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산과 바다
채연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 구하니 씨랑 아는 분이셨어요?”
선우현이 아니라 구하니가 대답했다.
“네. 좀 알아요. 그런데 선우현 씨랑은 어떤 사이세요?”
“아까 주차장에서 넘어질 뻔한 걸 잡아주셨어요.”
“그게 다예요?”
“그럼요. 이름도 지금 처음 들었는데요.”
“아. 그렇구나. 반가워요. 처음 뵙는데 성함이?”
“채연서예요. 연예인은 아니고 촬영 참관하러 왔어요.”
구하니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채연서 디자이너?”
“어머. 저를 아세요?”
“당연하죠. 직접 뵙는 건 처음이지만요.”
선우현이 물었다.
“하니 씨는 여기 왜 왔습니까?”
“지나가다가 들렀다니까요.”
“여기는 섬입니다만?”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면 육지죠.”
“시간이 많나 봅니다.”
“많아요. 요즘은 공연 스케줄을 무리해서 잡지 않거든요.”
그녀는 일 년 전에 사고로 목을 다친 후로 건강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지금은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다시는 목이 상했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돈은 충분히 있다. 아직 1인 기획사라서 먹여 살려야 할 직원도 없다. 그래서 스케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덕분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시간이 남으면 혼자 놀지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녀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유명 제빵 카페에서 산 빵과 커피가 들어 있었다.
“오다가 보여서 그냥 샀는데 좀 드세요.”
선우현이 종이가방을 열어보고 활짝 웃었다. 그는 칼로리바만 먹고 생존한 기간이 워낙 길어서 음식 선물에 약하다.
“사람이 일을 많이 했으면 쉬어주고 그래야지. 잘 왔어요. 여기 앉아요.”
선우현이 옆에 있는 간이 의자를 권했다. 구하니가 그 자리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런데 그 옆 빈자리에 채연서가 앉았다.
“어머. 저기 여기 빵 좋아하는데.”
대놓고 그렇게 나오는데 쫓아낼 만큼 구하니는 독하지 않았다.
“채연서 씨도 같이 먹어요.”
선우현이 먼저 빵을 하나 먹었다. 맛있었다.
“음. 딜리셔스.”
채연서가 말했다.
“어머. 발음 좋다. 외국 생활 오래 하셨나 보다.”
“영상으로 봤습니다.”
선우현은 아주 오래전부터 탐사대 지원위성의 카메라로 지상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현지 협조자가 있을 때는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선우현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 활력 토마토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간식으로 먹으려고 가져온 거였다.
선우현이 토마토 세 개가 들어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빵이랑 같이 먹어봐요.”
구하니가 쟁반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토마토를 자를 칼도 없었다.
그녀가 머리를 굴렸다.
‘그래. 이슬만 마실 것 같은 청순한 연예인이 사생활에선 털털한 모습을 보여주면 반전 매력이 있겠지.’
그녀가 비닐봉지에서 토마토를 하나 꺼내 옷에 쓱쓱 닦은 후에 입술을 대고 깨물었다.
‘이렇게 거리감을 없애….’
입안에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과즙이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얼른 토마토를 씹었다.
맛있었다. 단맛이 진하게 나는데도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채연서도 옆에서 토마토를 먹으며 탄성을 질렀다.
“이런 토마토는 처음이야!”
그냥 맛만 있는 게 아니었다.
채연서는 디자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 섬을 찾아왔다. 여기서 연예인들이 구르는 걸 보며 새로운 자극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던 새로운 자극이 이 토마토에서 느껴졌다.
“진짜 맛있어요!”
그녀는 맛있는 건 빨리 먹는 타입인데도 활력 토마토는 조금씩 아껴먹었다. 그만큼 맛있었다.
“오늘 여기 오기로 한 어제의 나. 진짜 잘했어.”
***
비서 김찬혁이 활력 토마토를 잔뜩 따서 최종운에게 가져갔다.
최종훈이 물었다.
“먹고 싶었겠다?”
“하나 먹었는데요?”
“어?”
“선우현 씨가 심심하면 먹으라고 해서요.”
“아니, 아깝게….”
“사장님?”
“농담이야. 선우현 씨가 너도 좀 챙겨주라고 해서 하나 주려고 했는데 이미 먹었구나.”
“여자친구 주게 그 하나도 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친구가 생각났으면 네가 먹을 걸 양보하지 그랬냐?”
“어….”
최종훈이 피식 웃으며 토마토를 하나 주었다.
“가져가.”
“아싸아. 감사합니다! 사장님은 두 개를 가져가시네요?”
“난 동생 것도 챙겨야지.”
그들은 토마토 세 개는 따로 빼놓았다. 나머지는 기존 고객에게 팔거나 새 고객에게 홍보용으로 돌려야 한다.
“활력 토마토 디자인 의뢰 건은 어떻게 됐어?”
김찬혁이 즉시 명단을 보여주었다.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찾아놨습니다.”
“그중에 최고는?”
“당연히 채연서입니다. 요즘 제일 핫한 디자이너니까요. 그런데 섭외가 안 될 겁니다.”
“우리 회사 정도면 미팅은 할 수 있잖아.”
“미팅 약속은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품 디자이너 채연서한테 토마토 포장지와 상자 디자인을 의뢰하면 하겠다고 할까요?”
“안 하겠지?”
“할 리가 없습니다.”
***
채연서는 활력 토마토를 아껴 먹었다.
“진짜 맛있다.”
구하니도 감탄하며 물었다.
“선우현 씨. 이 토마토 어디서 샀어요?”
채연서가 급히 물었다.
“맞아요! 어디서 샀어요? 이거 매일 먹어야겠어요. 아침에도 먹고, 샐러드에도 넣어서 먹고, 주스도 만들어 먹고! 다이어트에도 좋겠다!”
“파는 거 아닙니다. 직접 키웠습니다.”
구하니는 당황했다.
“네? 농사도 지으세요?”
“농사라고 할 규모는 아니고, 그냥 옥상에서 화분에 취미 삼아 조금 키웁니다.”
“아니, 무슨 옥상에서 이런 맛있는 토마토를…. 농사 천재세요?”
선우현이 씩 웃었다.
“그런 소리 자주 들었습니다. 그거 먹고 모자라면 이것도 먹어요.”
선우현은 오늘 토마토를 세 개 가져왔다. 구하니와 채연서가 하나씩 먹고 있다. 남은 건 하나뿐이다.
구하니가 갑자기 토마토를 입에 밀어 넣었다.
채연서는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서둘러 먹었지만, 한발 늦었다.
구하니가 토마토를 입에 밀어 넣은 후에 다른 하나를 냉큼 잡았다. 채연서가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비닐봉지만 잡혔다.
채연서가 구하니를 보았다. 그녀는 양쪽 볼이 햄스터처럼 볼록해진 상태였다.
채연서가 불평했다.
“아니, 무슨 연예인이 그렇게 막 먹어요?”
“뇸뇸.”
“다 먹고 말해요.”
구하니는 토마토를 천천히 씹었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는 토마토를 손수건으로 감싸 소유권 표시를 확실히 했다.
그녀가 입에 있는 토마토를 다 먹은 후에 말했다.
“나는 배우가 아니라 가수니까 막 먹어도 괜찮아요.”
“아니, 구하니 씨 별명이 프린세스인 건 외모도 영향이 있을 텐데….”
구하니가 선우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우현 씨는 진짜로 스태프 알바를 하러 왔네요?”
그러겠다는 이야기는 저번에 만났을 때 들었다.
“생활비는 벌어야죠.”
“이 토마토만 본격적으로 재배해서 팔아도 돈을 훨씬 많이 벌 것 같은데….”
“그거 한정판 소량 생산이라서.”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그리고 한 개에 백만 원짜리죠. 방금 삼백만 원을 그 여자들한테 먹이셨습니다.
구하니가 눈을 반짝이며 선우현에게 제안했다.
“그럼 스태프는 그만두고 제 매니저 하시는 건 어때요? 제가 월급 많이 드릴게요.”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매니저 월급 받아서 우주왕복선을 어떻게 사겠습니까? 단칼에 거절하십시오.
선우현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연히 안 합니다.”
“또 거절하시네요. 그래도 가끔, 급할 때 알바로 하는 매니저는 괜찮죠?”
“딱히….”
“업계 최고 대우를 약속할게요.”
채연서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오늘 선우현을 처음 만났다. 선우현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장비를 옮기는 걸 보고 힘이 센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땜빵으로 온 보조 스태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연출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그렇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왜 톱스타 구하니가 매니저 자리를 제안하지? 아니, 이건 제안이 아니라 부탁하는 느낌인데….’
채연서가 구하니가 사 온 빵을 씹으며 생각했다.
‘스태프가 본업이 아닌가? 근데 저 토마토 이 빵이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더 먹고 싶다.’
작가와 피디가 대본 수정을 마치고 다가왔다.
피디가 선우현을 슬쩍 보며 말했다.
“구하니 씨. 여기 계셨군요. 그런데 그분은….”
“아는 분인데 우연히 만났어요.”
조연출이 옆에서 설명했다.
“막내 작가가 소개한 임시 스태프입니다.”
“아아.”
작가가 방금 수정해 현장에서 급히 출력한 대본을 내밀었다. 대사 하나하나 지정해주는 대본이 아니라 역할과 큰 줄기만 설정된 것이라 두께는 얇았다.
“대본은 참고만 하고 가서 여왕님, 아니, 프린세스가 되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잘 편집할게요.”
그녀가 발을 보았다.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바닷가로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신발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장화와 운동화가 준비되어 있어요. 맘대로 고르시면 돼요. 호호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현에게 말했다.
“같이 하실래요?”
피디가 얼른 제안했다.
“바닷가에서 조개 캐는 자리 하나 더 만들까요?”
선우현이 물었다.
“여기 이 일은 그럼 누가 합니까? 난 짐 옮기러 온 건데요.”
“어…. 우리 조연출?”
조연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우현이 말했다.
“방송 촬영을 구경하는 건 좋아하는데 찍히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구하니가 출연자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게스트로 온 아이돌 가수 홍은성이 구하니에게 달려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홍은성입니다!”
“제가 선배예요?”
“네? 네! 에이투원 홍은성입니다!”
“아! 반가워요.”
“영광입니다! 선배님!”
홍은성은 구하니의 뒤에서 걸어오는 선우현과 채연서를 발견했다.
‘어? 아까 그 건방진 스태프?’
그는 아까 선우현을 불러 채연서의 짐을 대신 옮기라고 시켰다. 선우현은 거절했다. 채연서가 끼어들어 시비는 붙지 않았다.
‘난 연예인이니까 스태프에게 그 정도는 시켜도 되는 거잖아.’
그는 평소에 다른 곳에서 하던 대로 선우현에게 지시했다.
“거기 아저씨. 의자 좀 가져와 봐요. 구하니 선배님이 앉으시게.”
선우현이 말했다.
“역시 바다에 던져버릴까?”
- 선장님. 지금은 참으세요. 목격자가 너무 많습니다.
구하니가 말했다.
“어머. 우리 선우현 씨는 누가 이래라저래라 시켜도 되는 분이 아닌데.”
홍은성은 당황했다.
“예? 우, 우리요?”
“그러다 혼나요.”
“그, 그게….”
구하니는 선우현이 무장강도들을 맨손으로 박살 낸 고수라는 걸 안다.
“걱정돼서 해주는 이야기예요. 조심해요.”
진짜로 홍은성이 걱정돼서 해주는 이야기였다.
“예? 예!”
수정된 대본은 출연자들에게도 전달됐다.
오늘 이 방송의 원래 게스트 중에는 배우 김승빈이 있었다.
김승빈은 구하니가 탐났다.
‘톱스타랑 사귀면 배역 따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그렇다고 무작정 찾아가서 사귀자고 할 수는 없었다. 구하니는 그가 초면에 들이대도 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김승빈이 말했다.
“구하니 꼬시고 싶다.”
여기서 배우는 김승빈 혼자다. 그는 이곳에 있는 남자 중에 그가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홍은성은 구하니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멘탈이 털린 채로 돌아왔다. 그는 김승빈의 말을 듣고 말했다.
“구하니 선배님이 너랑 사귀어줄 급이냐? 포기해라.”
김승빈은 잘생긴 얼굴로 여자를 많이 꼬셔봤다. 성공률도 높고 여자친구도 여러 명 있다.
그런데 상대는 평소에 잘생긴 사람을 많이 보는 연예인이다. 게다가 톱스타다. 김승빈의 얼굴이 안 통할 수도 있다.
“내가 구하니를 꼬시면 네 방송 스케줄도 잡아줄게.”
“시끄러워. 나 지금 멘탈 나간 거 안 보이냐?”
“왜 나갔는데?”
“쪽팔리니까 묻지 마라.”
김승빈이 선우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저 사람 때문이야? 스태프인 줄 알았는데, 혹시 가수 출신이야?”
연예인도 돈을 벌어야 먹고 산다. 돈이 없고 행사도 안 잡히면 다른 일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스태프 일을 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다.
홍은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몰라. 건드리면 다친다고 경고한 거 보면 가까운 사이겠지. 근데 이미 건드린 거 같은데 어떻게 하지?”
김승빈이 자기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선우현을 보았다.
‘취향이 저런 쪽인가? 구하니가 눈이 낮네? 그럼 가능하겠는데?’
***
피디가 게스트들에게 말했다.
“자. 다시 바다에 가서 조개를 캡시다.”
김승빈이 손을 들었다.
“제가 구하니 씨와 같이 캐고 싶습니다.”
‘힘들 때 옆에서 슬쩍 도와주면 꼬시기 쉬워지지.’
피디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구하니 씨는 여러분이 조개를 잘 캐나 감시만 할 겁니다.”
“예? 같이 일하는 게 아니라요? 설마 톱스타 특별대우인 건 아니죠?”
“당연히 특별대우입니다만?”
***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우현은 구하니 덕분에 촬영 현장 바로 앞에서 구경할 수 있게 됐다.
“왜? 이번에는 서윤 씨라도 오냐?”
- 다섯 명이 그 해변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섬 주민이겠지.”
- 도로가 아니라 산을 타고 오고 있습니다.
선우현이 산을 쓱 보았다. 높이는 낮은데 숲이 울창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길도 없는 코스로 이동하는 건 이상하긴 하네. 가서 왜 산을 넘는지 물어나 볼까?”
- 지금 산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바다 쪽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응? 해적선은 없다더니?”
- 바다 자체가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