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약장수
최종훈은 곧바로 선우현을 찾아갔다.
“이야아. 토마토가 잔뜩 익었네요. 어제 다 땄는데 어떻게 벌써 이렇게…. 선우현 씨는 농사의 신입니까?”
“거름 주고 물 주고, 영양제 조금 주니까 저렇게 크네요.”
최종훈은 선우현이 하는 일은 어떤 놀라운 일이나 신기한 현상이라 해도 다 받아들인다.
“그 식물 영양제는 역시 대단합니다. 그건 제조 비법이 비밀이니 굳이 특허 등록을 할 필요는 없겠군요.”
“특허요?”
최종훈이 자랑했다.
“선우현 씨가 주신 나사 관련 기술 문서에 있는 모든 것을 특허 출원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작업 중입니다.”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우리 나사 제조법으로 특허를 낼 수 있나 봅니다.
“그러게. 이미 개발된 기술이면 헛수고만 한 게 될 뻔했는데, 다행이지.”
- 탐사대용 정찰드론 제작 기술에 딸려 온 건데, 운이 좋았습니다.
정작 그 정찰드론은 아직도 연구소 사무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선우현이 최종훈에게 물었다.
“그럼 나사 제조 기술은 바로 파는 겁니까?”
최종훈은 멈칫했다.
‘연구소에서는 그 문서에 소형 부품 제작 이론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굳이 나사 제조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건….’
나사 제조법은 문서에 상세히 적혀 있다.
하지만 그 기반이 되는 이론은 아직 분석 중이다.
기술 문서에 적힌 내용만으로도 특허는 출원할 수 있다. 나사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 기술을 나사가 아닌 다른 소형 부품 제작에 사용하려면, 먼저 기반 이론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양산할 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연구소에서 아직도 분석하는 중이다.
‘일단 나사 양산 기술부터 팔아서 우리 회사의 능력을 보여달란 거구나.’
최종훈이 결론을 내리고 큰소리쳤다.
“나사 기술, 제가 책임지고 빨리 팔겠습니다.”
그는 소리부터 쳐놓고 나서 특허 이야기를 마저 했다.
“특허 말입니다. 국제특허까지 낼 건데, 선우현 씨의 이름으로 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됩니다. 그게 뭐 비밀도 아니고.”
“아! 이름은 비밀이 아니군요? 그럼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 선장님. 그냥 막 지르시네요?
“지구연합 이름으로 할 수는 없잖아.”
최종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특허 신청할 때 참고하게, 그 기술의 기반이 된 이론에 관해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연구원들이 관심이 많습니다.”
“어? 그거 혹시….”
최종훈이 태블릿에 문서 파일을 띄워 보여주었다.
“여기 이 부분 말입니다.”
- 선장님도 이해를 못 해서 기술 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은 부분이군요.
“수선아. 이해 못 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 현지 협력자가 그걸 콕 집어서 묻는데, 어쩌시게요?
“그야 당연히.”
선우현이 최종훈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 맞습니다. 우리는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현지 협력자의 회사에서 알아서 이해해야 합니다.
최종훈은 확신했다.
‘역시 우리 회사의 연구 능력을 증명하라는 거구나!’
“사실 연구소에서 이미 열심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원들에게 큰소리 좀 쳐볼까 하고 개인적으로 물어본 겁니다. 하, 하하.”
선우현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시구나. 하, 하하.”
***
최종훈이 JHC 테크 연구소로 찾아갔다.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연구소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장 이백현이 물었다.
“사장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이 소장. 물어볼 시간에 특허부터 빨리 출원해. 일단 나사 양산 기술이라도 팔아야 해.”
특허는 출원 후에 정식으로 등록될 때까지의 기간이 길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중에 유사한 특허로 분쟁이 발생하면 먼저 특허를 출원한 사람이 이긴다. 출원만 먼저 하면 팔 방법이 있다.
이번 일을 처음부터 맡은 팀장이 물었다.
“사장님. 그럼 혹시 그 기술의 기반 이론에 대한 추가 자료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예?”
“자료는 그게 다니까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특허 출원은 특허팀에 맡기고 연구팀은 어서 연구하세요. 초과근무수당은 확실하게 줄 테니까.”
***
안유정이 임시 작가로 들어간 예능 방송의 오늘 촬영지는 서해안의 섬이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내륙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방송용 차량이 들어가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선우현이 임시 주차장을 보며 뿌듯해했다.
“역시 밥차도 들어왔어. 드디어 저 맛을 보겠네.”
전화가 걸려왔다. 최종훈의 비서 김찬혁이었다.
“여보세요.”
- 선우현 씨. 활력 토마토 받으러 왔는데요. 옥상이 잠겨 있습니다.
“비번 보내줄 테니까 토마토는 알아서 따 가시죠.”
- 예? 그래도 됩니까?
“비번이야 바꾸면 되니까요.”
- 알겠습니다.
채연서가 섬의 임시 주차장으로 차를 몰면서 말했다.
“촬영하는 모습만 구경하다가 때 되면 갈 거야.”
- 너도 참 별나다. 이번 명품 디자인하고 그 예능이 무슨 상관인데? 인기 예능도 아니던데.
채연서는 디자이너다.
“일단 콘셉트가 맞아. 그리고 경치 좋은 섬에서 잘생긴 연예인들이 구르는 걸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 같아서.”
- 길성 비서실에 부탁해서 촬영 참관하는 거니까 사고 치지 말고.
길성은 이 예능 방송의 중요 협찬사다.
- 거기서 사고 치면 길성의 제품 디자인이라도 하나 해줘야 한다?
“내가 뭐 맨날 사고만 치나?”
- 응. 너 맨날 사고만 쳐. 네 디자인 실력이 업계 탑이 아니었으면 벌써 굶어 죽었을 거야.
“아. 나 도착했어. 끊어.”
채연서가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에 내렸다. 그런데 그녀가 차의 뒤쪽으로 걸어가다가 하이힐에 돌이 걸렸다.
그녀의 몸이 옆으로 휙 넘어갔다.
“악!”
통화하며 옆을 지나가던 선우현이 팔을 뻗었다. 넘어지던 채연서가 선우현의 팔에 반쯤 안겼다. 당황한 그녀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아?”
선우현이 그녀의 몸을 바로 세워주었다.
“다치실 거 같아서.”
“아! 어머! 고맙습니다!”
선우현이 그녀의 하이힐을 보았다.
“이 섬에서는 운동화를 신는 게 좋을 텐데.”
오늘 방송의 게스트인 아이돌 가수 홍은성이 그녀를 발견하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혹시 오늘 게스트?”
“아니요. 참관인으로 방문한 채연서입니다. 홍은성 씨.”
그녀는 오늘 게스트 명단을 오기 전에 받아봤다. 그래서 홍은성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홍은성이 활짝 웃었다.
“하하하. 역시 나는 얼굴이 명함이라니까. 아. 짐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홍은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전화통화 중인 선우현이 보였다.
홍은성이 선우현을 향해 손짓했다.
“거기 아저씨. 여기 와서 이분 짐 좀 옮겨요.”
김찬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 선우현 씨. 조금 전에는 여자 비명이 들리더니, 방금은 묘하게 티꺼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설마 또 어딘가를 쓸어버리고 계신 건….
“그런 거 아닙니다. 토마토는 입이 심심하면 하나 드시죠.”
- 헉! 감사합니다!
선우현이 전화를 끊었다.
김수선이 말했다.
- 활력 토마토를 두 개 따먹지는 않는지 제가 한 번씩 확인하겠습니다.
“회사 설립부터 이후 일까지 다 처리해주고 있는데 두 개쯤이야 괜찮잖아.”
- 옥탑방 냉장고에 있는 치킨을 먹어버려도 괜찮겠군요.
“옥탑방 문 따고 들어가진 않는지 잘 감시해라.”
선우현이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홍은성이 다시 불렀다.
“이봐요. 아저씨. 짐 좀 옮기라니까.”
“그걸 왜 나한테 시키지?”
“뭐? 그야 스태프니까….”
채연서가 얼른 끼어들었다.
“제 가방은 제가 들게요.”
그녀가 카메라와 스케치북이 들어 있는 가방을 가지고 피디가 있는 쪽으로 갔다. 홍은성이 선우현을 한 번 째려본 후에 그녀를 따라갔다.
선우현이 말했다.
“저건 뭔데 나한테 짐을 옮기라고 하지? 내가 여기 짐 옮기러 온 사람이야? 오늘 파도가 꽤 센데, 저놈 수영은 할 줄 알까?”
- 저기, 선장님.
“왜?”
- 거기서 장비를 옮기는 게 오늘 선장님의 일인데요?
“응? 아. 그렇지. 그래도 개인 짐까지는 아니지.”
- 어쨌든 한 번 봐주시죠?
“그러려고 했어. 내가 겨우 이 정도로 사람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그러진 않아.”
- 그럼요. 알지요. 어서 일하시죠?
예능 촬영은 섬에 있는 좁은 해변에서 진행됐다.
선우현은 일일 보조 스태프로 참여했다.
조연출은 선우현이 장비를 옮기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와. 저 사람 누구야? 힘이 장난 아니네.”
안유정이 자랑했다.
“제가 어렵게 모셔왔어요.”
“땜빵 알바를 뭐 모셔왔다고 할 것까지야.”
“어머. 저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니다. 알면 다치니까 그냥 넘어가요.”
“실없기는.”
한 시간쯤 후에 김수선이 물었다.
- 그런데 선장님. 예능 촬영을 현장에서 구경하려고 그 섬에 가신 거 아닙니까?
“실수다. 다른 일을 받았어야 했어.”
연예인들이 해변에서 조개를 캐고 카메라가 그걸 찍고 있었다. 촬영 스태프들도 그쪽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선우현은 맡은 일이 달라서 촬영 중에는 현장에 가까이 갈 일이 없었다.
선우현이 불평했다.
“이러면 위성 궤도에서 망원카메라로 보던 거랑 차이가 없잖아.”
- 선장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선우현이 바다를 돌아보았다.
“왜? 해적이냐?”
- 반경 10km 해상에서는 해적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 구하니의 차를 발견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
피디는 오늘의 게스트들이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는 장면을 찍다가 촬영을 중단했다.
피디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아닌데. 파도는 센데 그림이 너무 밋밋해.”
메인 작가가 말했다.
“게스트가 약해서 그래요. 아이돌 홍은성으로 어떻게 그림이 제대로 나오겠어요?”
“그러게. 우리는 왜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를 게스트로 섭외하지 못했을까?”
“스타가 우리 방송에 왜 나와요? 우리가 인기 예능도 아닌데.”
“나도 알아. 그러면 좋겠다는 거지.”
툴툴대는 두 사람에게 조연출이 다가왔다.
“피디님. 큰일 났습니다.”
“어? 왜? 누가 다쳤어? 그러게 조심하랬더니!”
“구하니 씨가….”
피티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헉! 톱스타가 다쳤단 말이야? 난 망했다. 우리 방송은 이제 끝장…. 잠깐.”
피디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구하니 씨는 우리 게스트가 아니잖아. 여기 없잖아.”
“그게 아니라 구하니 씨가 우리 촬영장에 왔습니다.”
피디는 깜짝 놀랐다.
“어? 여기를? 왜?”
“새로 투입된 막내 작가랑 아는 사이인데,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자, 잡아!”
“예?”
피디가 해변을 보며 외쳤다.
“지금 이 밋밋한 그림을 바꿀 프린세스가 오셨다! 우리 방송이 살려면 잡아야 해! 구하니 씨 어디 있어!”
***
피디는 구하니에게 달려가 출연을 제안했다.
구하니가 말했다.
“그러려고 온 거 아니에요. 유정이가 있다길래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 들른 거예요. 얼굴이나 보려고요.”
막내 작가 안유정이 작게 쫑알거렸다.
“여기는 섬인데 근처를 왜 지나가…. 아흑.”
구하니가 안유정의 옆구리를 쿡 찔러 입을 다물게 했다.
피디가 말했다.
“그건 압니다만, 이렇게 오셨으니 잠깐만 출연하시는 것도…. 아. 소속사와는 제가 협의하겠습니다.”
“협의할 필요 없어요. 이제는 1인 소속사라 제가 다 결정해요.”
“이야아. 그럼 더 잘됐….”
“제가 예전에 큰 사고를 당했던 일이 있고, 그 후에도 사건 사고가 좀 있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위험한 일은 피하는 편이에요.”
“아. 일 년 전 그 사고…. 그래도 여기는 우리만 있는데 뭐가 위험하겠습니까? 하하하.
구하니가 선우현이 있는 곳을 슬쩍 보았다.
“그러네요. 여긴 안전하겠네요.”
그녀가 긍정적인 말을 하자마자 작가가 얼른 끼어들었다.
“하나도 안 위험한 역할이 있어요. 출연자들이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면서 구르는 걸 도도하게 지켜보는 역할이에요.”
“음…. 구경만 해도 돼요?”
“당연하죠! 물론 말을 좀 해주시면 더 좋고요. 티끌조차 묻지 않는 고결한 프린세스 느낌으로요.”
“말로 갈구라는 거죠?”
“아니, 갈구라는 게….”
피디가 얼른 말했다.
“갈구셔도 됩니다! 아예 여왕님 이미지로 갈까요? 훗. 나를 위해서 더 일하거라. 같은 대사라도 쳐주시면 더 좋습니다! 그러면 시청률 대박 나겠네요.”
“순진한 프린세스로 할게요.”
“그거로 가죠! 정 작가! 대본 수정하자!”
이 예능은 굳이 대사 하나하나를 대본에서 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경쟁을 어떻게 할지 순서를 정하고 역할 분담을 하는 대본은 있다. 그걸 조금 고쳐야 한다.
대본이 수정될 때까지 휴식시간이 추가로 생겼다.
채연서가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선우현에게 다가와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주차장에서는 고마웠어요. 하마터면 흙바닥에 구를 뻔했잖아요.”
“이 음료수는….”
“목마르실까 봐요.”
이곳에는 자판기가 없다. 매점도 없다. 그런데 음료수 캔이 시원했다.
“아까 이 음료수 두 박스를 내가 아이스박스에 옮겨놨는데.”
이 음료수는 촬영팀이라면 누구나 마실 수 있다. 그녀가 그걸 두 개 들고 와서 선심을 썼다.
“어머. 다 아시는구나. 호, 호호.”
선우현이 피식 웃으며 음료수 캔을 받아 따개를 따고 꿀꺽 마셨다.
“크으. 역시 이 맛이지.”
“진짜 맛있게 드신다. 광고 찍으면 잘하시겠다.”
김수선이 갑자기 경고했다.
- 구미호가 접근 중입니다.
“응? 그 전설은 옛날에 네가 지상에 뭘 좀 보냈다가 사고 쳐서 생긴 거잖아.”
- 제가 친 사고가 어디 그동안 선장님이 친 수많은 사고만 하겠습니까? 구하니가 접근 중입니다.
구하니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선우현 씨.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는데 여기서 보네요?”
- 선장님. 구하니가 약을 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