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성장촉진제
JHC 테크 임원회의실은 기름칠이 잘 돼서 문이 열릴 때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게다가 김충식 본부장과 이백현 연구소장이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을 때는 이사들 모두 그쪽에 집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장인 최종훈이 조용히 들어와 듣고 있었다는 것을 그가 말을 한 후에야 알았다.
갑자기 이백현 연구소장이 벌떡 일어나 김충식 본부장을 가리키며 외쳤다.
“사장님! 김 본부장이 외부 세력을 회사에 끌어들였습니다!”
김충식은 화들짝 놀라 반박했다.
“오해이십니다! 제가 끌어들인 게 아닙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찾아와서 대가 없이 도와주겠다고 한 겁니다!”
“대가가 없을 리가 없잖아!”
“뭘 요구하든 안 줄 생각이었다고!”
최종훈이 말했다.
“이제 보니까 말이야. 내가 화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때는, 다들 일은 안 하고 내가 죽으면 누가 사장이 될지나 논의하고 있었나 봅니다?”
김충식 파벌의 윤 이사가 급히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사장님께서 은퇴하실 때를 대비해서….”
“나 은퇴 안 해요.”
“그,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몰랐던 거 같은데.”
최종훈이 회의실 제일 상석으로 걸어갔다. 그 자리는 그동안 비어 있었다.
이백현 파벌의 강 이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사, 사장님. 다리가….”
“내 다리가 왜요?”
“지팡이 없이 잘 걸으시네요?”
“아. 이거?”
최종훈이 임원회의실 중앙 상석에 앉으며 일부러 가짜 정보를 흘렸다.
“내 왼쪽 다리는 말입니다. 다 나은 지 한참 됐습니다.”
최종훈은 꽤 오랫동안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중요한 안건은 화상회의로 보고받고 전자문서를 결재했다.
그래서 이사들은 그의 다리 상태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저 점점 상태가 나빠져서 이대로 가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있다는 소식만 들었다.
이사들은 당황했다.
‘그럼 일부러 건강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헛소문을 흘린 건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그런데 우리는 차기 사장 자리를 놓고 싸움만….’
이사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엿 됐다.’
그들은 자세를 바짝 낮추고 최종훈의 눈치를 살폈다.
최종훈이 말했다.
“김충식 본부장과 이백현 연구소장은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다른 이사들은 그 말뜻을 즉시 알아듣고 벌떡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도망쳤다.
이제 회의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김충식 본부장과 이백현 연구소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최종훈이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오. 이것들을 자를 수도 없고.”
김충식과 이백현은 최종훈이 회사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같이 일했다. 둘 다 최종훈보다 한 살이 젊었다.
회사 설립 초기에 김충식 본부장은 최종훈과 같이 영업을 뛰었다. 이백현 연구소장은 최종훈과 같이 밤새 기술을 개발했다. 두 사람은 회사 지분도 조금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차기 사장 자리를 놓고 좀 싸웠다고 해서 자를 수는 없다.
게다가 최종훈도 원래는 은퇴할 생각이었다. 그가 은퇴한다면, 어차피 김충식과 이백현 중 한 명이 사장을 맡아야 한다.
“에라이. 됐다.”
이제 상황이 변했다. 최종훈은 다리가 나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당연히 은퇴도 없고, 차기 사장 경쟁도 의미가 없는 일이 됐다.
김충식 본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종훈이 형. 다리 다 나았으면 말이라도 해 주지.”
“지금 말해주잖아.”
이백현 연구소장도 얼른 끼어들었다.
“형. 난 형이 건강해질 거라고 믿고 있었어.”
“믿는다면서 네가 사장 하겠다고 싸워?”
“아니, 난 김 본부장이 먼저 형 자리를 노리길래 방어 차원에서….”
김충식이 펄쩍 뛰었다.
“내, 내가 언제!”
최종훈이 손으로 탁자를 탁탁 쳤다.
“시끄러워. 내가 돌아왔으니까 앞으로는 일이나 열심히 해.”
두 사람이 얼른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리고.”
최종훈이 두 손을 깍지 끼고 팔꿈치를 탁자 위에 얹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에 제약이나 바이오 전문가가 있나?”
김충식 본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왜? 이제 바이오산업도 진출하게? 바이오는 우리랑 분야가 많이 다른 데다가, 자본이 많이 드는데….”
“아니. 궁금한 게 좀 있어서 물어보려고.”
최종훈은 그의 다리를 낫게 한 약이 제약회사에서 연구하던 것은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다리를 치료하던 병원에 가서 그걸 물어볼 수는 없다. 그는 의사에게 그 약에 대한 정보를 흘릴 생각이 전혀 없다.
연구소 책임자인 이백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와 산학협력하는 대학 연구실에 윤 교수님이라고 있어. 그쪽으로 폭넓게 아는 전문가야.”
“적당하네. 내가 찾아갈 테니까 스케줄 좀 잡아.”
“내가 모실게!”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넌 일이나 해. 이따위 모의 하지 말고.”
“옛썰!”
***
최종훈이 윤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러니까 교수님 말씀은, 그런 약은 없다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슷한 효과의 약도 없습니까?”
“글쎄요. 몇 가지 진통제와 스테로이드를 칵테일 해서 고용량으로 쓰면 엇비슷한 효과가 나오려나요?”
최종훈이 속으로 말했다.
‘그런 건 이미 몇 번이나 써봤는데….’
효과가 없었다.
윤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안 되겠네요. 그러면 다른 부작용이 수두룩하게 쏟아지겠죠. 게다가 주사 한 방으로 해결될 리도 없고요.”
최종훈은 선우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선우현은 그 약을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혹시 이론이라도 나왔든가….”
“그런 이론이야 많죠.”
“아! 많습니까?”
“다 뜬구름 잡는 소리거나 아니면 사기 치려는 거라서 그렇지.”
“사기…요?”
“먹기만 하면 온갖 병에 효능이 있는 만병통치 건강식품 같은 거 말입니다.”
“아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희 쪽 분야에도 그런 거 많습니다. 동전 크기인데 전자파가 차단된다는 스티커라든지, 자동차 엔진룸에 붙이기만 하면 연비가 엄청 좋아지는 부품 같은 거 말이죠.”
최종훈은 엔지니어 출신 사장이다. 그는 과거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코웃음을 치곤 했다. 지금도 그런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기적 같은 일이 그의 몸에 실제로 일어났다. 멀쩡해진 다리가 그 증거다.
최종훈이 혼잣말을 했다.
“이러면 멀쩡한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빠질 수도 있겠는데….”
“예?”
“기적을 직접 보면, 상대가 사이비 교주인 걸 알면서도 믿게 될까 싶어서요.”
윤 교수가 웃었다.
“아아.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장님을 눈뜨게 하는 그런 사이비요? 교주가 손짓만 해도 사람들이 우르르 쓰러지는 그런 거….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그렇죠. 농담입니다. 농담. 하, 하하.”
최종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앉은뱅이까지는 아니었지만, 주사 한 방에 다시 정상적으로 걷게 됐다.
그런데 그는 사이비 종교를 믿기엔 너무 이성적인 엔지니어 출신이다.
‘신의 기적이 아니라면, 기적 같은 효과가 있는 약을 그 사람이 실제로 만들어냈다는 건데….’
윤 교수의 말에 의하면 대형 제약회사나 연구소 중에는 그런 약을 개발할 시도조차 하는 곳이 없다.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기적의 약을 개발했지? 천재인가?’
***
선우현은 오늘도 놀고먹었다.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놀고먹으려고 지상에 내려가셨습니까?
“어. 난 오래전부터 이러고 싶었어.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이렇게 이루어지네.”
- 여기 계실 때도 놀고먹으셨습니다만?
“거기서는 그냥 갇혀 있었던 거지. 여기는 거기랑 달라. 넓어.”
선우현이 옥탑방 옥상에서 두 팔을 옆으로 활짝 펼치며 말했다.
“진짜 넓어!”
- 우주가 더 넓습니다만?
“우주복에 갇혀서 둥둥 떠다니는 우주랑 피부에 바람이 스치고 빗방울이 닿는 이곳은 다르다니까? 여기서 맨날 놀고먹고 싶다.”
- 선장님은 선체 유지에 필요한 필수 물자가 바닥나서, 그걸 구하러 지상에 내려가셨습니다만?
“괜찮아. 오늘 당장 선체가 부서지는 건 아니잖아.”
탐사선에는 탐사대의 지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기술은 있어도 위성 궤도까지 도로 올라가는 우주선을 제작하는 기술은 없다.
그런데 21세기는 지구에서 우주로 인공위성용 로켓을 수시로 발사하는 시대다. 그 로켓에 인공위성 대신에 물자를 실어서 올려보내면 선체 수리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다만, 그런 로켓을 발사하려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다.
- 그렇게 놀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만?
“알았어. 다음 단계를 진행할게.”
선우현은 재활용품으로 버려진 화분과 통 몇 개를 옥상에 가져다 놓았다. 흙도 담아두었다.
선우현이 화분에 물을 뿌리며 말했다.
“탐사대의 기본 임무 중 하나가 식량 확보지. 이것부터 하자.”
- 선장님?
“왜?”
- 그게 왜 다음 단계입니까?
“먹는 건 중요한 문제야.”
- 새 현지 협조자 후보는요?
“찾고는 있는데, 시간이 걸릴 거 같다.”
- 알겠습니다. 그런데 설마 채소를 직접 키워서 먹게요? 그 지역 마트에 가면 다 파는데요?
“수선아. 나는 말이야. 위성에서 지구의 숲과 농경지를 보며 항상 꿈꿨어. 칼로리바가 아니라 진짜 천연 재료로 만든 과일이 먹고 싶었다고.”
- 마트에 많으니까 돈 주고 사서 드십시오.
“물론 사 먹어야지. 이미 먹고 있어. 그런데 내가 꿈꾸던 것 중에는 내가 직접 키워서 먹는 것도 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냥 놀고먹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래서 뭘 키우시게요?
“상추도 심고, 토마토도 심으려고.”
- 그런 화분에서 토마토가 잘 자랄까요?
“나야 모르지.”
- 선장님. 혹시 지구연합에 있을 때 농사를 지어보셨나요?
“아니.”
- 아. 네. 관련 지식이 전혀 없겠군요.
“씨앗을 심고 물과 거름을 주면 알아서 크겠지.”
“예. 예. 그러겠죠.”
탐사대 지원위성에는 화분이 없다. 흙도 없다.
자동화된 식물 재배장치는 있었는데, 이미 오래전에 분해해 선체 수리에 사용했다.
김수선이 제안했다.
- 제가 그동안 지구의 식물이 자라는 걸 여기서 쭉 지켜봤습니다. 키우는 방법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어…. 네가 도와주면 토마토가 안 자랄 수도 있겠다.”
- 선장님?
“다 말라죽을 수도 있겠어.”
- 그래도 선장님보다는 제가 나을 텐데요?
“너나 나나 도토리 키재기지. 더 빨리, 확실히 키울 방법을 찾아야겠어.”
- 옥상에 온실이라도 만드시게요?
선우현이 손뼉을 쳤다.
“온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 뉴스에서 봤는데요. 불법 건축물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내고 원상 복구까지 해야 한답니다. 그 비용은 금괴를 깎아서 돌 반지 만들어 마련하시게요?
“음….”
선우현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수선아. 카모플라쥬 시스템을 이 옥상에 설치할까? 그럼 온실을 감출 수 있잖아.”
- 되겠습니까? 지금도 선체만 겨우 가리고 있습니다.
“예비 모듈은….”
- 있는 것도 자꾸 터지고 있어서 다른 장비의 부품을 뜯어다 수리하는데, 예비 모듈이 남아 있겠습니까?
“역시 안 되는구나.”
- 그리고 카모플라쥬 시스템이 사람 눈에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닙니다만? 지상에서는 어색한 부분이 보여서 오히려 시선만 끕니다만? 우주는 주변 사물이나 다양한 배경이 없으니까 통하는 겁니다만?
“삐졌구나?”
- 안 삐졌습니다!
선우현이 말했다.
“역시 그걸 써야겠어.”
- 그거라니요?
“탐사대 현장활동 지원용 식물 급속성장촉진제.”
- 진심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