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회귀빨로 지존 헌터
- 4권 16화
짧은 편지 속에는 많은 내용이 내포돼 있었다.
마을을 떠나면서 마지막 흔적을 남겼다.
지원이라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한 스틸의 최후의 보루였다.
"여길 찾아가야 해."
드워프가 남긴 것은 일종의 아티팩트였다.
전쟁을 위해 출범하는 병사가 자신의 약혼자를 위해 만들었다는 아티팩트.
배우자가 생존을 확인하고 그 슬픔을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행여나 불빛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전쟁에서 패배했더라도 안도할 수 있다.
방향만 주어지고 아무런 힌트도 없다.
그럼에도 오롯이 생존했고 방향을 지정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된다.
처음 만든 목적성과는 다르게 결국 생존자를 찾는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가 돼 버린 것이었다.
이 아티팩트는 지원이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촌장인 스틸이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줬다.
처음에는 그저 로맨티스트인 줄 알았지만, 이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전혀 몰랐다.
"조금만 기다려요 아저씨. 내가 구해 줄게요."
아티팩트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지원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이 불빛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 * *
태욱은 지원이 마을로 쏜살같이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뒤를 쫒았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지만, 지원이 출발을 하기 전에 도착했고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드워프들이 한 곳으로 이동했다는 거지?"
"납치됐을 가능성도 있어."
지원은 고개를 절레 흔들며 태욱의 말을 부정했다.
단순한 마을 이동이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억측 아닌가?"
본질을 정확하게 보자는 태욱의 말에 지원은 변명을 하듯 주위를 살피며 하나하나 지적했다.
"저기 봐 봐, 마을을 이동할 거라면 저렇게 급하게 떠났을 리가 없어."
분명 급하게 떠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장인인 드워프들이 중간에 발을 떼지 않는 것은 일종의 진리였다.
장인 정신을 가진 드워프가 이동을 하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졌을 때 또는 같은 드워프들의 생존이 위험할 때.
단 두 가지 목적이 아니라면 화장실도 가지 않는 드워프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곡괭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일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급해서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고 다른 야생동물이 건드려서......."
태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원이 치고 들어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드워프 마을에 야생동물이 들어올 수 있다고?"
자신의 억측이었다는 것을 태욱도 눈치챘다.
하지만, 이미 흥분해 있는 그녀를 말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이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반증하듯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진정하자고, 너 너무 흥분해 있어."
태욱은 지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조금만 진정하자. 우리가 같이 나서지 않는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어."
"언니, 우리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흥분을 조금만 가라앉혀요."
"진정하시오. 우리가 있잖소."
은비, 영리 그리고 금강철인순으로 말을 덧붙였다.
"안 돼, 안 돼. 조금이라도 빨리."
동료들의 말로는 진정이 되지 않는 듯이 자꾸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그녀를 모두 끌어안았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냉철해질 시간이 필요해."
태욱은 흥분해 있는 지원을 품 안에 안고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몸을 바동거리던 지원도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진정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흥분해서는 안 돼, 냉철하게 지금의 상황을 파악해야 해."
"......."
지원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해야 될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흥분을 해 봤자 좋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결과가 달라진다고 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최대의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였다.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진정하자."
지원은 자신에게 되뇌듯 계속 중얼거렸다.
* * *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는 쉼 없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사막에는 바람이 자주 불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 것 같은데?"
은비는 눈을 흘겨 뜨며 태욱을 바라봤다.
출발하기 전, 태욱이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더위만 버티면 될 거야."
태욱의 그 말은 마치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것이 돼 버렸다.
모래바람이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어 가까스로 눈을 뜨고 앞으로 전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태욱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눈을 보호할 수 있는 고글이라도 챙겨 왔을 것이다.
태욱의 말을 믿고 행동한 결과는 바로 실눈을 뜨고 속눈썹에 의지한 채로 앞을 보는 방법뿐이었다.
이 와중에 타격을 입지 않은 사람은 오직 지원뿐이었다.
태욱의 지식을 오롯이 믿지 않고,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기반으로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태욱이 하는 말은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공간을 손으로 더듬더듬 찾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그의 말을 신뢰하되, 최대한 돌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그녀의 버릇이 됐다.
그렇기에 태욱의 말에도 대비책을 준비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러길래, 내가 주는 것만 챙겼어도."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 한참 매어져 있는 엄청난 양의 짐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만약 내가 그런 준비를 했다면 지쳐 쓰러져 나갔을걸?"
기계의 도움을 통해 걷는 지원과는 달리 육체적인 능력을 활용하는 은비였다.
지원의 키에 두 배만큼 들고 이동을 하고 있었더라면 지금 은비는 지쳐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은비는 엄청난 양을 돌발 상황에 대처한다는 의미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퉤퉤, 진짜 나한테 줄 건 없어?"
거칠게 씹히는 모래알을 연신 뱉어 내며 당당하게 외치는 은비였다.
"없지, 있으면 내가 더 챙겼을지도 몰라."
턱으로 내려가던 스카프를 입 위로 치켜세우며 지원은 발을 바삐 움직였다.
"곧 모래 폭풍이 불어올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대화 중간에 끼어든 영리가 저 멀리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풍경을 보고 말을 던졌다.
"어? 진짜 그럴 것 같은데?"
은비는 영리의 말에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고, 지원은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을 풀어 해치더니, 커다란 천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은비가 물었다.
"이건, 모래 폭풍을 버티기 위함이지."
쉴 새 없이 모래가 몰아치는 한가운데서 버텨 낼 자신이 없었던 지원이었다.
그녀가 준비한 것은 백패킹용 텐트였다.
강한 바람을 타고 쏟아지는 모래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거 하나면 충분해?"
"응, 나 하나는 버틸 만해."
"하나? 네 것만 준비해 온 거야?"
어깨를 들썩이며 지원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 거면 충분한데."
"그럼 다른 사람들은?"
"영리와 태욱은 각자 능력으로 피할 것이고 금강철인도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은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각자 정확하게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거지에 망설임이 없었다.
"진짜? 나만 문제가 되는 거야?"
은비의 투정과 함께 모래바람은 천천히 그녀를 잠식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은비의 외침이 모래바람 속에 파묻혔다.
* * *
한바탕 모래바람이 휘몰아치고 사막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스르르르륵.
모래 덩어리가 은비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악. 퉤퉤."
입안에 모래가 들어간 모양인 듯 연신 입안에 들어 있는 것을 내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게, 준비를 잘했어야지?"
백패킹 장비를 열고 나오는 지원은 은비의 모습을 보고 한마디 거들었다.
온통 모래를 뒤집어쓴 그녀의 모습은 흡사 모래 괴물과 비슷했다.
온몸에서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도와주는 게 어때서?"
은비는 툴툴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자자, 이제 그만하고 빨리 이동해야지, 또 모래바람이 불겠어."
태욱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말렸다.
이대로 또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한시가 바쁘게 움직여야 됐고 말싸움을 하면서 투정을 부릴 시간이 없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동료들을 다독여 이곳을 탈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요 언니들, 또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어떻게 해요?"
"난, 상관없어. 쟤만 문제가 있겠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지원은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은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모래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다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면?
입안에 있는 모래들을 다 뱉어 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모래가 들어왔는데, 이것을 또 반복해야 되는 것이다.
"이익!"
소스라치게 놀란 은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오늘 이 모래사막을 통과하려면."
가장 타격이 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은비가 가장 먼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이대로 있어 봤자 자신 말고는 타격을 입을 사람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툴툴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여기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울 필요는 은비에겐 전혀 없었다.
"빨리, 빨리 이동하자고."
결국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파듯 은비가 이동을 재촉했다.
언쟁이 길어질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처한 영리의 행동이 아주 제대로 적중한 것이었다.
태욱은 영리를 향해 한쪽 눈을 깜빡였다.
'고마워. 하마터면 길어질 뻔했어.'
영리는 태욱의 신호를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 * *
바삐 발걸음을 옮겨 이동을 하니, 저 멀리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저기 숲이 있어."
가장 반기는 사람은 역시 은비였다.
모래 폭풍에서 아무런 대비책이 없는 그녀는 숲이 너무나 반가웠다.
"뭐, 짐이 저렇게까지 많을 필요가 있나? 딱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는 거지."
풀이 죽어 있던 그녀에게 보이는 숲은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흐린 날에 구름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내리듯 그녀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빨리, 빨리 이동하자고."
한시라도 빨리, 이 모래사장을 벗어나고 싶었는지, 은비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이동하는 게 좋겠소. 혹시."
곁에서 이야기하는 금강철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은비는 그대로 튀어 나가 버렸다.
"다른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금강철인의 걱정스러운 뒷말에 동료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