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옥상
선우현이 말했다.
“다 예상대로군요.”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선장님. 뻔뻔하십니다.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은 감탄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러면 토마토의 활력 효과는 직접 만드신 식물 영양제 덕분에 생긴 거겠죠?”
“물론입니다. 그 영양제의 효과로 토마토가 맛도 더 좋아지고 먹으면 활력도 생기죠.”
“그 특별한 식물 영양제는 정말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선우현이 하늘을 슬쩍 보았다. 인공위성 궤도에 탐사대 지원위성이 떠 있다. 카모플라쥬 모듈 덕분에 보이지는 않는다.
식물 급속성장촉진제는 지원위성에서 만들었다. 원료도 위성에 있는 걸 썼다.
“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 선장님? ‘붉은 달이 뜰 때 그 달빛을 모아 만들었다’는 뻥은 21세기에는 안 먹힌다니까요.
“달빛의 정수?”
“예?”
- 그런 것도 이제 안 먹힌다고요.
***
오파츠 동호회 회원인 대학생 윤하늘은 유물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한다.
윤하늘이 오늘 방문한 곳에는 유럽에서 대여한 고대 유물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하늘과 같이 전시장에 놀러 간 친구가 유물 앞 표지판에 적혀 있는 설명을 읽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작은 병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붉은 성수가 들어 있었대. 그 성수는 붉은 달이 뜰 때 그 달빛을 모아 만들었다는데…. 빨간 소독약이라도 들어 있었나?”
윤하늘이 말했다.
“아. 그거 내가 아는 오파츠야. 그 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거든.”
“빨간 소독약이?”
“아니. 그 병. 그 병은 이천 년 전에 만들어진 건데, 깨진 유리 조각들을 수지로 붙여서 조립했어.”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면, 그때는 유리가 없었나?”
“있었지. 유리는 사오천 년 전부터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왜 오파츠야?”
“조립할 때 사용한 유리 조각 중에 반쯤은 이천 년 전 기술로 만든 게 맞는데, 나머지 반은 그 시대에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유리의 순도가 너무 높아.”
“그럼 그 유리는 어떻게 만든 건데?”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면 오파츠가 아니지.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기술이 들어갔으니까 오파츠지.”
친구가 그 전시물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아. 여기 그 이야기가 있다. 에이. 아니잖아. 우연이 겹쳐서 품질이 좋은 유리가 어쩌다 만들어졌을 거라는데?”
윤하늘이 장담했다.
“난 우연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놀라운 기술이 사용됐다고 믿는다. 이건 오파츠야.”
“하늘아. 알았으니까 다음 유물 보러 가자.”
“모르는 거 같은데?”
“좀 가자고.”
***
최종훈이 손뼉을 쳤다.
“아! 달빛의 정수!”
“믿으시는구나!”
“그러니까 정화수를 떠놓고 빈 후에 그 특별한 식물 영양제를 개발했다는 거지요?”
“어…. 그냥 농담한 겁니다.”
선우현은 이제 이 토마토에 활력 증가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몸에는 효과가 없지만.”
- 건물 관리인 신나리에게도 효과가 없습니다.
“걔는 평소에도 활력이 넘치는 애잖아. 그래서 먹어도 딱히 표가 안 난 거겠지.”
-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활력을 채워주긴 하지만 한계를 초과해서 도핑하는 건 아니라는 건데….”
선우현이 최종훈을 보며 말했다.
“가격은 얼마나 받아야 하려나….”
“파실 거군요!”
“생각 중입니다.”
최종훈은 선우현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제안했다.
“활력 토마토의 효능은 확실하지만, 생산량이 워낙 적잖습니까? 그러니까 일반 매장이 아니라 인맥을 통해서 파는 게 어떨까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인맥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귀중품이 되면, 구매 기회 자체가 가치를 가지겠군요.”
“바로 그거입니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계획에 도움이 되겠는데?”
- 당연합니다. 최고가로 파시죠!
“가격을 너무 비싸게 받으면 산 사람들은 대가를 충분히 지불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가치는 생기지 않아. 물량이 왜 없냐는 불평이나 안 생기면 다행이다.”
김수선은 즉시 생각을 바꾸었다.
- 선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차피 토마토를 팔아서는 우주왕복선을 못 삽니다.
“그렇다고 너무 싸게 팔면 귀한 줄을 모르겠지.”
- 얼마가 적당할까요?
“생각 중이야.”
그가 가격을 고민하는 사이에 최종훈에게 박길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최종훈이 옥상 한쪽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박 회장님. 제가 지금 중요한 미팅을 하고 있어서요. 나중에 전화 드리겠….”
- 최 사장! 나도 지금 엄청 급해!
“무슨 일이 또 터졌습니까?”
- 나 그 토마토 명인 좀 만나게 해줘!
“아니, 박 회장님. 그건 좀…. 아무나 만나는 분이 아니라서….”
- 내가 아무나야? 어?
“하지만….”
- 최 사장은 지금 내 상황 알지? 말이라도 좀 건네봐.
최종훈은 오늘 박길성의 부탁을 받고 친자확인검사를 처리해주었다.
‘이렇게 급하게 나온다는 건, 역시 박 회장님에게 딸이 생겼다는 건데….’
박길성에게는 이미 차기 회장 자리를 노리는 아들이 두 명 있다.
‘그래서 급해지셨군.’
“잠시만 기다리시죠. 지금 제가 그분과 상담을 하고 있어서요. 물어는 보겠습니다.”
- 뭐? 최 사장! 거기 어디야! 내가 지금 간….
최종훈이 전화를 끊고 선우현에게 다가왔다.
“저…. 선우현 씨.”
“바쁜 일 있으면 가시죠.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되니까.”
“그게 아니라…. 아까 말했다시피 제가 이 토마토를 주변 지인에게 홍보하고 있습니다.”
“홍보한 건 아직 한 명뿐이라면서요.”
“예. 길성의 박길성 회장님이죠. 그분이 활력 토마토를 재배한 분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선우현이 혀를 찼다.
“이 토마토를 판다 하더라도, 내가 직접 팔러 다니는 건 귀찮은데….”
“당연히 제가 맡아서 팔아야죠! 필요한 절차는 제가 전부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우현만 편해지는 게 아니다. 최종훈의 인맥 관리에도 도움이 많이 된다.
선우현이 물었다.
“그럼 굳이 길성의 회장님을 만날 필요가?”
“박 회장님은 저와 인연이 깊은 분이라서 말씀은 드렸…. 아닙니다! 바로 안 된다고 하겠습니다!”
김수선이 말했다.
- 길성은 그 납치 사건 피해자가 근무하는 회사입니다.
선우현도 안다. 오늘 그 회사의 본사 앞까지 가서 보안실 직원의 주머니에 납치범의 사진을 넣어주었다.
‘폭탄을 던져놨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네.’
선우현이 말했다.
“뭐, 만나봅시다. 한 번 보는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아! 고맙습니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어디든 오시겠다는데요.”
“여기로요.”
“예?”
“제가 가야 하나요? 찾아가면서까지 팔고 싶은 생각은 없….”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최종훈이 옥상에 있는 토마토 화분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비밀 연구소 비슷한 곳인 줄 알았습니다.”
“아아. 그거.”
“역시 비밀 연구소가 맞….”
“여기 월세입니다.”
“네?”
선우현이 설명했다.
“길성의 회장님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이사 가면 됩니다. 그런 후에는 길성 사람을 다시는 안 보면 되니까.”
“아…. 지금 바로 여기로 오시라고 하겠습니다.”
***
박길성이 탄 차가 옥탑방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운전기사가 아니라 비서실장이 운전했다. 조수석에는 박서윤이, 뒷좌석에는 박길성이 앉아 있었다.
회장의 외부 활동에 비서실 직원이 동행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래서 비서실 소속인 박서윤은 오늘 동행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종훈의 차도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비서 김찬혁이 대기하고 있다가 차에서 내린 박길성에게 인사했다.
“박길성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또 보는군.”
김찬혁이 인사를 한 후에 박서윤을 슬쩍 보았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눈이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갔다.
‘미모는 볼 때마다 미쳤네. 왜 배우를 안 하고 회사를 다니는 거야?’
박길성이 김찬혁을 불렀다.
“이봐. 박 사장네 김 비서.”
김찬혁이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네. 회장님.”
“어디 감이 우리 박서윤 대리를 넘봐?”
“예? 아, 아닙니다.”
“꿈도 꾸지 마.”
“저 여자친구 있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거 잘됐군.”
박길성이 건물 쪽으로 몸을 돌리다 일행들을 보았다. 박서윤과 비서실장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길성이 둘러댔다.
“아. 방금 그건 농담한 거야. 농담.”
김찬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네. 농담이 참 재미있습니다. 회장님.”
옥상으로 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비서실장이 말했다.
“회장님. 다리는….”
“오늘은 괜찮아. 활력이 넘치거든.”
“알겠습니다.”
박길성과 박서윤, 비서실장 세 사람이 계단을 올라갔다.
김찬혁이 한숨을 쉬었다.
“회장급 농담은 부장급보다 훨씬 더 춥구나.”
***
박길성이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옥상 한복판에 최종훈이 보였다.
박길성이 말했다.
“최 사장. 고마워.”
“저야 말만 전한 건데요.”
“그래도 고마워.”
비서실장이 옥상에 올라왔다. 마지막은 박서윤이었다.
그녀는 옥상에 올라가자마자 감탄했다. 언덕 위에 지어진 건물의 옥상이라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시원하다.’
그녀는 좁은 원룸에서 산다.
학교 다닐 때는 기숙사나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반지하 자취방에서 살았다. 그 반지하는 원룸보다 더 좁고 어두웠다.
그 전에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때는 개인 방이란 게 없었다.
그녀가 옥상에서 도시를 보았다. 이 옥상은 넓고 전망이 좋아서 마음에 들었다.
‘원룸 계약 기간이 다 됐는데, 다음에는 나도 이런 곳으로 옮길까? 옥탑방은 월세도 싸다던데….’
박길성이 최종훈에게 물었다.
“최 사장. 토마토 명인은….”
선우현이 옥탑방에서 나왔다. 쟁반에는 토마토 주스 석 잔이 있었다.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할 건 없고 해서, 이거라도 드시죠.”
비서실장이 먼저 컵을 받아 맛을 보았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김 실장. 왜 그래?”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뭐? 그럼 설마….”
박길성이 토마토 주스가 담긴 컵을 얼른 받아 마셨다.
맛있었다. 그가 아는 맛이었다.
‘활력 토마토….’
박길성은 토마토 주스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후에 빈 컵을 보며 허탈하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 귀한 걸 갈아버릴 수가….”
박서윤은 박길성이 주스를 맛있게 마시는 걸 보았다. 그는 심지어 빈 컵을 보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그녀가 자기 몫의 유리컵을 내밀었다.
“회장님. 여기 더 있습니다.”
“어? 아니야. 그건 박서윤 대리가 마셔.”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얼른 마셔.”
“예. 그럼.”
“몸에 좋은 거니까 남기지 말고 다 마셔야 해.”
그녀가 투명한 유리컵에 입술을 댔다. 향기가 훅 느껴졌다.
‘어머?’
그녀는 이 향기를 안다. 이 토마토를 썰어봤기 때문에도 알지만, 이 향기가 나는 사람을 만나봤기 때문에 더 잘 기억한다.
‘이건 그때….’
그녀가 컵을 기울여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아….”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컵을 기울여 순식간에 주스 한 잔을 모두 마셨다.
다 마신 후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이렇게 맛있는 과일은 처음 먹어봐요.”
선우현이 말했다.
“제가 키운 과일이 맛있긴 하죠.”
“아. 직접 키우셨….”
박서윤이 멈칫했다. 선우현에게서 납치됐다가 구출될 때 맡았던 향기가 느껴졌다.
‘아니야. 이건 내가 지금 이 주스를 마셔서….’
이 토마토가 얼마나 귀한 건지는 박길성의 말과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과일을 키우는 사람이 많을 리 없다.
그녀가 선우현을 보았다. 그녀를 구출할 때 선우현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키나 체형이 그때 본 모습과 겹쳐졌다.
그녀가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아!”
김수선이 말했다.
- 눈치챈 거 같은데요?
“에이. 설마. 나 그날 마스크 썼어.”
선우현이 옥상 가운데에 놓아둔 의자로 걸어갔다. 옥상에는 접이식 캠핑 의자가 세 개 있었다.
“앉으시죠.”
투 플러스 원으로 산 의자라 앉을 자리가 모자랐다. 박길성과 최종훈이 의자에 앉았다. 비서실장과 박서윤은 박길성의 뒤쪽에 섰다.
선우현이 말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박길성은 의자에 앉아 선우현과 토마토 화분들을 번갈아 보았다.
“저 토마토가 혹시 활력….”
“방금 드신 그거 맞습니다.”
“아니, 그 특별한 걸 어떻게 저런 곳에서….”
박길성은 당연히 최첨단 장비들이 있는 식물 연구실이나, 아니면 공기 좋고 햇볕 잘 들고 물 좋은 곳에 있는 통제된 과수원에서 활력 토마토를 특별 관리하며 재배했을 줄 알았다.
“옥탑방 옥상에서 낡은 화분에 키우고 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