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결혼식 파티
박길성이 회장실에서 박서윤에게 말했다.
“내일 나 대신에 결혼식 파티에 참석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하는데….”
박서윤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동네 할인 행사장에서 팔던 것이다.
박길성이 말했다.
“백화점에 들러서 옷을 사야겠어.”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내 체면이 있는데 평상복으로 갈 수 있나.”
박서윤은 납득했다. 내일 결혼식 참석은 비서실 업무의 일부다.
문제는 그녀가 옷에 쓸 수 있는 돈이다.
‘백화점 옷은 비싼데, 할부로 사야 하려나….’
박길성이 말했다.
“회사 일로 가는 거니까 비용은 청구해.”
“네? 아, 네.”
“백화점에서 옷은 자주 샀나?”
“아니요. 한 번도….”
박길성은 멈칫했다.
“허…. 한 번도? 단 한 번도?”
“예.”
박길성이 한숨을 가볍게 쉰 후에 즉시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김 실장. 박서윤 대리가 내일 나 대신에 호산정밀 최 사장 아들 결혼식에 갈 건데, 그냥 보내면 되겠어?”
“안 됩니다. 회장님의 체면이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로 세팅할까요?”
“최고로.”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붙이겠습니다.”
“역시 김 실장은 내 마음을 잘 알아.”
***
박서윤은 백화점에 들러 옷을 샀다. 그녀가 고른 게 아니라 회사에서 붙여준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구두까지 세팅해주었다.
그녀는 가격표를 보고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너무 비싸요.”
스타일리스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정도도 안 사면 본사 비서실장님이 우리 사장님한테 불평하실 거예요. 아니다. 이거 회장님 지시라면서요. 그럼 저 잘려요.”
스타일리스트는 길성의 계열사 소속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박서윤은 반값인 다른 옷을 골라 타협을 시도했다.
“알았어요. 그럼 저걸로….”
“무조건 이거. 이건 완전 박 대리님을 위해서 나온 옷이니까요. 다른 건 절대로 안 돼요.”
***
선우현은 이튿날 파티 알바를 위해 종로 파라파크 호텔로 갔다.
“오늘 여기 요리 내가 다 먹을 거다.”
김수선이 말했다.
- 기왕 간 거, 저녁까지 미리 먹고 오시죠.
파티 담당 매니저가 알바 직원들에게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파티에 제공되는 음식은 회수된 후라 해도 절대로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는 직원은 그 자리에서 해고입니다. 설마 그럴 사람은 없겠지만, 손님들이 보는 곳에서 그러면 손해배상 청구까지 들어갈 겁니다.”
선우현은 당황했다. 그가 물었다.
“손님들이 손도 대지 않고 돌아온 건 먹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호텔 평판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일이라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선우현이 작게 투덜댔다.
“수선아. 너 혹시 이런 거 알고 있었냐?”
-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기서 건물 내부가 보이는 것도 아닌데요.
“야외 파티는 많이 봤잖아. 위성에서 칼로리바 먹으면서 눈으로라도 즐기려고 말이야. 분명히 남은 음식 먹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 선장님. 설마 20세기 초에 본 것 이야기는 아니시죠?
“더 오래전에도 봤다고.”
- 고대에는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는 게 당연했죠. 그때는 식량이 부족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안 되나 봅니다.
“이러면 내가 굳이 이 알바를 하는 이유가 없잖아.”
- 그렇다고 그 알바를 때려치우면 당장 새 알바를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이미 일 시작했으니 일당이나 받으시죠.
“알아. 이 일은 오늘만 할 거야.”
***
가수 구하니가 형사를 만났다.
그 형사는 한강공원에서 그녀의 차에 수작을 부리던 청부업자들이 잡힌 사건을 담당했다.
형사가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여주었다.
“현장 근처에 있던 블랙박스에는 찍힌 게 없더군요. 좀 멀리서 찍힌 영상 하나를 겨우 확보했는데, 혹시 구하니 씨가 아는 사람인가 해서 가져왔습니다.”
구하니가 영상을 가만히 보았다.
영상은 흐릿해서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체형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영상 속에서 그 남자가 청부업자들을 때려잡는 모습도 나왔다. 구하니는 싸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누군지 깨달았다.
‘선우현 씨?’
선우현은 그녀가 도로에서 트럭에 습격당했을 때 그녀를 구해주고 일일 매니저도 해주었다.
‘선우현 씨는 혼자서 무장강도 다섯 명을 때려잡을 정도로 무술 고수라던데.’
그 이야기는 방송국 예능 막내 작가 안유정이 해줬다.
형사는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 걸 보고 물었다.
“혹시 아는 분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요. 얼굴이 이렇게 흐릿한데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영상을 너무 확대해서 흐리게 보이는 겁니다만, 확실히 이걸 보고 알아보긴 어렵겠군요.”
형사도 그 사람을 꼭 찾아야 해서 구하니를 만난 건 아니다. 범인은 구하니를 노린 놈들이지 그들을 잡고 사고를 막은 사람이 아니다.
형사가 오늘 여기 온 건 이 핑계로 구하니를 한 번 더 보려는 팬심 때문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구하니의 팬이었다.
그런데 그는 구하니의 표정이 살짝 변한 걸 놓치지 않았다.
‘누군지 눈치챈 것 같은데….’
선우현을 체포하면 처벌해야 할 수도 있다. 잡힌 청부업자들이 많이 다쳤기 때문이다. 청부업자 중에는 골절이 아닌 놈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구하니 씨를 조사할 수도 없고.’
피해자인 구하니를 조사했다가 기사라도 뜨면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다. 굳이 사서 고생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형사가 결론을 내렸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굳이 그런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긴 뭐. 범인도 아닌데 이 사람을 열심히 찾을 필요는 없죠. 하하하.”
구하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렇죠?”
형사는 확신했다.
‘진짜 누군지 아는구나.’
“물론이죠. 그냥 자료가 나와서 여쭤본 겁니다. 아. 혹시….”
형사가 종이와 펜을 꺼냈다.
“괜찮으시면 사인을 해주실 수 있….”
그녀가 가방에서 랩핑이 된 상태인 CD를 꺼냈다.
요즘은 CD 플레이어가 없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녀의 팬 중에는 CD 소장을 원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음반을 CD로도 만들었다. 대신에 물량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그녀가 케이스의 비닐을 뜯고 CD를 꺼내며 물었다.
“물론이죠. CD 위에 직접 해줄게요. 누구 이름으로 해드릴까요? 사모님이나 자녀분?”
형사가 활짝 웃었다.
“제 이름을 적어주십시오! 저 총각입니다. 하하하.”
***
스타일리스트는 오늘은 아침 일찍 박서윤을 찾아와 청담동 헤어샵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설명했다.
“여기는 연예인들도 다니는 곳이에요. 헤어스타일부터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세팅해주거든요.”
원장이 직접 그들을 맞았다. 그녀가 박서윤을 보며 스타일리스트에게 물었다.
“자기네 회사 이제 배우 쪽도 진출해? 배우 잘 뽑았네.”
“에이. 원장님. 아니에요. 이분은 본사 비서실에 계신 분이세요.”
원장은 당황했다.
“아니, 이런 분이 왜 배우를 안 하고 회사에 다녀? 손님. 연기 한 번 배워보실래요? 제가 정말 잘 가르치는 연기학원을 아는데.”
“아뇨. 회사 일이 바빠서요.”
***
박서윤은 메이크업까지 정식으로 받고 스타일리스트와 헤어졌다. 이제 파라파크 호텔로 가야 한다.
박서윤은 차는 없고 운전면허만 있다.
운전은 비서실에 들어간 후에 배웠다. 길성의 모든 비서실 직원은 차량으로 임원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운전을 배우는 데 필요한 비용은 회사에서 나왔다.
그녀는 회사 차를 몰고 종로 파라파크 호텔로 갔다. 발렛 파킹이나 그 호텔의 구조 등은 임원을 수행할 때 경험해봐서 익숙했다.
그녀가 결혼식 파티장으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가 신랑 측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박길성 회장님께서 직접 참석하시려고 했습니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호산정밀 최 사장은 당황했다.
“어? 어? 그래요? 박 회장님을 꼭 뵙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혹시 따님? 아니지. 박 회장님은 따님이 없는데?”
“비서실 박서윤 대리입니다.”
“어?”
최 사장은 길성 회장실을 방문했을 때 박서윤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큰 차이가 있었다.
“아…. 자세히 보니까 알겠군.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허, 허허.”
박서윤이 준비된 인사를 몇 마디 더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 사장의 아내가 물었다.
“누구예요?”
“길성 최고의 미녀라는 비서실 직원인데, 그 평가가 과소평가된 거였네. 세상에….”
“아들 결혼식인데 표정 관리 좀 하죠?”
“어? 어. 아니야.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원래 미녀이긴 한데, 전에 봤을 때는 저렇게 귀티가 흐르진 않았거든. 그래서 못 알아볼 뻔했어.”
결혼식은 파티 형식으로 진행됐다.
한쪽에는 차분히 앉아서 직원들이 서빙한 음식으로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들이 있었다.
다른 쪽에는 뷔페 형식으로 음식이 차려졌다. 그곳에서는 스탠딩 파티 형식으로 자유롭게 오가며 대화할 수 있었다.
호텔 행사장을 오늘 하루 대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박서윤은 뷔페 형식으로 차려진 요리들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맛있겠다.’
파티장 안에서 그녀를 본 하객 일부가 수군거렸다.
“누구야?”
“신부가 배우잖아. 당연히 동료 배우겠지.”
“그런데 왜 본 적이 없을까?”
“신인배우인가?”
“팬 하고 싶다.”
신부는 연예계에서 제법 알려진 배우다. 그래서 오늘 하객 중에는 기획사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데?”
“연습생?”
“그렇게 어려 보이진 않는데?”
“아니면 신인 배우?”
“일반인일 수도 있잖아. 가서 명함을 줘야겠어.”
다른 기획사 사람이 말렸다.
“참아. 지금 자리가 자리잖아. 여기서 영업하다 소란이라도 생기면 여러 사람한테 찍힌다.”
“다른 기획사한테 찍히더라도 이런 기회를….”
“그게 아니야. 여기 지금 기업체 사장님이 몇 명이 온 줄 알아? 광고주들한테 찍힌다고.”
“아….”
박서윤은 음식부터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건 박길성을 대신해서다. 식사 전에 박길성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대신 안부를 전해야 한다.
‘나중에 실컷 먹어야지.’
그녀가 기업가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 멈칫했다.
‘어?’
아는 사람이 보였다.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이다.
‘선우현 씨?’
선우현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기업가들이 있는 테이블 쪽은 전문 서빙 직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일일 알바인 선우현이 음식을 놓는 곳은 그녀가 있는 뷔페 쪽이었다.
그녀는 선우현의 정체를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박길성 회장이 선우현을 만나기 위해 옥탑방 옥상으로 찾아갔다는 건 안다.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이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도 봤다.
선우현이 옥상에서 키우는 토마토 하나의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도 안다. 그날 직접 수행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그녀가 선우현의 옷을 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이 파티장의 다른 직원들과 같은 하얀 유니폼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분이 도대체 왜 여기서?’
***
구하니는 일 년 전 사고로 목소리가 상했다가, 지난번 사고 후에 예전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냥 되찾은 것도 아니고 스무 살 때 목소리로 돌아갔다.
원래도 인기 가수였는데 목소리까지 좋아졌다. 인기는 당연히 되찾았다. 스케줄 요청도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그 요청을 대부분 거절했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목의 소중함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행사도 일부러 조금만 잡았다. 대신에 행사 하나하나를 공을 들여 진행했다.
그렇다고 평소에 노래를 전혀 안 하는 건 아니다. 행사 스케줄을 줄였더니 주변 사람과 어울릴 시간이 많아졌다. 그중에는 오늘처럼 친구의 결혼식도 있었다.
그녀는 오늘 이 결혼식 파티에서 친구를 위해 축가를 부르기로 했다.
결혼식에는 방송국 예능 막내 작가 안유정도 있었다. 구하니의 아는 동생인 안유정은 신부와도 아는 사이였다.
안유정이 뷔페로 차려진 요리를 부지런히 먹으며 말했다.
“저 언니가 시집을 가네.”
“그러게. 혼자 살 거라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남편이 큰 회사 사장 아들이래.”
“알아.”
“나도 시집가고 싶다.”
“애인부터 만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안유정이 툴툴댔다.
“나 좋다는 사람 많은…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 눈에 차는 사람이 없어.”
“어떤 사람을 원하는데?”
“음…. 혼자서 맨손으로 무장강도 네다섯은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지.”
“있지.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분명히 비밀 특수 임무를…. 어?”
안유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기 있다.”
“응?”
그녀가 뷔페코너에 음식을 내려놓는 남자를 가리켰다.
“저기 봐. 저기 있잖아.”
구하니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선우현 씨?”
그녀는 당황했다.
“선우현 씨가 왜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