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재크와 콩나무
지구연합은 탐사대원이 신선한 과일과 곡물, 채소 등을 쉽게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단기간 탐사 활동이라면 식량은 보급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지상에 탐사기지를 만들고 장기간 활동하려면 과일이나 채소 등은 직접 재배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다만, 그러려면 농산물을 빨리 키워서 수확할 수 있어야 한다.
지구연합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급품에 식물 급속성장촉진제를 추가했다.
그 촉진제를 대량의 비료와 함께 쓰면 과일과 곡물, 채소 등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키울 수 있다.
김수선이 말했다.
- 식물 급속성장촉진제는 떨어진 지 오천 년쯤 됐습니다만? 옛날에 다 썼잖습니까?
그때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버텨야 할 줄 몰랐다.
처음에는 선체 내의 각종 시설이 모두 멀쩡했다. 당연히 식물 재배장치도 정상 작동했다.
그래서 조난된 초기에는 직접 키운 과일과 채소를 풍족하게 먹었다.
“남은 씨앗은?”
- 씨앗이 남아 있으면 왜 굳이 칼로리바를 합성해서 먹었을까요?
급속성장촉진제가 다 떨어진 후에는 과일 등을 재배하기 어려워졌다. 얻는 결과물의 양에 비해 재배장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 결국 자동 재배장치까지 망가졌다. 조금 남아 있던 씨앗은 식량으로 사용했다.
“괜찮아. 씨앗은 사면 돼. 천냥샵에 팔더라. 급속성장촉진제만 새로 만들자.”
식물 급속성장촉진제의 효과는 굉장히 좋다. 비료와 함께 쓰면 식물이 빨리 자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열매도 많이 맺힌다.
촉진제의 효과가 그렇게 좋은 이유는 특별한 원료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 촉진제를 만들 때 레드 포션이 들어가는 건 아시죠?
“촉진제는 희석해서 쓰니까 원액에는 조금밖에 안 들어가잖아.”
- 선장님 혼자서 옥상에 키우는 정도라면, 레드 포션 1회 투약분의 20%만 뽑아서 촉진제에 섞어도 일 년 내내 쓸 수 있긴 합니다.
“그러니까 얼른 만들자.”
- 그런데 우리가 가진 레드 포션에는 원래는 없던 추가 효과가 생겼던데요.
최종훈과 가수 구하니의 일 년 전 사고 후유증은 레드 포션 한 방으로 치료했다.
그런데 레드 포션은 원래는 현재 입은 상처만 치료하는 약이다. 일 년 전에 생긴 후유증까지 치료하는 효과는 없다.
“그렇…지?”
- 추가 효과가 생긴 레드 포션이 들어간 촉진제로 키운 식물을 먹어도 될까요?
선우현이 잠깐 생각하다 손을 흔들었다.
“에이. 당연히 괜찮지. 사람 몸에 직접 주사해도 괜찮았잖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오래된 부상 후유증까지 없애주었다.
-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걸로 키운 열매를 먹는다고 왜 탈이 나겠어? 괜찮아.”
-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촉진제 제조에 레드 포션만이 아니라 에너지와 자원이 추가로 소모되는 건 아시죠?
“어….”
- 그냥 사서 드시죠?
“싫어.”
- 네?
“토마토 하나 먹겠다고 몇 달을 기다릴 순 없어.”
레드 포션은 구하니의 관통상을 실시간으로 치료할 정도로 회복 효과가 빠르고 강력하다. 그 포션을 이용해 만든 촉진제는 식물을 빠르게 성장시킨다.
“수선아. 얼른 촉진제를 만들….”
옥상으로 올라오는 문에서 디지털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현이 문을 돌아보았다.
“저 문 잠겨있는 거 아니었나?”
- 출입하는 사람이 있긴 했습니다.
옥상은 다른 입주민은 올라오지 못하는 공간이다. 옥상 출입문 비밀번호를 다른 입주민에게는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다.
김수선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 다른 선우현과 옥상에서 몇 번 마주쳐 대화한 사람입니다. 그 건물 입주민 중에 옥상에 올라오는 사람은 그녀뿐입니다.
과거의 대화 내용은 알지 못했다. 얼굴은 가끔 하늘을 볼 때 확인할 수 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러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신나리가 옥상에 올라와서 물었다.
“어머. 뭐예요 이 화분들은? 꽃 키우려고요?”
김수선이 얼른 조언했다.
-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닌 그 중간의 미묘한 말로 일단 간을 보십시오.
선우현이 말했다.
“먹을 수 있는 걸 좀 키워보려고.”
- 그냥 반말로 지르지 마시고요! 간을 보라고요!
선우현이 신나리에게 반말로 물었다.
“옥상에는 왜 올라온 거야?”
- 간! 간! 간을 보라고!
신나리가 두 팔을 펼치며 말했다.
“광합성 하러요. 여기가 전망이 좋잖아요. 제 방은 좁거든요.”
“갑자기?”
“가끔 올라왔어요. 그때마다 오빠가 없었죠.”
“아아. 하긴.”
-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냥 말을 까도 의심받지 않겠습니다.
선우현은 넓은 지상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이곳에 온 후로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좁은 공간에 갇혀 사는 기분. 내가 잘 알지.”
“제 방보다 옥탑방이 더 넓어요. 난 공짜로 쓰니까 방이 좁고요.”
“응? 공짜?”
김수선이 다급히 말했다.
- 어떻게 공짜로 쓰는지 방법을 알아내십시오! 예산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왜 너는 공짜인 거야?”
신나리가 대답했다.
“이 건물 주인이 친구 아빠세요. 그 아저씨 대신에 건물 입주민들 민원도 받아주고 고쳐야 할 거 있으면 사람도 부르고, 또 공지사항도 전달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완전 공짜는 아니지만….”
- 그 여자의 정체는 관리인이었군요.
“그래도 이 작은 건물에 할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근데 이런 이야기는 전에 다 했잖아요. 공짜로 쓴다고 부러워했으면서.”
- 얼른 둘러대십시오!
선우현이 제안했다.
“밥 사줄까?”
- 둘러대라니까 왜 갑자기….
신나리가 얼른 손을 들었다.
“난 돈까스!”
- 옥상에서 먹는 라면이 더 맛있다고 꼬드겨 보십시오. 그래야 싸게 먹힙니다.
신나리는 결국 옥상에서 라면을 얻어먹었다. 바람이 솔솔 부는 옥상에서 탁 트인 전망을 보며 먹는 라면은 꽤 맛있었다.
그녀가 감탄했다.
“라면 진짜 잘 끓인다.”
“내가 라면에는 진심이거든.”
“이 김치도 진짜 맛있어요. 직접 담근 거예요?”
“마트에서 팔더라.”
“아. 대기업 맛이구나.”
선우현은 라면을 먹으면서 그녀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선우현이 물었다.
“대학생이면, 관리인 알바로 월세를 아껴서 학비에 보태는 거야?”
“당연히 아니죠. 월세 안 내는 만큼 용돈이 추가로 생기니까 하는 건데요?”
“응?”
“여긴 할 일이 거의 없어서 아주 개꿀이에요.”
“부모님이 아시니?”
“아뇨.”
***
구하니는 얼마 전에 충청남도 지역 행사에서 예능 방송을 찍었다.
그날은 사건이 많았다. 촬영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가장한 습격을 당했고, 선우현이 중상을 입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레드 포션을 사용했다.
그날 지역 행사에서 촬영한 예능 프로그램이 드디어 TV 방송에 나왔다.
그녀는 일 년 전에도 사고로 목을 다쳤다. 그 사고 후로는 고음도 덜 올라가고, 파워도 부족해졌고, 음색도 상했다.
노래에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은 목을 다쳐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구하니의 시대는 끝났다는 평을 받았다.
예전 소속사와는 이미 계약이 종료됐다. 한동안 매니저 없이 활동하면서 방송이나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오늘 TV 방송에 나온 그녀는 노래를 정말 잘했다.
그녀가 그 지역 행사에서 노래하는 영상은 이미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오늘 TV에서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관객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것과 방송국 제작진이 정식으로 녹음한 건 음질이 완전히 달랐다.
좋은 장비로 녹음한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게시판에 댓글을 줄줄이 달았다.
- 와. 구하니 진짜 돌아왔네.
- 목소리가 일 년 전보다 더 좋아진 거 같은데?
- 정확히 말하면 데뷔했을 때의 그 맑고 감미롭던 목소리?
- 신인 때는 목소리만 좋고 노래 실력은 덜 완성됐었는데, 지금은 완전체가 됐네요.
- 이제 목 관리 잘하면서 오래오래 봤으면 좋겠습니다.
구하니는 집에서 방송 게시판의 댓글을 읽었다.
그녀도 목소리가 예전처럼 좋아졌다는 건 안다. 그것도 사고를 당했던 일 년 전이 아니라 마음껏 질러도 괜찮던 스무 살 때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손으로 목을 만졌다.
“분명히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약을 쓴 것 같은데.”
처음에는 혹시 스테로이드나 다른 독한 약물을 목에 때려 부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그 검사는 원래 다니던 병원이 아니라 전에는 가본 적 없는 병원에서 몰래 받았다.
의사는 그녀의 성대는 물론이고 목 주변 상태도 완벽하게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녀는 선우현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선우현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은커녕 휴대폰 번호도 모른다.
“연락처를 모르니까, 나한테 쓴 약이 뭔지 물어볼 수가 없잖아.”
그렇다고 탐정을 고용해 선우현을 찾을 생각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남에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나한테 쓴 약이 공개해도 되는 거라면, 이미 그 약을 대량으로 만들어 팔았겠지. 그 약이라면 투자자를 모으는 건 쉬울 테니까.”
그녀는 선우현이 그녀에게 어떤 치료를 했는지 모른다. 선우현을 찾아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꼭 만나고 싶은데….”
그녀가 아쉬워하며 방송 게시판을 읽었다. 댓글이 계속 올라왔다.
그녀도 친동생 계정으로 접속해 댓글을 달았다.
- 한동안 쉬어서 목이 회복되고 목소리도 다시 살아난 거겠죠.
- 역시 그렇겠지요?
- 나도 이 생각 했음. 구하니가 요즘 활동을 별로 안 했잖아요.
- 역시 잘 쉬는 게 최고네요.
***
이튿날 선우현이 하늘을 보며 물었다.
“수선아. 내 식물 급속성장촉진제 합성은 어떻게 됐어?”
유기물 재처리 합성장치는 칼로리바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적당한 재료와 합성 설계도만 있으면 여러 가지 약품도 합성할 수 있다.
- 부족한 자원을 긁어모아서 식물용 급속성장촉진제를 조금 만들었습니다.
“역시 유능한 김수선! 믿고 있었다고! 얼른 보내줘.”
- 지상 전송 캡슐을 제작할 때도 자원이 소모되는 건 아시죠? 이거 이렇게 막 써도 되는 자원이 아닙니다만? 선체 수리용으로 써야 합니다만?
“우주 쓰레기가 또 포획되겠지.”
- 선체의 비행 궤도와 비슷하게 날아가는 우주 쓰레기를 발견해야 포획할 수 있습니다. 무리한 궤도 변경은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합니다. 그러면 배보다 배꼽이 커집니다.
다른 궤도로 날아가는 우주 쓰레기를 탐사대 지원위성이 쫓아가서 포획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야 한다. 게다가 급격한 가속과 방향전환은 선체에 큰 부담을 준다.
그래서 그런 포획 작업은 진짜 급할 때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어차피 지구에서 급속성장촉진제가 제대로 되는지 실험해야 하잖아. 보내.”
- 이미 보냈습니다.
식물 급속성장촉진제가 담긴 소형 강하 캡슐은 정밀하게 계산된 비행 궤도를 24시간 동안 날아가 경기도 야산에 떨어졌다.
선우현이 산을 수색하며 말했다.
“집으로 바로 좀 보내지.”
- 추진기 없이 날개만 조종해서 그 정도로 가깝게 떨어뜨렸으면 진짜 대단한 겁니다만?
“이게 최선은 아니잖아.”
- 소형 강하 캡슐을 옥상에 정확히 착륙시킬 수는 있죠.
추가 모듈을 붙이면 그 정도로 정밀한 제어가 가능하다.
- 1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도 있고요.
지구의 대공 감시 시스템에 걸릴 위험이 증가하지만 강하 속도를 높일 수는 있다.
- 그런데 그런 고성능 강하 캡슐을 만들려면 자원이 많이 들어갑니다만? 선체 수리용 부품도 낭비해야 합니다만?
“당연히 이런 건 내가 몸으로 때워야지. 찾는 거 하나도 안 힘들어.”
- 좀 더 옆으로 가세요. 5미터 왼쪽입니다.
“아. 찾았다.”
- 부피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원액 상태로 보냈습니다. 깨끗한 물에 희석해서 거름과 함께 쓰십시오.
“오케이.”
- 촉진제 원료에 레드 포션이 소량 들어가니까, 아껴 쓰세요.
“남아도는 게 레드 포션인데 쪼잔하긴. 이제 좀 펑펑 쓰면서 살자고. 지상에 내려왔잖아.”
- 저는 넓은 지상이 아니라 지원위성에만 있어서, 펑펑 쓰는 감성이 뭔지 모릅니다만?
“옥상에서만 키울게. 진짜야.”
***
며칠 후에 신나리가 다시 옥상에 올라왔다.
그녀는 화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와아. 어떻게 벌써 토마토가 열려요? 농사의 신이세요?”
레드 포션이 포함된 식물 급속성장촉진제의 효과는 엄청났다. 씨앗을 사다가 심은 지 며칠 만에 토마토가 빨갛게 익었다.
“나도 이렇게 빨리 자랄 줄은 몰랐어.”
김수선이 말했다.
- 예상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를 보였습니다. 기존 식물 급속성장촉진제의 효과는 이 정도로 엄청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원료에 포함된 레드 포션의 추가 효과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신나리가 물었다.
“몰랐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선우현이 둘러댔다.
“아니야. 사실은 토마토가 이미 달려 있던 나무를 사다가 심었어.”
씨앗을 심은 지 며칠 만에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하면 성장 속도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둘러댔다.
신나리가 토마토를 보며 말했다.
“알아요. 당연하잖아요.”
“나한테 농사의 신이냐더니?”
“당연히 농담이죠. 근데 토마토 진짜 크고 잘 익었다. 파는 거랑 때깔이 달라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하나만 먹어도 돼요?”
“당연하지. 먹어. 어서 먹어.”
“맛있겠죠?”
“나도 몰라. 아직 안 먹어봐서.”
“네?”
“네가 먹고 나서 괜찮으면 나도 먹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