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결혼식 파티 II
박서윤은 오늘 이곳에서 선우현을 볼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선우현부터 만나 왜 여기서 일하는지 물어볼 수는 없다.
그녀는 지금 이 결혼 파티에 박길성 대신에 참석했다. 먼저 박길성이 아는 사람들을 만나 안부를 전해야 한다.
그게 비서실 소속인 그녀가 오늘 해야 하는 일이다.
박서윤은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오늘 만나야 하는 사람 중 몇 명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그들의 얼굴은 물론이고 신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인사를 하면 그중 어떤 사람은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 하지만 예전에 봤는데도 못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혹시 박 회장님의 따님….”
“길성 비서실 박서윤 대리입니다.”
“아아! 누군가 했습니다. 전에 봤지요. 아니, 그런데, 분위기가…. 참 많이 바뀌었군요.”
박서윤이 박길성의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니는 동안 그녀가 누구인지가 사람들에게 알렸다.
“길성 비서실에 근무한대.”
“당연히 배우인 줄 알았는데 반전이네.”
선우현은 주방에서 음식을 가져와 배치하는 일을 맡았다. 혼자서 그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고정석 테이블이 있는 쪽은 전담 서빙 직원들이 있었다.
선우현은 한쪽에 차려진 뷔페의 음식 담당이었다.
그쪽에도 음식을 세팅하는 호텔 정식 직원이 몇 명 있었다. 일일 알바 몇 명이 그 직원들의 보조를 맡았다.
선우현은 접시째로 교체만 하면 되는 음식을 담당했다.
박서윤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박길성의 안부를 전했다. 그녀는 그 일을 마친 후에 뷔페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그녀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녀는 선우현부터 찾았다. 하지만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디 계시지?’
그녀는 오늘 여기서 실컷 먹을 생각에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 오자마자 부지런히 돌아다녔더니 배가 많이 고팠다.
그녀가 선우현을 찾으며 작은 접시에 담긴 핑거푸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얇은 햄과 조그마한 빵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었다.
‘맛있다.’
햄은 기름지고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있었다. 빵은 부드러웠다.
‘소시지빵보다 맛있어.’
그녀가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요리로 손을 뻗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선우현이 바로 근처에 와서 음식 접시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른 선우현에게 다가왔다.
“선우현 씨.”
선우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가 날 부르나 했더니 박서윤 씨구나.”
“저를… 알아보시네요?”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스타일리스트가 백화점에서 풀세트로 고른 것이다.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헤어스타일도 바뀌었다. 화장도 샵에서 정식으로 메이크업을 했다.
그러고 나니 평소와 분위기까지 달라졌다. 그녀를 전에 봤는데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 선우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았다. 그가 말했다.
“에이. 어떻게 못 알아봅니까?”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그럼요. 예쁜 얼굴은 참 잘 기억하시죠.
“그런 거 아니라니까.”
박서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우현 씨가 왜 여기서 이 일을 하세요?”
“알바를 왜 하겠어요?”
“네? 알바요?”
“돈 벌려고 하지.”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현 씨는….”
선우현이 키우는 활력 토마토 하나의 가격이 백만 원이다. 그나마도 물량이 없어서 박길성 회장이 직접 찾아가 일주일에 두 개씩이라도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파티의 하루 알바비가 그 토마토만큼 나올 리가 없다.
박서윤은 선우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선우현 씨에 대한 건 남에게 소문내지 말라고 했지.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니까.’
그날 옥상에 같이 있었던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이 박길성에게 따로 연락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박길성은 최종훈의 부탁을 듣기 전부터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선우현을 만나러 갈 때 기사가 아니라 비서실장에게 운전을 시켰다.
선우현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긴 한데 난 일하러 가야 해서.”
“네? 아! 네!”
선우현이 작은 음식 접시들을 쟁반에 담은 후에 주방 쪽 출입구로 향했다. 그녀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회장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시겠다.”
***
선우현은 주방으로 접시를 가져갔다. 그런 후에 새로운 요리가 담긴 접시를 다시 쟁반에 담았다.
“음식이 남아있는데도 메뉴를 바꾸는 건 파는 사람 마음이니까 그렇다 쳐. 손도 안 댄 건데 왜 먹으면 안 되냐고. 이걸 진짜 다 버릴 거냐고.”
- 미련을 버리시죠.
“알바 끝나면 나도 실컷 사 먹을 거다.”
- 처음부터 그러시지 그러셨습니까?
“너 나 놀리냐?”
- 선장님은 지상에 계시니까 사 먹을 수 있으시네요. 저는 아닌데.
“더 놀려도 돼.”
선우현이 작은 접시 여러 개가 담긴 쟁반을 들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주방에서 파티장으로 가는 복도에 젊은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선우현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이.”
선우현은 어이가 없었다.
“어이?”
그 남자가 물었다.
“너 길성 비서실 그 아가씨하고 무슨 사이냐?”
옆에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됐고, 너 그 아가씨랑 아는 사이지? 오늘 밤에 우리 노는 곳으로 데려와라.”
그 남자가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흔들며 말한다.
“이거 받아. 데려만 오면 이거 열 배를 줄게.”
선우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이 일 하지 말걸.”
- 사서 고생이시네요.
선우현이 한숨을 쉰 걸 본 남자가 히죽거렸다.
“야. 우리가 뭐 이상한 거 하려는 거 아니야. 마음에 들어서 같이 놀자는 거야. 조용한 바에서 아주 건전하게 술만 마시면서 말이야.”
선우현이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직접 말해라.”
“다른 놈들도 그 아가씨한테 관심을 가진 거 같아서, 우리가 지름길로 가려고 하는 거지. 네가 바로 우리 지름길…. 잠깐.”
남자가 얼굴을 구겼다.
“너 지금 감히 나한테 반말한 거냐?”
가만히 있던 마지막 놈이 인상을 썼다.
“이 알바 새끼가. 너 우리 말 안 들으면 여기서 잘라버린다. 내가 이 호텔 VIP야. 알바 하나 자르는 건 전화 한 통이면 돼.”
선우현이 세 놈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어디서 개가 짖나.”
“이 새끼가!”
한 놈이 선우현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그 손이 닿기도 전에 선우현이 상대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남자의 몸이 옆으로 휙 자빠졌다. 선우현을 때리려던 손바닥은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바닥에 요란하게 자빠진 놈이 비명을 질렀다.
“케엑!”
그 옆에 있던 놈이 선우현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선우현이 빨랐다. 주먹이 오기도 전에 상대의 배를 발로 밀어 찼다.
발에 차인 놈이 뒤로 크게 나자빠졌다.
“악!”
선우현을 알바 자리에서 잘라버린다고 했던 놈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는 두 주먹을 앞으로 들고 스탭을 밟으며 말했다.
“이 새끼. 주먹 좀 쓰냐? 그래도 나한테는 안돼. 나 복싱 대회에 나간 사람이야!”
“메달은 못 땄나 보다?”
선우현이 그놈을 무시하고 파티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러려면 복도를 막고 있는 그놈을 치우고 지나가야 한다.
스탭을 밟던 놈은 선우현이 다가오자 재빨리 좌우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선우현이 왼손에 든 쟁반을 공중에 살짝 띄우며 상체를 좌우로 조금 움직였다. 주먹 두 방이 허공을 갈랐다.
선우현이 오른손을 위로 슬쩍 올렸다. 가볍게 쥔 주먹 끝에 상대의 턱이 툭 걸렸다.
“켁!”
상대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선우현이 공중에 살짝 띄웠던 쟁반을 손으로 받았다. 쟁반 위의 작은 접시들은 하나도 쏟아지지 않았다.
선우현이 세 놈을 뒤에 놔두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맞고 제일 먼저 자빠진 놈이 말했다.
“저 새끼 뭐야!”
발에 차여 넘어진 놈이 몸을 일으키며 욕을 했다.
“저 새끼 내가 가만 안 둔다. 누군지 알아내서 밟아버릴 거야!”
턱을 맞고 주저앉은 놈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어? 이 새끼 눈 돌아갔는데?”
“야! 야! 정신 차려!”
주저앉아있던 놈의 돌아갔던 눈이 갑자기 돌아왔다. 동시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왜 앉아 있어?”
“네가 알지 우리가 알겠냐!”
“마, 맞아! 그 새끼! 어디 갔어? 그 새끼 죽여버릴 거야!”
선우현은 파티장으로 돌아와 음식을 교체했다.
“이 결혼식 왜 안 끝나냐.”
신랑 신부가 있는 곳으로 대형 케이크가 이동했다. 그런데 케이크와 함께 토마토 하나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케이크를 자르는 칼과 토마토를 자르는 과일칼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신랑과 신부가 과일칼을 같이 잡고 토마토를 반으로 잘랐다.
선우현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저게 왜 여기서 나오나?”
- 왜 그러십니까?
“우리 토마토가 피로연에 나왔다.”
-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많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요?
“토마토 한 개를 신랑 신부가 반씩 나눠 먹으려나 보다.
- 한 개라면 말이 되지요. 우리 현지 협력자가 팔았나 봅니다.
***
최종훈이 말했다.
“호산정밀 최 사장님은 이미 활력 토마토 맛을 봤잖아?”
비서 김찬혁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박 회장님 다음으로 홍보한 분이니까요.”
“오늘이 최 사장님 아들 결혼식이야. 그래서 하나만 더 팔아달라고 부탁하길래, 내가 통 크게 두 개 팔았다.”
“결혼선물인가요?”
“당연히 아니지. 거기 오늘 기업가가 몇 명이 오는 줄 알아? 홍보용이야.”
“아. 그래서 최 사장님한테 먼저 활력 토마토를 홍보한 거군요? 오늘 결혼식을 노리고요.”
“당연하지. 하나는 신랑 신부가 같이 먹을 거야.”
“그럼 나머지 하나는요?”
“다른 하나는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최 사장님과 가까운 몇 분에게 한 조각씩 맛만 보여주기로 했다.”
“예? 기왕 홍보용으로 쓸 거면 한 사람당 하나씩 먹을 수 있게 보내시지 왜 그러셨어요?”
“활력 토마토가 그렇게 많냐?”
“아니요. 이거 엄청 귀하죠.”
***
신랑과 신부는 활력 토마토를 반으로 잘랐다.
신부는 왜 이 토마토를 이렇게 특별 취급하는지 몰랐다.
‘집안에 토마토와 관계된 사연이라도 있나?’
그 의문은 맛을 보자마자 풀렸다. 그녀는 토마토 반 개를 살짝 깨물었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오빠! 이거 진짜 맛있어!”
신랑은 활력 토마토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먹어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그가 토마토를 먹으며 자랑했다.
“이거 아버지가 우리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거야. 이게 몸에 그렇게 좋…. 와아. 진짜 맛있는데?”
신부가 어느새 토마토 반 개를 다 먹어치우고 나서 물었다.
“몸에도 좋아?”
신랑 아버지가 쓱 다가와 자랑했다.
“오늘 일정이 많아 피곤할 텐데, 그거 먹으면 피로가 싹 가실 거다.”
신랑이 말했다.
“아버지. 이렇게 나눠 먹지 말고 각자 하나씩 먹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것도 최종훈 사장한테 너 결혼 핑계로 부탁해서 겨우 구한 거야.”
“두 개 받으셨잖아요.”
“네 결혼식을 축하하러 와주신 손님들도 맛은 보셔야지.”
***
방송국 예능 막내 작가 안유정은 신랑과 신부가 토마토를 먹고 나서 호들갑을 떠느라 케이크를 자를 생각조차 안 하는 걸 보았다.
안유정이 궁금해했다.
“토마토를 뭐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구하니가 말했다.
“친환경 유기농인가 보다.”
“그리고 왜 하나를 둘이서 나눠 먹을까? 무슨 특별한 의식인가?”
“저 집안에 사연이 있는 거겠지.”
“사연이면…. 왜 복숭아가 아니라 토마토지?”
안유정이 챙겨온 음식 중에도 토마토가 있었다. 얇게 썰어 치즈와 함께 작은 접시에 놓인 토마토 요리였다.
안유정이 그 토마토를 먹어보았다.
“맛은 평범한데….”
구하니도 토마토를 먹으면서, 쟁반에 새 요리 접시들을 담아 걸어가는 선우현을 보았다.
그가 아는 선우현은 무술 고수이면서 신비한 면이 많은 사람이다.
“선우현 씨는 왜 여기서 일하는 걸까?”
안유정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결혼식에 스파이가 침입했나? 그래서 그놈 잡으러 왔나? 아니면 테러리스트? 뭐지? 폭탄인가?”
그녀가 신부를 보았다.
“저 언니 도대체 누구랑 결혼한 거야?”
구하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현 씨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