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조사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이 말했다.
“박 회장님한테는 활력 토마토 맛을 충분히 보여줬으니까, 오늘은 다른 회사를 찾아가서 또 자랑하자.”
비서 김찬혁이 물었다.
“활력 토마토라고 이름을 정하신 겁니까?”
“내가 정식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홍보를 하려면 임시로라도 부를 이름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활력 토마토. 줄여서 활토.”
김찬혁이 걱정했다.
“사장님. 어제 주신 걸 먹어보니까 이건 몸에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혹시 활토에 약이라도 탄 거 아닐까요?”
“천재가 직접 먹으려고 키운 건데 약을 왜 타?”
김찬혁이 조언했다.
“그래도 성분 검사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효과가 좋으니까 걱정이 됩니다.”
“이미 어제 우리 회사 연구소에 맡겼어. 먹어도 안전한 건 나야 알지만, 홍보를 제대로 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하니까.”
***
선우현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저 토마토를 연구소 같은 곳에 보내서 분석하면 급속성장촉진제 성분만 따로 분리될까?”
김수선이 단언했다.
- 아니요. 급속성장촉진제의 핵심 성분은 식물에 흡수되면 빠르게 소모됩니다. 열매가 익을 정도면 남은 게 없을 겁니다.
“우리 지원위성에 있던 탐사대용 물질 분석 장비로는 가능할까?”
- 모르겠습니다. 그 장비는 이미 분해해서 유기물 재처리 합성장치를 수리할 때 부품으로 사용했으니까요.
***
회장 박길성이 물었다.
“김 실장. 박 대리를 납치해서 협박했던 놈들은 찾았나?”
비서실장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경찰도 그놈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박 대리가 이미 구출됐다고 경찰에서 대충 조사하는 거 아니야?”
“제가 신경 써달라는 전화를 몇 군데 돌렸습니다. 밤에는 담당자를 직접 만났습니다. 수사는 철저히 할 겁니다. 다만….”
“그놈들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예.”
박길성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제만 해도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넘치던 활력이 지금은 평소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는 어제 먹은 토마토의 효과가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비서실장이 말했다.
“제가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좀 쉬시죠.”
박길성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왜 연구소가 아니라 내 직속인 비서실을 노렸을까? 느낌이 좋지 않아. 만약 회사 내부에서 누군가 선을 넘은 거라면….’
그의 아들 두 명은 박길성이 체력 문제로 은퇴할 생각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차기 회장 자리를 노리고 박 터지게 경쟁하고 있다.
박길성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김 실장. 이 일은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한다.”
“하지만 회장님. 컨디션이….”
“그래. 나는 지금 활력이 필요하지.”
어제처럼 활력이 넘치는 몸이라면 조사를 직접, 적극적으로 주도할 수 있다.
“김 실장. 그 토마토를 누가 키웠는지 알아냈나?”
비서실장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국내 최고의 식물 전문가들에게 문의했는데, 그 토마토의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박길성이 최종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사장. 어제 그 토마토 말이야. 효과가 얼마나 오래 가?”
- 그 토마토가 몸에 참 좋은 건 맞는데요. 활력이 생기는 효과는 하루 정도만 가더라고요.
“하긴. 하나 먹었다고 그 좋은 효과가 계속 유지된다면 과일이 아니라 불로초겠지.”
길성 연구소에서 토마토의 성분을 분석했을 때는 마약이나 다른 약물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몸에 좋은 성분만 잔뜩 들어 있었다.
“그걸 또 먹으면 활력이 다시 생기나?”
- 그럼요. 제가 먹어보고 확인했습니다. 하나 먹으면 딱 하루 동안 신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결법은 간단했다.
“최 사장. 나 그 토마토 하나만 더 줘.”
- 제가 먹을 것도 모자라서요.
“회사에 지금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 이걸 해결하려면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해. 최 사장은 또 얻으면 되잖아.”
- 어? 박 회장님. 저도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터져서요! 전화 끊겠습니다!
“어? 어? 최 사장? 최 사장! 야! 종훈아!”
최종훈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렇게 부르시는 걸 보니까 진짜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박길성이 잠시 망설이다가 설명했다.
“우리 비서실에 박서윤 대리 알지?”
- 네. 압니다. 처음 봤을 땐 광고 찍으러 온 연예인인 줄 알았습니다.
“박 대리가 납치됐….”
- 헉! 신고는 하셨습니까!
“곧바로 구출했어. 범인은 놓쳤지만.”
- 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누군가 내 비서실의 직원을 노렸어. 진짜 목표는 내 약점이겠지. 그래서 내가 직접 해결해야겠는데, 약발이 떨어졌어.”
- 활력 토마토는 약이 아닌데요.
“그래서 더 좋지. 난 지금 활력이 필요해.”
“음…. 알겠습니다. 제가 그 근처를 지나가는 중입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고맙다.”
***
최종훈은 다른 거래 회사에 가져가서 맛을 보여주려고 챙겼던 토마토를 박길성에게 넘겼다.
박길성이 그 토마토를 받자마자 씹어 삼켰다. 맛있는 건 알지만, 지금은 맛보다 다른 게 훨씬 더 중요했다.
박길성이 토마토 하나를 다 먹고 나서 눈을 가만히 감았다.
최종훈이 물었다.
“박 회장님. 어떠십니까?”
박길성이 눈을 번쩍 떴다.
“최 사장은 얼른 가. 나 이제 바빠.”
“무슨 일인지 몰라도 꼭 하루 안에 해결하십시오.”
“왜? 오늘 해결 못 하면 활력 토마토 하나 더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그러냐?”
“확실히 기력이 살아나셨네요. 저는 진짜 가겠습니다.”
최종훈이 떠났다. 박길성이 입맛을 다셨다.
“하나 더 준다는 말은 기어이 안 하고 가네.”
비서실장이 옆에서 물었다.
“회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박길성이 최종훈을 만난 곳은 회사 근처 공원이다. 박길성이 코트를 펄럭이며 회사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감사실, 보안과, 그 외에 조사 능력이 있는 부서는 다 소집해. 다른 모든 부서는 이번 조사에 최우선으로 협조하라고 해. 오늘 회사 모조리 뒤집어엎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
선우현이 옥상에서 토마토를 보며 말했다.
“어제 최 사장님이 열 개나 따 갔잖아.”
- 여기서 먹고 간 것까지 세면 열두 개입니다. 맛있었나 봅니다.
“내가 직접 키운 거라 그런지 맛있긴 해.”
- 이번에 우리가 만든 식물 급속성장촉진제에는 지구연합의 양산형과는 다른 추가 효과가 있습니다. 식물이 더 빨리 자라고, 더 맛있어집니다.
촉진제의 제조법은 양산형과 똑같았다. 그런데 원료 중 하나인 소량의 레드 포션이 조금 달랐다.
“오천 년 동안 숙성된 포션을 재료로 쓰면 생기는 추가 효과가.”
선우현은 평소에도 활력이 충분한 상태라 그 토마토를 먹든 안 먹든 차이가 없었다.
“열매가 맛있어지는 거라면, 정말 최고인데?”
- 선장님. 저도 먹을 줄 압니다.
선우현이 얼른 말을 돌렸다.
“어제 그렇게 많이 따갔는데, 오늘은 그만큼 새로 열렸어.”
최종훈이 많이 따가는 바람에 어제만 해도 남은 토마토의 수가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어제의 손실분이 모두 회복됐다. 어제는 덜 익었던 토마토들이 오늘은 빨갛게 익었다. 아직은 작고 파란 열매도 새로 많이 생겼다.
“오늘은 토마토가 남겠는데? 케찹이라도 만들어볼까?”
- 토마토 주스는 어떠신지?
“아! 토마토 스파게티나 만들어야겠다.”
***
활력 토마토를 먹고 기력이 충만해진 박길성은 회사를 뒤집어엎었다. 조사 능력이 있는 직원이 모조리 투입됐다.
“연막도 좀 치고, 겸사겸사 회사 내부 점검도 해야겠어.”
연막용으로 회사 상황 특별 점검을 시행했다. 그렇다고 가짜 명분을 세운 건 아니다. 실제로 내부 점검에 들어갔다.
회사는 난리가 났다. 회장인 박길성은 그동안 회사 업무에서 손을 좀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각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보고를 받고 호통을 쳤다.
각 부서는 정말 급한 업무가 아니면 모든 일정을 중지하더라도 조사에 협조해야 했다. 급한 업무도 이사급의 결재가 있어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는 회사가 완전히 뒤집혔다. 계열사들도 예외가 없었다.
비서실장이 보고했다.
“특별 점검을 하는 동안, 따로 빼낸 직원들이 어제 사건을 은밀히 조사했습니다.”
각 부서는 특별 점검 덕분에 어떤 조사를 하든 아무 의심 없이 자료를 내놓았다.
감사실이나 보안실 등에서 차출된 요원들이 회사 내부와 외부의 수상한 움직임을 찾아내 보고했다.
그중에는 주변 CCTV 정보도 있었다.
“어제 회사 주변에서 이 사람이 수상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럼 이놈이 맞겠지. 낮부터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놈 누구야?”
“조사 중입니다.”
박길성이 명령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빨리 찾아. 이 활력 효과가 끝나기 전에 시킨 놈까지 찾아내!”
***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어제 창고에서 일부러 놓아준 납치범들이 다른 사람과 접촉했습니다.
선우현이 프라이팬을 보았다. 으깬 토마토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아. 기가 막힌 토마토 스파게티를 완성하기 직전인데.”
- 선장님. 실패하기 직전입니다만?
“그치? 이건 버려야겠다.”
선우현이 프라이팬을 내려놓았다.
“어떤 놈이 납치하라고 시켰는지 얼굴이나 좀 보자.”
- 놈이 아닙니다.
“그러면?”
- 년입니다.
***
납치범 회색 마스크는 팔에 깁스를 한 상태로 의뢰인을 만났다.
의뢰를 맡긴 여자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꼴이 왜 그래요?”
회색 마스크가 불평했다.
“의뢰하신 일을 하다가 다쳤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일이라는 말은 없었잖습니까?”
“아니, 여자애 하나 상대로 그 꼴이…. 설마 그 여자가 특수부대라도 나왔대요?”
“그건 우리도 모르죠. 그리고 그 여자가 아니라, 한패인 남자에게 당했습니다.”
“한패?”
“예. 한패인지 경호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경호원이라…. 그건 보고해야겠네요.”
회색 마스크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 뗄 테니 잔금이나 주시죠.”
“의뢰한 일은요?”
“이 꼴이 됐는데 뭘 어떻게 알아냅니까?”
여자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럼 아무것도 못 알아냈으면서 돈을 받겠다는 거예요?”
회색 마스크는 화를 냈다.
“이 손님이 상황파악이 안 되나? 우리가 많이 다쳤다고! 확 그냥…. 어?”
여자의 뒤에서 건장한 남자가 몇 명 나타났다. 모두 양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실패했으면 꺼져요.”
“제, 젠장!”
***
선우현이 마스크와 여자의 만남을 멀리서 촬영했다.
“저게 청부한 놈이 아니라 년인가 본데?”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이 사진을 경찰에 넘길까? 그런데 사진만 넘기면 무슨 상황인지 알려나?”
- 납치됐던 여자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사람이 나와서, 어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던 장소를 조사 중입니다.
“그래? 그럼 이 사진은 그 회사에 넘겨야지. 이걸 받으면 어떻게 하는지 구경이나 하자.”
***
회색 마스크는 어제 길성 본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 장소를 길성 보안실 직원이 조사했다.
이미 다른 직원들이 이 장소를 몇 번이나 조사했다. 그는 혹시 놓친 건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가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놈들이 여기에 단서라도 하나 흘렸으면 좋…. 어?”
주머니에 뭔가 들어 있었다. 그가 손을 빼보았다.
사진이 몇 장 나왔다. 인화지가 아니라 얇은 복사지에 컬러프린터로 인쇄한 사진이었다.
“이게 뭐야? 언제 누가 넣….”
그는 사진을 보고 당황했다. 보안실이 총동원돼서 찾고 있던 CCTV 속 인물이 사진 속에 있었다. 얼굴은 마스크로 가렸지만 다른 특징들을 이용해 구분할 수 있었다.
“찾았다.”
그가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도대체 이 사진을 누가….”
***
박길성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 새끼가 그 새끼란 말이지?”
회장실에는 보안실 요원과 비서실장이 같이 있었다. 요원이 대답했다.
“예. CCTV와 비교해서 확인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 사진을 누가 준 거야?”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외투 주머니에….”
박길성이 사진 속 여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럼 이 새끼와 이야기하는 이 여자는 누구야?”
“그건 조사 중입니다.”
비서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요원의 팔을 툭 건드렸다.
“잠깐 나가 있지?”
“예? 아, 예.”
요원이 머리를 꾸벅 숙이고 회장실을 나갔다.
박길성이 물었다.
“김 실장이 아는 사람이구나? 누군데?”
“송덕선 여사의 비서실장입니다.”
박길성의 입이 벌어졌다. 송덕선은 박길성의 전처다.
“그럼 이번 일을 사주한 게….”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해 보입니다.”
박길성이 왼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더러운 성격은 이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하구나.”
박길성이 갑자기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며 등을 폈다.
“아니, 잠깐. 그렇게 오래전에 갈라선 여자가 지금 갑자기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인다? 이상해.도대체 뭘 노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