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레드 포션 II
선우현이 춘천으로 이동하면서 물었다.
“수선아. 도망친 트럭은 추적하고 있지?”
- 최종훈은 현지 협조자 후보에서 탈락한 거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맛이 좀 간 거 같아서 탈락시켰지. 그래도 트럭으로 들이받고 튄 놈은 잡아야지.”
- 굳이….
“우리 수선이가 이렇게 생각이 짧다. 그놈이 누구야? 청부업자겠지? 그럼 뭘 가지고 있을까?”
- 청부대금?
“그렇지. 현금으로 받았겠지. 잡아서 그거 챙기려고. 그놈 지금 어디 있어?”
김수선이 어색한 소리를 냈다.
- 아….
“야?”
-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
- 제가 확인했을 때는 범인이 트럭을 버리고 사라진 후였습니다.
“응? 추적하고 있다며?
- 최종훈에게 레드 포션을 사용했을 때는 잠시 추적을 중단했습니다. 레드 포션의 효과를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그랬는데?”
- 하필 그때 범인이 사라졌습니다.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 김수선. 그러니까 최종훈 씨가 포션 맞고 비명 지르는 걸 구경이나 하다가 놓쳤구나!”
- 관측 카메라가 하나뿐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체에 카메라가 하나밖에 안 남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 아까부터 그 하나뿐인 카메라의 방향 전환 모듈에 문제가 생겨서 살살 쓰고 있습니다. 이거 또 수리해야 합니다.
선우현은 지상에 내려와서 풍족하게 먹고 쓰면서 신나게 살고 있다.
그런데 김수선이 있는 탐사대 지원위성은 여전히 보급품이 부족하다. 고장도 자주 난다.
“어…. 그래. 고생이 많다. 수리 자재는 있지?”
- 기존에 분해한 카메라 부품 중에서 개조해서 쓸 수 있는 걸 찾아봐야죠. 그런데 말이죠. 선장님.
“어? 어. 그래. 내가 너 믿는 거 알지?”
- 그렇게 맨날 놀고먹으면 자재는 도대체 언제 보내실 겁니까? 관측 카메라만 멀쩡했어도 놓칠 리 없었는데!
“어…. 생각해 보니까 최종훈은 이제 현지 협력자 후보가 아니잖아? 범인은 놓쳐도 되겠네?”
- 말 바꾸지 마시고요.
선우현이 당당하게 말했다.
“위성용 로켓 발사 비용이 얼마야? 얼마면 되는데? 나 지금 천만 원 있다.”
- 그 돈이면 로켓은커녕 관측 카메라 수리에 필요한 자재 구입비도 안 됩니다만?
“금괴도 좀 있는데?”
- 그 금괴로 돌 반지는 깎고 계시는지?
“닥치란 말이구나. 우리 수선이가 거칠어졌어.”
- 선장님이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닌데요?
“기다려봐. 내가 로켓 따위가 아니라 우주왕복선 회사를 만들어서 물자 빵빵하게 보내줄게.
- 우주왕복선의 연료값이라도 버셨는지?
“돈 문제는 계획이 다 있잖아.”
김수선도 안다. 그런데 그 계획에 필요한 기본 조건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 그러려면 현지 협력자가 필요합니다만?
“찾아야지. 쓸 만한 사람을 또 어디서 찾나.
- 선장님이 인터넷으로 찾은 사람은 왜 다 어딘가 문제가 있을까요?
- 최종훈 사장은 괜찮았잖아. 맛만 가지 않았으면 딱 적당했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
최종훈은 결국 119구급차를 타고 그나마 가까운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종합병원은 아니지만 신경과와 정형외과 등이 있었다.
최종훈 그 병원에서 왼쪽 다리의 CT와 MRI를 찍었다. 그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다리의 실제 상태를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
최종훈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제 다리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의사가 최종훈의 왼쪽 다리의 CT 영상을 보며 말했다.
“환자분의 다리는, 음. 환자분이라고 해도 되나 싶군요. 영상만 보면 아무 일도 안 생긴 것 같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기 이 영상을 보시면요. 잘 구분이 안 가시겠지만….”
“약간은 볼 줄 압니다.”
“예? 의사이십니까?”
“아니요. 제 왼쪽 다리에 관한 데이터는 정말 많이 보고 공부했거든요. 병을 진단하지는 못하지만, 현재 제 다리 상태를 구분할 줄 압니다.”
그는 지난 일 년 동안 한국과 미국의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갔다. 미국에 갔을 때는 돈을 쏟아부어 최고의 의사들을 만났다.
그렇게 받은 진찰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의사를 따로 고용해 그의 왼쪽 다리에 관한 것만 핀포인트 강습도 받았다.
그리고 이런 CT 영상은 수백 번을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최종훈이 오늘 촬영한 그의 왼쪽 다리 CT 영상을 보며 말했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예?”
“아닙니다. 정말 정상으로 보이네요.”
“그렇다니까요. 교통사고 때문에 CT와 MRI를 찍어달라고 하신 줄 알았는데….”
“그냥, 건강에 염려가 많아서 찍어봤습니다.”
최종훈은 CT 영상 데이터를 복사 받은 후에 병원을 나왔다.
이제 지팡이는 필요 없었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되는데….”
그는 오늘 계획을 취소하고 택시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기존에 다른 병원에서 촬영한 CT와 MRI 자료들이 있었다. 그 영상들을 자세히 비교해 볼 수 있는 장비도 있었다. 다리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 공부도 많이 했다.
그가 기존에 받아둔 CT와 MRI 영상 중 가장 최근 것과 오늘 받아온 영상을 비교했다.
“분명히 내 다리가 맞는데….”
두 영상을 겹쳐보면 CT와 MRI 모두 거의 일치했다.
그런데 잘 보면 다른 부분도 있었다.
일 년 전 사고는 그의 다리에 흔적을 남겼다.
그때 인대에 생긴 작은 손상 하나는 시간이 지나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에도 그 흔적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오늘 촬영한 MRI 영상의 인대에는 그게 사라져 있었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돼.”
그가 급히 바지를 벗어보았다. 일 년 전 사고 때 생긴 흉터는 그대로 있었다.
“겉은 그대로인데 속만 멀쩡해졌다고?”
레드 포션은 최종훈의 다리 내부에 직접 주입됐다. 게다가 부작용 제거에 그 힘이 대부분 소모되는 바람에 피부의 오래된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 진짜 수술도 없이 주사 한 방으로 내 병을 치료한 거야? 그게 말이 돼?”
그의 몸에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걸을 수 있다.
선우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나한테 당신 다리를 한 방에 치료할 방법이 있는데.
- 당신 다리는 이미 다 나았다고!
- 속고만 살았나!
“그 약이 진짜였어?”
선우현의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마약성 진통제를 쓴 줄 알았다.
“이런 기적 같은 약이 도대체 어디서….”
선우현이 했던 다른 이야기도 생각났다.
- 이거 내가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서 비밀리에 개발한 약이야. 이걸 맞으면 아픈 게 낫는다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는 마약을 만들었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다리에 생긴 일은 마약 따위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기적 같은 약을 그 사람이 직접 개발했다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이야기다. 실제로 아까는 선우현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의 다리가 나았다. 진단 영상도 확실했다. 이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 비슷한 약이 있다는 말조차 들은 적도 없어.”
그렇게 대단하고 효과 빠른 약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조차 없다.
제약회사에서 실험 중인 약일 리도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일 년 동안 돈을 쏟아부으며 치료법을 찾아다닌 최종훈이 모를 리가 없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기적의 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팔면 세계 제약계가 뒤집어…. 아. 만들기 어렵다고 했지.”
선우현은 딱 하나 만들어둔 약을 최종훈에게 썼다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재처리를 거치지 않은 레드 포션은 탐사대 지원위성에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지만,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게 복원해둔 건 하나뿐이었다.
선우현이 했던 경고도 생각났다.
- 내 약에 대해서 어디 가서 떠들지 마시죠. 괜히 소문내면 그 다리 원상태로 돌려놓을 겁니다.
그런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최종훈은 다시 예전의 그 지옥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게다가 선우현의 경고가 우습게 들리지도 않았다.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약을 만들 능력이 있으면, 내 다리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약도 만들 수 있겠지.”
최종훈이 CT와 MRI 영상을 동시에 화면에 띄워놓았다. 그가 지난 1년 동안 그토록 원하던 완치된 다리의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난 이제 살았어. 완전히 나았다고. 이제 아프지 않아!”
그는 다시는 그런 고통스러운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겨우 일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대형 사고를 겪었다.
“두 번이나 일어난 일은 다음에 또 일어날 수 있지.”
그 문제의 해결법은 안다.
“내가 나중에 또 그런 사고를 당한다면 그 기적의 약이 꼭 필요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을 만나서 약을 더 구해야…. 어?”
중요한 문제가 이제야 생각났다.
“그 사람 이름이 뭐지? 연락처는….”
알 리가 없다. 최종훈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난 등신인가? 왜 번호를 안 땄지?”
***
탐사대 지원위성에서 김수선이 말했다.
- 최종훈이 레드 포션만 먹고 튀었습니다.
“유력한 후보여서 포션을 쓴 건데 누가 그럴 줄 알았나. 그냥 다른 사람이나 찾자.”
선우현이 스마트폰으로 새 후보자를 검색하며 말했다.
“현지 협조자 후보를 새로 찾아내면 어떻게 끌어들이지? 돈으로 매수할까?”
- 현재 현지 협조자 선정 조건을 보면, 선장님이 가진 몇 푼으로는 매수가 불가능합니다만?
“야. 나 천만 원 벌었어.”
- 그러게 말입니다. 지구연합 기술력의 정수인 레드 포션을, 그것도 3레벨짜리를 천만 원에 팔다니요. 현재 지구에서 그 포션의 가치가 그 정도일 리 없잖습니까?
“최종훈이 먹튀를 할 줄 알았냐고. 그리고 레드 포션은 다시 정제하면 되잖아. 그 작업은 얼마나 됐어?”
- 12%에서 중단했습니다.
선우현은 당황했다.
“응? 왜? 지금쯤이면 그것보다는 더 진행됐어야 하는 거 아냐?”
- 선체의 카모플라쥬 장치에 문제가 발생해 그걸 수리하는 데 자원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레드 포션은 좀 기다리시죠.
“쩝. 그거 또 고장 났구나. 할 수 없지.”
- 예비 포션이 없는 동안은 크게 다치지 마시고요.
“내가 일부러 다칠 리 없잖아. 그래서 카모플라쥬 장치의 상태는 어때?”
- 수리가 거의 끝나갑니…. 아….
“왜?”
- 모듈 하나가 터졌습니다!
***
북미 방공사령부에 최근에 배치된 병사가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어? 위성 궤도에 뭔가 있습니다. 이거 혹시 ICBM 아닐까요?”
상관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뭐? 언제 발사됐는데!”
“모르겠습니다. 우주에서 갑자기 관측돼서요.”
“탄도미사일의 비행 패턴과 일치해?”
“아니요. 인공위성 궤도에 떠 있는데요?”
상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이 새끼. 사람 놀라게 하네. 그럼 인공위성이나 우주 쓰레기겠지! 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한 거야!”
“갑자기 나타났으니까요. 그래서 러시아나 중국이 개발한 스텔스 미사일이 아닐까 해서….”
“그거 지금 어디 있어?”
“좌표가…. 어?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있었는데!”
상관이 데이터를 넘겨받아 확인한 후에 피식 웃었다.
“아아. 이거.”
“아시는 겁니까?”
“일 년에 한두 번쯤 나오는 현상인데, 이거 탐지 기기의 오류야.”
“네? 그럼 고치면 되잖습니까?”
“원인은 못 찾았거든. 어쨌든 이건 기기 오류로 결론 났어. 아마 소프트웨어 버그겠지.”
“그런가요? 휴우. 다행입니다.”
“이 건은 오류 발견 보고만 해.”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넌 얼차려 하러 가자.”
“네?”
“새끼가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오늘이 지구 멸망하는 날인 줄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