 활짝 웃으며 선심 쓰듯이 제안했다.
“연락처 줘봐요. 다른 촬영장에도 빈자리가 생기면 내가 꽂아줄 테니까.”
그는 그 대가로 바라는 게 있었다.
“대신에, 구하니 씨에 대해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선우현이 말했다.
“직접 물어보든가.”
“뭐? 직접 물어볼 거면 내가 왜 당신한테….”
홍은성이 옆에서 김승빈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가자. 다음 촬영 준비해야지.”
“아직 시간 있잖아.”
“가자니까.”
홍은성이 김승빈을 끌고 걸어가며 말했다.
“구하니 선배님한테 나쁜 소리라도 전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로드 잠깐 하다가 스태프 알바로 전전하는 주제에 감히 그러려고. 이 바닥에서 일하기 싫대?”
“네 빽이 세겠냐? 선배님 빽이 세겠냐?”
“야.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야.”
김승빈이 뒤를 힐끗 보았다.
“내가 보기엔 저놈도 구하니한테 관심 있다. 어디 감히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봐?”
“너한테는 만만한 나무고?”
“내 얼굴이면 되지 않겠어?”
“예선 1차전이나 겨우 통과하겠지. 예선은 아마 3차전까지 있을 거다. 그 후에 본선도 있을 거고.”
“뭘 그 정도까지”
“너보다 훨씬 잘나가는 배우나 가수들이 구하니 선배님한테 들이댔다가 까였다는 소문 한두 번 들어본 게 아니야.”
김승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좀 다르지. 우리 집 부자다.”
그는 중견기업 사장의 아들이다.
“좋겠다. 근데 선배님도 돈 많아. 히트곡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급이 맞는 사람끼리 잘해봐야지. 저런 로드 출신 알바가 아니라.”
아이돌 가수 홍은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야. 나한테 불똥 안 튀게 해라.”
두 사람은 함부로 떠들며 바닷가로 걸어갔다. 대화하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아서, 그 거리면 선우현의 위치에서는 중얼거리는 소리 정도나 들려야 한다.
그런데 선우현이 쓰는 인이어 무전기에는 마이크가 달려 있다. 그 마이크는 선우현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주변 소음도 수집한다.
지원위성의 컴퓨터는 대부분 고장 났지만, 아직 작동하는 것도 있다.
두 사람의 대화와 주변 소음이 인이어 무전기로 수집돼 팔찌형 통신 중계기를 통해 위성으로 전송됐다.
위성의 컴퓨터가 그 소리에서 목소리만 분리한 후 증폭했다.
김수선이 두 사람의 대화를 선우현에게 들려주면서 말했다.
- 저것들이 껄끄러워서 선체 제어 컴퓨터의 리소스를 음성 분리 쪽으로 조금 돌렸습니다.
선우현이 말했다.
“저놈들 또라이네.”
- 거기엔 또라이가 너무 많습니다.
“겨우 두 놈인데 많다고 할 것까지야.”
대답이 없었다.
“수선아? 저 두 놈 이야기지? 나는 아니지? 그렇지?”
***
구하니는 촬영이 시작됐는데도 손에 토마토를 하나 들고 있었다.
피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토마토는 뭐야?”
작가도 궁금했다.
“몰라요.”
구하니가 활력 토마토를 들고 있는 건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채연서가 호시탐탐 그 토마토를 노렸다. 게다가 여기는 막내 작가 안유정도 있다. 이걸 남겨두고 촬영에 들어가면 둘 중 한 명이 먹어버릴까 봐 가져왔다.
피디가 말했다.
“토마토가 모양과 때깔이 참 좋네. 들고 있으니까 그림도 괜찮아. 일을 제대로 안 하면 저 토마토를 던져서 괴롭힐 것 같잖아.”
“그런 그림을 원하면 채찍이 낫지 않아요?”
“구하니한테 채찍을 들려서 방송에 내보내면 난 그날로 잘려. 그건 너무 간 거니까 토마토로 하자고.”
그 바닷가에는 낮은 암석 지대가 있었다. 암석 지대의 바위에 조개류가 제법 붙어 있었다.
구하니는 낮고 평평한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배경으로 삼은 바다와 구하니의 모습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김승빈과 홍은성은 그녀의 근처에 접근해서 바위에 붙어 있는 조개를 땄다.
선우현이 구하니를 보며 말했다.
“그림이 잘 나오긴 해. 역시 얼굴이 중요한가?”
- 바다 덕분입니다.
구하니는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네킹처럼 서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출연자들과 대화는 계속 주고받았다.
김승빈이 말했다.
“구하니 씨. 제가 조개도 많이 따고 게도 잡아서 해물탕을 대접하겠습니다.”
“그 속도로 따면 얼마나 따겠어요? 라면에 넣기도 부족하겠는데요?”
“예?”
“어머. 일하는데 손이 보이네요?”
그녀는 아예 여왕님 콘셉트를 잡고 김승빈과 홍은성을 집중적으로 굴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 두 명이 근처에 있는 데다가 먼저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대답하다가 그렇게 된 것뿐이다.
하지만 촬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구하니가 두 사람만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피디가 그 모습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청순한 줄 알았던 프린세스 구하니가 알고 보니 여왕님? 이 그림 참 좋다.”
구하니가 홍은성의 앞쪽으로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거기! 거기 뭐가 움직였어요! 문어예요? 문어구나?”
“으아악! 문어가 내 팔에 붙었습니다!”
“놓치지 마! 잡아!”
“살려주세요!”
“안 죽어!”
그렇게 외치는 그녀의 뒤로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피디는 뿌듯했다.
“크으. 오늘 영상 정말 기가 막힌다.”
***
바닷가 낮은 산에 숨어서 촬영 현상을 보던 사람들이 말했다.
“형님. 저것들이 암초 쪽으로 옮겨서 촬영하는데요?”
“휴우. 다행이다. 저러면 우리 물건은 괜찮겠어.”
“이대로 계속 기다립니까?”
“기다려야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
선우현이 구하니를 보며 말했다.
“수선아. 구하니 씨는 잘하고 있는데, 저 파도가 너무 좋으니까 느낌이 싸하다. 우리 저런 바다 가끔 봤잖아.”
- 제가 보기에도 저 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찜찜하네. 지원위성 카메라를 저 바다에 고정해.”
위성의 관측 카메라 중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건 이제 하나뿐이다. 그래서 한 지역만 고정해서 보면 다른 곳은 볼 수 없다.
- 알겠습니다.
지원위성에 남아 있는 컴퓨터에는 탐사대 주변의 자연환경을 분석해 위험을 찾아내는 기능이 있다.
문제는 에너지다. 평소에는 저전력 모드로 돌아가는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높이려면 에너지를 더 공급해야 한다.
“선체의 에너지를 컴퓨터의 지상 환경 분석 기능에 몰아줘. 카모플라쥬 시스템과 카메라, 통신 외에는 다 중단시켜.”
- 전환했습니다.
“분석 결과 나오면 말해주고.”
잠시 후에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 위험도가 높은 파도가 해안가로 가고 있습니다.
“어쩐지 느낌이 싸하더라니. 어느 정도야?”
- 30초 후에 구하니가 휘말릴 겁니다. 바다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선우현이 촬영 현장으로 성큼 들어가며 말했다.
“야. 그런 건 미리 말해줬어야지.”
그가 구하니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피디는 좋은 그림에 만족하며 촬영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컷! 컷! 컷! 저거 뭐야! 저 사람 왜 현장에 뛰어들어!”
선우현이 구하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서 나갑시다.”
“네? 지금 촬영 중이에요. 뭔지 몰라도 이따가….”
- 선장님. 대형 파도의 충돌까지 10초 남았습니다.
선우현이 구하니의 팔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어맛!”
구하니가 바위 위에서 안 끌려가려고 버텼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 5초!
하지만 힘으로 선우현을 이길 수는 없다. 그는 구하니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번쩍 들고 바위지대를 벗어났다.
피디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뭐야! 끌어….”
갑자기 구하니가 서 있던 바위를 커다란 파도가 덮쳤다. 하얀 물보라가 그녀가 서 있던 바위보다 몇 미터나 더 높게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막대한 양의 바닷물이 바위를 뒤덮었다가 그 위에 있던 방송용 소품들을 바다 쪽으로 쓸어갔다.
바닷물이 쓸고 지나간 바위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피디는 경악했다.
“어? 어? 구, 구하니 씨는….”
옆에서 작가가 외쳤다.
“저쪽에요!”
선우현과 구하니는 파도가 덮친 곳을 살짝 벗어나 있었다. 파도가 조금 튀어 그녀의 머리와 옷을 적시긴 했지만, 위험하진 않았다.
피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구하니 씨도 살고 나도 살았어.”
조연출이 옆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 피디님! 저기!”
“또 왜!”
피디가 구하니가 있던 바위의 옆쪽을 보았다.
바위에 붙어서 조개를 따던 김승빈과 홍은성은 선우현이 구하니를 안고 가는 걸 보았다.
김은성이 먼저 말했다.
“저 새끼 내가 저럴 줄 알았다. 당장 가서 한 대 치고 날 어필….”
“어? 어? 어!”
“야. 왜 그러…. 어?”
거대한 파도가 바위를 덮치고 물건을 다 쓸어갈 때, 상당량의 물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밀려왔다. 마치 계곡의 격류처럼 거세게 흐르는 바닷물이 그들을 덮쳤다.
“으아악!”
“사람 살려!”
당황한 피디가 그쪽으로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다들 가서 구해야지 왜 보고만 있어!”
선우현이 물었다.
“수선아. 저 두 놈도 파도에 휩쓸린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 까먹었습니다.
“그래. 까먹을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