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진짜 노래
선우현이 그녀가 계속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고 제안했다.
“일단 119에 신고부터 합시다. 병원 가야죠.”
“아니, 잠깐만요. 저 방송 촬영하러 가야 돼요.”
“다친 곳은 없지만, 이런 사고를 당했는데 일하러 간다고요?”
그는 일부러 다친 곳이 없다는 말을 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구하니는 어차피 다친 곳이 없으니까 스케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거 오늘이 아니면 못 찍는단 말이에요. 가야 한다고요. 여기는…. 저 혼자 난 사고니까 119는 필요 없고 112에만 신고할게요.”
선우현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다른 피해자는 없다. 게다가 그녀도 이젠 현재 상황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뭐, 그러시든지.”
구하니는 차에서 내려 112에 전화를 걸었다. 상황 설명을 들은 경찰이 물었다.
- 다친 사람은 없다는 거지요? 차가 도로를 막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네. 차만 도로 옆에서 좀 부서졌어요.”
- 지금 인근 지구대의 차량이 모두 다른 사건에 출동해 있어서, 그곳은 처리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구하니가 통화를 마친 후에 그녀의 차를 보았다. 앞부분이 찌그러져 있어서 그 차를 타고 행사장에 가는 건 무리였다.
그녀가 선우현을 보며 말했다.
“나 좀 태워줘요.”
“어디로요?”
“방송 촬영하는 곳이요. 오늘 공연 보러 가는 거, 제가 하는 그 공연이죠? 같이 가요. 차 어디 있어요?”
선우현이 도로 위를 가리켰다. 오토바이가 한 대 서 있었다.
“저걸 타고 왔습니다만?”
“네? 저 오토바이요?”
선우현이 핑계를 댔다.
“그런데 헬멧이 하나밖에 없어서.”
“아. 있어요. 헬멧.”
그녀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 차의 앞부분만 찌그러진 상태라 트렁크는 열렸다.
그 안에 헬멧이 있었다. 분홍색에 예쁜 그림이 그려진 여성용 헬멧이었다. 그런데 오토바이 헬멧치고는 작고 얇았다.
선우현이 물었다.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닙니까?”
“여기 앞을 이렇게 내리면 선글라스가 얼굴 전체를 가리거든요. 자전거 잠깐 탈 때도 쓰고, 급할 때는 이걸 쓰고 가게 같은 곳에 가곤 해요.”
선우현이 그 헬멧을 가만히 보았다. 김수선이 참견했다.
- 그 정도면 헬멧이 아니라 모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고 나면 죽습니다.
“뭐,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선우현은 구하니의 공연이 보려고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다. 그녀의 공연은 위성에서 TV로 중계되는 건 많이 봤다. 이제 지상에 내려왔으니 현장에서 직접 보고 싶었다.
선우현이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타요.”
구하니가 얼른 뒷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막상 앉고 보니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
그녀가 선우현의 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으며 외쳤다.
“오빠! 달려!”
“오빠 아닙니다.”
- 조상님이죠. 아. 전에는 지상에 내려간 적이 없으니 조상은 아니겠구나.
선우현이 오토바이의 손잡이를 돌렸다. 오토바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사고 이력이 몇 번이나 있어서 싸게 넘겨받은 오토바이지만 달리는 성능은 문제가 없었다.
김수선이 위성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 구하니는 현장에 출동한 경찰을 기다릴 생각이 없나 보네요.
구하니가 선우현의 등 뒤에 붙어서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도 선우현 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사고가 났을 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녀의 목에 막대가 꽂혔었다. 발견이 늦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럴 뻔했지요.”
“에어백이 안 터진 걸 보면 큰 사고는 아니었나 봐요.”
“에어백이 고장 났겠지요. 그 차 수리는 하고 타는 겁니까?”
“네? 에어백도 고장 나요?”
“모든 기계는 오래 쓰면 다 고장 납니다.”
지구연합의 기술력과 예산을 쏟아부어 만든 탐사대 지원위성도 5천 년쯤 썼더니 이젠 수시로 고장이 난다. 요즘은 선체에서 균열이 발견되는 일도 잦았다.
“주변에 차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정비소에 가서 돈 주면 잘 봐줍니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맞다. 선우현 씨는 오늘도 놀아요? 그럼 오늘 내 일일 매니저 콜?”
“난 청중으로 가는 겁니다만?”
구하니는 지금 당장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사고를 일부러 내고 도망친 차에서 악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겁이 난 그녀가 선우현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선우현이 무술 고수라는 건 이미 들어서 안다. 지금 그녀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가 제안했다.
“일당 줄게요! 돌아올 땐 아는 사람 차로 오면 되니까, 촬영 끝날 때까지만 현장에 있어 줘요!”
지원위성에서 김수선이 비웃었다.
- 우습군요. 지금 우리 선장님을 겨우 일당 몇 푼으로….
“오늘 일당 백만 원!”
- 고객님의 안전을 위해 범인의 차량을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
구하니는 선우현의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은 헬멧을 쓰고 있어서 아무도 그녀가 구하니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 방송용 촬영은 지역 행사와 같이 진행된다.
그녀가 출연하는 건 예능 방송이다. 그 예능의 다른 부분은 다른 곳에서 따로 찍는다.
이 지역 행사에서 촬영할 부분은, 예능 방송에 게스트로 초대된 가수들이 등장해 노래를 부르며 경쟁하는 모습이다.
이 지역 행사를 주관하는 곳은 지자체다. 그 지자체는 공짜로 초대가수를 부를 수도 있고 지역 행사가 방송에도 나가는 이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지자체는 제작진의 편의를 위해 현장에 대형 텐트와 차량을 배치했다. 현장 통제 인원도 지원했다.
선우현은 구하니를 촬영팀 대기 장소 근처에 내려주었다.
그녀가 오토바이에서 내린 후에 인사했다.
“오토바이 태워줘서 고마워요.”
김수선이 지원위성에서 말했다.
- 살려준 건 모르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어떻게 잘 넘어갔습니다.
선우현이 오토바이에 탄 채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가며 헬멧을 벗었다.
피디는 의자에 앉아서 오늘 촬영 계획을 확인하고 있었다.
구하니가 말을 걸었다.
“김 피디님.”
피디가 뒤를 돌아본 후에 반갑게 말했다.
“아. 구하니 씨. 오셨….”
구하니가 들고 있는 헬멧이 보였다. 피디의 눈동자가 구하니의 뒤쪽으로 갔다가 흔들렸다.
“구하니 씨. 그거 혹시 오토바이 헬멧….”
“네. 왜 그러세요?”
“아니, 저기, 그게…. 오토바이를 타고 오실 줄은 몰라서. 혹시 요즘….”
“요즘 왜요?”
근처에 있던 가수 양미나가 얼른 다가와서 말했다.
“어머어. 피디님.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해요? 그냥 대놓고 물어봐요. 하니야. 너 요즘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은 건 아는데, 드디어 망했어?”
“드디어? 넌 왜 시비니? 그리고 내가 왜 망해?”
“아니, 차가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오니까 그러지. 저기 저 오토바이지? 좋은 것도 아니네. 그래서 피디님이 당황하신 거 몰라?”
“교통사고가 났어.”
“으응?”
“여기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어. 차가 망가져서 그건 이제 못 몰아. 그래서 오토바이 얻어타고 온 거야. 내가 아무리 크게 다쳤어도 오늘 촬영에는 늦으면 안 되니까.”
피디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어? 구하니 씨. 다쳤습니까?”
“아뇨. 다쳤어도 왔을 거란 거죠. 차만 망가졌어요.”
“그래도 그….”
병원에 가보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출연 가수가 빠지면 촬영은 망한다.
피디가 활짝 웃었다.
“아하하하. 그러시구나. 휴우. 난 또 진짜 망하셨으면 어쩌나 했습니다.”
“저 안 망했어요.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데 이제 일 년 지났거든요?”
그녀는 일 년 전에 사고를 당했을 때부터 노래를 예전처럼 부를 수 없게 됐다. 그때부터 인기가 빠르게 떨어지는 중이다.
그래도 그 전에 벌어놓은 게 많았다.
“그, 그렇죠. 하하하.”
“그리고 차가 박살이 났다는데 걱정은 안 되시나 봐요?”
“괜찮아 보여서요. 괜찮으시죠?”
“네. 아주 괜찮아요. 제가 원래 좀 튼튼해요.”
양미나가 옆에서 말했다.
“하니야. 나도 네가 걱정돼서 한 말이야. 알지?”
“알겠냐?”
“아니.”
“알면 좀 가라.”
***
양미나는 연예인용 밴을 타고 이곳에 왔다. 그녀가 차에 들어가 리클라이닝 시트에 누웠다.
운전석에서 로드 매니저가 물었다.
“누나. 구하니 씨는 왜 갑자기 망한 걸까요?”
“쟤 목소리 일 년 전부터 맛이 갔잖아. 전성기가 완전히 끝난 거지.”
“그거 소속사에서 계약 끝나기 전에 너무 심하게 스케줄을 잡아서, 무리해서 그렇게 된 거죠?”
“구하니가 어떤 앤데 그 정도로 목 관리를 안 했겠어? 무리해서 목 상태가 안 좋았던 건 맞는데, 결정타는 그게 아니야.”
“네? 그럼요?”
“일 년쯤 전에 꽤 큰 교통사고가 있었어. 쟤는 그 사고에 휘말려서 목을 다쳤어.”
“아. 그래서….”
“그리고 망한 이유가 뭐든 쟤는 이제 내 상대가 아니야. 이제는 양미나의 시대라고.”
그녀가 장담했다.
“오늘 사람들에게 실력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겠어.”
***
선우현은 구하니의 임시 매니저 자격으로 촬영하는 곳 근처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가 현장을 보며 말했다.
“방송 촬영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니까 느낌이 참 새롭다.”
- 촬영 현장은 무성영화 시절부터 최근까지 많이 보셨잖습니까?
“항상 위성 궤도에서 카메라 통해서 영상으로만 봤잖아. 지금은 현장에서 직접 보는 거고. 많이 달라.”
- 좋으시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여기서 보는데.
“어…. 사실 직접 봐도 별로 안 좋다. 영상으로 보는 거랑 똑같아.”
- 저한테 약을 팔려면 입꼬리나 내리고 하시죠?
오늘 예능 방송 촬영은 지역 축제와 함께 진행됐다.
그런데 행사 스케줄과 여러 문제로 인해 가수들이 노래하는 장면은 리허설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피디는 노래로 경쟁한다는 콘셉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리허설 없이 처음부터 진검승부를 하도록 판을 짰다.
오늘 경쟁하는 가수는 세 명이다. 행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그 세 명이 노래하는 순간이 왔다.
첫 번째 가수는 남자였다. 그가 먼저 노래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많이 나왔다. 청중 중에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역 축제에서 방송국 촬영팀이 시민들의 휴대폰 촬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두 번째로 양미나가 무대에 올라갔다. 그녀가 무대를 쓱 훑어보았다.
‘오늘은 내가 프린세스야.’
그녀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감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와아.”
“좋다.”
선우현이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말했다.
“양미나 말이야. 싸가지가 좀 없기는 하지만, 노래 실력은 진짜네.”
- 그러게 말입니다.
“직접 들어보니까 더 확실히 알겠어.”
- 역시 현장에서 들으면 다르군요. 좋으시겠습니다.
“어. 좋다.”
- 삐뚤어질 테다!
피디도 감탄했다.
“양미나가 오늘 아주 힘 빡 주고 노래하네?”
조연출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장난 아닌데요?”
“여기서 구하니를 밟으려고 하나 보다.”
“하긴. 구하니 씨는 이제 예전 그 목소리가 아니죠. 저도 전에는 팬이었는데 아쉬워요. 목 관리 좀 잘하지.”
“그게 목 관리 문제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어.”
“네?”
양미나의 노래가 끝났다.
박수가 쏟아졌다.
다음 차례로 구하니가 무대에 올라왔다.
그녀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예전에는 무대에 올라가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예전에는 노래하기가 참 편했다. 그녀가 마음 가는 대로 노래하면 그 감정이 목소리에 그대로 담겼다.
지금도 목소리에 감정은 담기는데, 예전과는 다른 점도 많았다. 특히 강하게 지르거나 고음을 낼 때의 파워가 예전만 못했다.
게다가 평소에 말할 때는 괜찮은데 노래할 때는 음색이 조금 변했다. 맑고 아름답고 섬세하던 목소리에 탁한 음색이 끼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사고를 당한 지 일 년이 지났는데도 예전 그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목소리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은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방법이 없다고 해서 미국 병원에도 가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의사는 가수로 계속 활동하면 그녀의 목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질 거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목소리가 더 망가지기 전에 은퇴할까? 지금 그만두면 가수 구하니로 기억될 수 있는데.’
음악이 나왔다. 이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오늘 촬영이 끝나면 은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어.’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마셨다. 그런 후에 노래를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목소리가 최근과 많이 달랐다.
‘내 목소리가 돌아왔어?’
최근의 변해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일 년 전처럼 마음먹은 대로 소리가 나왔다.
‘아니야. 이건 일 년 전 상태가 아니라.’
워낙 많이 불렀던 노래라 놀라거나 당황한 상태에서도 실수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목소리에 맞춰 고음을 시원하게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행사장을 뒤덮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우와아아아!”
구하니는 이어폰을 통해 자신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스무 살 때 같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신났다.
그녀가 무대를 뛰어다니며 노래했다. 그런데도 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이 넘쳤다.
‘이거야!’
그녀가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평소보다 더 강렬한 에너지를 담아 소리를 질렀다.
‘내 진짜 노래는 이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