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회귀빨로 지존 헌터
- 5권 8화
지금까지는 그들의 공격을 온전하게 받아 주기만 했던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레이킹 볼!"
공중에서 검은 구체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퍼퍼펑.
바닥에 닿자마자 깨져 버린 구체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엘리자베스가 애용하는 스킬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구슬을 만들어 그 안에 독가스를 주입하는 것이다.
내부에 담겨져 있는 신경독소.
시체를 연구하는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독가스였다.
생각을 할 수 있는 머리를 그대로 남겨 둔 채 온몸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고통 또한 여전히 느낄 수 있고 분노 또한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그녀의 마음을 이끌었다.
바닥에 검은 연무가 깔리자마자 타르가는 정령을 불러냈다.
"실프!"
좋지 않은 느낌 때문이었다.
언데드를 상대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이 바로 독이다.
포이즌(Poison).
태욱이 이곳에 도착을 하기 전에 미리 귀띔을 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가 만들어 낸 연무에 들어가지 말라는 그의 말.
실프를 소환해 주위에 안개를 날려 버렸다.
"오호? 생각보다 똑똑한데?"
엘리자베스는 효과적으로 전투를 하는 타르가에 감탄했다.
자신의 정보를 전혀 모르는 채 전투를 벌이는 녀석이었다.
기감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이곳은 닫혀 있는 밀실인데?"
그렇다.
엘리자베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곳은 커다란 홀.
바람으로 독 안개를 날려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 독성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 문 밖으로 나가!"
태욱은 다른 동료들을 문 밖으로 이동시키려고 외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인간들도 나름 쓸 데가 있으니 여기 쓰러져 줘야겠어."
엘리자베스는 문을 덜컥 하고 닫아 버렸다.
쿠우우우웅.
쾅.
쉽게 열려 있던 커다란 문이 순식간에 닫혀 버렸다.
"뭐야? 왜 안 열려!"
은비는 마음대로 열리지 않는 문을 자신의 도끼로 연신 내리쳤다.
콰강.
콰가가가가강.
문이 부서지기는커녕 도끼에 커다란 힘이 고스란히 전달돼 손아귀의 힘이 풀릴 정도였다.
"으윽."
고통스러운 듯 은비는 자신의 팔을 주물렀다.
"이, 이런 이제 어떻게 하지?"
무엇보다 독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은비, 지원, 영리였다.
그녀들은 일전에 뱀파이어와 전투를 벌이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두 이곳으로!"
태욱은 한자리에 모두를 모았다.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태욱, 그를 믿는 것이었다.
독 안개가 가득한 곳에서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고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유일한 헌터.
"타르가!"
하지만, 타르가는 태욱의 발언을 무시하고 엘리자베스에게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실프의 바람이 검은 안개를 뒤로 물리치며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따위 것으로 날 막아 낼 수 없어. 이제 더 이상 시간이 남지 않았어.'
타르가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전투를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찾았다!"
태욱이 그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고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고 있던 행동에 결과가 이제 드러난 것이다.
"타르가 저기, 천정에 있는 샹들리에."
모든 곳을 지켜볼 수 있었고 쉽게 손이 닿지 않는 곳.
리치가 라이프 베슬을 숨기기 가장 최적화된 곳을 찾은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태욱의 발언에 흠칫 놀랐다.
'라이프 베슬을 아는 것인가? 단순한 직감이 좋은 것인가?'
정확하게 의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라이프 베슬은 최우선으로 지켜야 되는 물건이었다.
"오호? 찾았다고 다 되는 것인 줄 아나 본데?"
가소롭다는 듯이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들어온 문에 반대편에 커다란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문 틈새로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느낀 은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커다란 뼈 무더기가 천천히 움직이며 나왔다.
그 형체를 보는 순간 절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보, 본 드래곤?"
지원이 형체를 알아보자마자 외쳤다.
'아직 본 드래곤은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 같았는데.'
태욱은 엘리자베스 곁에서 항상 존재하던 본 드래곤이 이곳에 없어서 처음 그녀를 눈치채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설마? 일부로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인가?'
지금 본 드래곤이 나올 이유는 전혀 없었다.
라이프 베슬을 이렇게 일찍 눈치챌 줄 몰랐고 정확하게 목표로 삼으니 마음이 급한 엘리자베스가 본 드래곤을 불러들인 것이다.
"일단 본 드래곤부터!"
상황 파악을 한 태욱은 본 드래곤을 목표로 삼았다.
엘리자베스의 견제만 신경 쓰다가는 본 드래곤의 재물이 돼 버릴지도 몰랐다.
"아 너무나 매력적인 실험체들이긴 한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쯧쯧."
이곳에 찾아온 모두를 실험체로 삼을 생각이었던 엘리자베스는 아쉬운 듯 혀끝을 찼다.
"하합!"
타르가는 단번에 본 드래곤 머리 방향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쌍검의 공격이 닿기 전에 본 드래곤이 입을 크게 벌렸다.
"호오오오오옵."
"크아아아아아."
단번에 숨을 들이마시더니 녹색의 빛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차차차차차차창.
단번에 타르가의 온몸을 감싸 안은 녹색의 빛줄기는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대기 중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르가!"
갑작스러운 드래곤 브레스에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못했다.
* * *
타르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드래곤 브레스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고 온몸으로 브레스를 맞이해야 됐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이렇게 마을을 구하지 못한 채 쓰러져야 되는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그때였다.
자신의 주위를 감싸던 실프의 바람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를 타고 대기 중의 입자 물질들이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릭.
휘릭.
알갱이들이 점점 자신의 앞에 모여 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프?'
실프는 최선을 다해 타르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쓰고 있었다.
작은 알갱이들이 들러붙어 커다란 덩어리가 되고, 그 덩어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강제로 일으켜 낸 바람은 조금씩 멎어들고 그의 앞에는 투명한 장막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실프가 강제로 역소환됐다.
아무리 타르가의 힘을 받아 쓰더라도 한계 이상의 힘을 사용한 실프였다.
자신이 가진 힘 이상의 능력을 뿜어내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타르가는 실프가 역소환됐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소멸돼 버린 것이다.
쿵.
드래곤 브레스를 막아 낸 얼음 장막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실프!"
타르가의 울부짖음이 레어 안을 가득 채웠다.
실프를 재소환하려고 할 때,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네 이 녀석!"
타르가의 눈빛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네 이 녀석!"
그의 분노를 누구보다 이해하는 영리였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소환수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영리 또한 안타까움에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사라진 정령을 위해 타르가는 분노를 표출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본 드래곤도, 마을에 위협을 끼친 엘리자베스도 처단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분노에 휩싸인 타르가는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타르가의 머릿속이 무엇보다 평온하게 변했다.
분노의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차분함이 생긴 것이다.
내재돼 있는 상실감은 여전히 가슴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식힌다.
타르가는 천천히 본 드래곤을 응시했다.
'분명 어딘가 약점은 존재해.'
무작정 달려들었던 이전과는 달리 천천히 본 드래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상념을 가지지 않은 본 드래곤.
공격에 반응하거나, 누군가의 명령을 들을 뿐 스스로의 생각이나 판단은 없었다.
주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쿵.
일정한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발로 짓누르는 행동이 지속됐다.
'여기까지가 사정거리군.'
먼 거리에 있거나, 회피 동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드래곤 브레스.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덩치로 짓누르는 패턴이 반복되자 타르가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우리 귀염둥이한테 겁을 먹었나? 왜 공격하지 않지?"
엘리자베스의 도발은 이제 타르가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꾸욱.
검을 쥔 양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어.'
봉인을 해제했던 힘이 한 줌 손에 잡혔다.
'이것을 풀어놓을 대상이 필요해.'
타르가는 시선을 내려 쌍검을 바라봤다.
'네가 받아 주겠니?'
마치 검과 대화를 하듯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쌍검은 옅게 잔 진동을 통해 울림을 전달했다.
"가자!"
타르가는 조금씩 본 드래곤의 사정거리로 걸어 들어갔다.
'셋.'
'둘.'
'하나.'
저벅.
그가 정확하게 사정거리에 들어가자마자 본 드래곤이 하늘에서 쏘아지듯 날아왔다.
후후후후후후훙.
타르가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는 본 드래곤의 행동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었다.
'지금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본 드래곤의 비행 사이로 자신이 쥐고 있는 검을 내던졌다.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하며 반복된 드래곤의 행동을 머릿속에 그리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휘리리리릭.
날아가는 검을 보고서는 엘리자베스가 외쳤다.
"안 돼!"
검이 향하는 곳은 정확하게 엘리자베스의 라이프 베슬이었다.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본 드래곤은 상체를 비틀었다.
콰직.
긴 꼬리를 이용해 검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검은 정확하게 본 드래곤의 꼬리에 틀어 박혀 그 힘을 잃었다.
우우우우웅.
커다란 홀에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빅뱅이 일어나기 전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블랙홀이 생긴 듯이 모든 소리와 물질들이 단번에 한 곳으로 모였다.
침묵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커다란 홀을 가득 채우더니 차츰 사라졌다.
콰가가가가강!
엄청난 굉음이 단번에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정적이 흘렀던 이유가 단번에 힘을 폭발시키기 위함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가, 감히 네놈들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본 드래곤이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강하다고 이야기하는 드래곤 본이 그 자리에서 소멸되듯 사라졌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헉....... 헉......."
모든 힘을 다 쏟아 낸 타르가는 호흡조차 조절하지 못했다.
가쁘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증거였다.
'더, 더 이상은.'
타르가는 졸도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