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회귀빨로 지존 헌터
- 4권 15화
가깝게 지내던 동료의 사망 소식.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하하호호 같이 웃던 동료를 단숨에 눈앞에서 잃었던 슬픔이 은비의 가슴속에 먹먹하게 그려져 있었다.
고통의 상처가 어떤 힘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던 은비는 지원의 통증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찾아 행하기 위해 은비가 움직인 것이다.
"이제 최대 속도로 이동할게, 그러니 꽉 붙잡고 있어."
은비의 품에 안긴 지원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꽈악.
얼마나 강하게 잡았는지 손아귀의 힘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데려다줄 테니.'
은비는 피부로 전달되는 그녀의 다급함을 해결해 주기 위해 최대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활한 대지에 피어오른 먼지들이 얼마나 그들이 빨리 이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따금씩 피부에 닿는 작은 알갱이들이 고통이 되었지만 은비는 그것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단 5분의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자 눈앞에 드워프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과 은비가 다가서는데도 마을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들렸을 경계병의 풀피리 소리나 누군가가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을에 알리는 초병들의 종소리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서, 설마?"
마을 방벽에 도착을 하자 하얗게 내려앉은 먼지들이 이곳이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스틸! 스틸!"
지원은 족장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집으로 이동을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대장간 굴뚝에서는 쉼 없이 연기가 피어오를 줄 알았지만 연기도 꺼져 있었고 담금질 하는 소리 또한 밖으로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어디, 어디 간 거야?"
다른 사람에 비해 지원은 드워프 마을에 오래 정박해 있었다.
추억.
대인 관계.
그들이 만들어 준 사소한 물건들.
지원이 사용하던 공간은 그대로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드워프들의 흔적을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모두, 어디 간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드워프들과 함께했던 추억.
그리고 같이 만들었던 인공지능.
작업대 곳곳에 새겨져 있는 흔적들이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여기....... 그리고 저기......."
책상 위에 움푹 팬 흔적을 지원은 지긋이 바라봤다.
과거의 추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처음 드워프 마을에서 연구를 하기로 결정을 하고 나서 받았던 자리였다.
경계심 어린 눈빛을 하고 지원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본 드워프들이 처음 한 행동은 바로 무시였다.
분명 드워프들에 비해 정교함이나 완성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지원은 최선을 다했다.
드워프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육체적인 능력으로는 드워프들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다만, 지원이 그들과 동등하게 대결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식이었다.
설계 도면을 완성시키고 드워프들처럼 장인의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 초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호기롭게 만들어 낸 설계 도면은 드워프들에게 산산조각이 났다.
"이걸 어떻게 만들라는 거야?"
"아니, 구조적 결함은 둘째치고 그냥 이렇게 만들면 접합부는 어떻게 붙여 넣게?"
"용접으로 해결된다고? 기본적으로 용접을 하면 아무리 깔끔하게 하더라도 좌우 1mm씩 늘어나는데?"
지원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완성품과 드워프들의 머릿속에 그리는 완성품은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원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만드는 재료의 한계라는 것이다.
재료에 따라 각기 특성이 다르듯이 모든 광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드워프들에 비해 지원이 알고 있는 지식은 고작 책상머리 지식이었다.
비교적 탄성이 높다.
다른 광물에 비해 단단함이 높다.
열 변형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보만을 알고 있을 뿐, 광물마다의 특색과 장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직 직접 광물을 손으로 만지고 담금질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지식들을 드워프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내 판단이 틀렸나?'
처음으로 지원은 자신의 지식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일어나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서는 스틸이 한마디를 던졌다.
"크흠. 아무것도 할 게 없으면 저기 대장간에서 잡일이라도 돕지 그래."
"제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아니야. 잡일은 누구나 가능하지. 광물을 모를지라도 곁에서 보고 있으면 어떤 특색이 있는지 파악이 가능하지."
스틸의 입장에서는 꽤나 친근하게 도움을 던진 것이다.
결국 지원의 부족한 점을 눈치채고 그녀를 마을의 일원으로 끌어당길 심산이었다.
지원은 스틸의 조언을 받아 대장간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깡. 깡. 깡. 깡.
대장간에 들어가기 전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끼이이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여는 순간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뜨거운 열기였다.
'후우, 뜨거워 죽겠네.'
폐부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에 반사적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여, 여긴?"
"빨리 문 안 닫아? 열기 빠져나가는 거 안 보여?!"
문을 연 채로 주변을 살피다 화들짝 놀란 지원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대장간 안은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여기가 대장간인가?'
지원의 머릿속에는 망치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것만이 대장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부에서 이뤄지는 일이 엄청 많았다.
"거치적거리려면 저리 비켜서고 아니면 여기 있는 거 저쪽으로 옮겨."
광물을 화구 쪽으로 나르는 드워프가 지원에게 던지듯 일할 거리를 주고서는 자신이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일단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볼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은 스틸의 조언을 얻어 이곳으로 왔다.
아무도 자신을 반기는 이는 없었다.
퉁명스럽게 말을 툴툴 뱉으며 각자가 할 일에 집중을 하는 듯 보였다.
물론 좋은 이미지를 가진 드워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드워프도 있었다.
마을 촌장의 말을 따라 기뻐했을 뿐이지, 진심으로 다가서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절로 두 가지의 부류로 나뉘었다.
지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부류.
부정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부류.
두 종류의 사람은 딱 대면에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툴툴거리는 사람은 후자에 속해 있었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뭐 할 게 있다고 여길 왔어? 더우니까 빨리 나가."
언성은 전혀 높이지 않고 혹시나 잘못될까 그녀를 걱정하는 말투.
지원은 일단 하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오늘은 할 게 없어서요. 도와 드리러 왔어요."
"그래도 힘들 텐데?"
"쉬엄쉬엄하면 되죠."
지원은 대장간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광물을 향해 다가섰다.
'이게 철인가?'
지원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철과는 뭔가 달랐다.
'내가 아는 거와는 다른데?'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정제된 철이었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일정한 틀에 맞춰 재가공된 철괴들을 철이라고 생각했다.
원리가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지만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 철이 신기 했다.
지원이 자루에 담겨 있는 철을 옮기려고 들었다.
"흣짜."
최대의 힘을 줘 들려고 했던 자루가 스르륵 하고 올라왔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네?"
그렇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광물일수록 무게 차이가 많이 난다.
어떤 광물은 더욱 무거워지고, 어떤 광물은 더욱 가벼워진다.
같은 부피를 가졌을 때 철과 철광석의 무게는 꽤나 차이가 났다.
만약 같은 부피의 철이 자루에 담겨 있었다면 제대로 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사리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쓸데가 있는 것 같네."
지원을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드워프도 그녀가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자 툭 하고 말을 던지고 가 버렸다.
"너무 밉게 생각하지는 마, 악의적인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일부로 악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정도는요."
지원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드워프와 그렇지 않은 드워프들의 온도가 극심했다.
물론 겉으로 표현하는 것은 극도로 자제하려고 했지만 울컥울컥 튀어나오는 상황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장간 일을 가장 바닥부터 시작하는 지원의 모습을 보고서는 약간은 인식이 변화됐다.
그저 입만 놀릴 줄 아는 엔지니어에서 노력하는 엔지니어로 변화됐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지만, 그 대우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괜스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충고를 하는 척 조언을 던지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 연구를 했다면서 이런 것도 몰라? 당연하게 위치만 조절하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잖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설계 도면을 펼쳐 놓고 고민을 하고 있으면 툭 하고 던지는 말들이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험들은 지원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고 질문을 해도 정확한 해답을 던져 주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것이 좋은 성장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인간과 드워프의 삶의 주기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드워프들의 조언이 달라졌다.
물론 그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질문에 해결책을 주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녀를 좋게 보는 드워프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궁금증을 차곡차곡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 * *
지원의 책상을 오랜 시간 동안 매만졌다.
금방이라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조언을 해 줄 것 같은 다른 드워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기 여기를 만지면."
스틸이 그녀를 위해 준비해 준 책상.
이 책상에는 특별함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서로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작은 공간.
이곳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둘뿐이었다.
일정한 패턴과 행동을 반복해서 움직이면 열리는 비밀 공간이었다.
이 공간 안에는 두 가지 종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는 붉은색 하나는 푸른색.
두 가지의 종이가 나타내는 것은 누가 사용했느냐다.
붉은색 종이로 써 넣은 것은 스틸.
그리고 푸른색 종이를 사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지원이었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질투를 하는 드워프들이 늘어나면서 만들어 낸 궁여지책이었다.
마을 촌장으로써 중심을 잡아야 된다는 것이 가장 크게 와닿은 것이었다.
-지금 이 쪽지를 보게 됐을 때는 아마 마을이 황폐화됐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마을 드워프 녀석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료를 캐기 위해 어디로 다녀오는 줄로만 착각을 할 정도로 드워프들은 자신의 이동 위치를 밝히지 않지.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자꾸만 사라지는 마을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동 위치를 알리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날짜가 지날수록 명확하게 사라지는 드워프들이 들어났다.
내가 이 편지를 써 넣고 있는 지금은 50% 이상의 드워프들이 사라졌고 우리는 그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 편지를 확인할 때쯤이면 우리는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내 마지막 흔적을 남기마.
사슴뿔을 확인해 보면 내 생전 마지막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붉은빛이 들어와 있으면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난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마지막을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