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회귀빨로 지존 헌터
- 4권 10화
'밖은 온통 그리핀뿐이었어.'
건물 밖에는 인간의 시체, 그리고 몬스터들의 시체 또한 아무것도 남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핀이 모두 그 사체를 처리했거나, 다른 몬스터들이 활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래, 그리핀은 자신의 둥지로 이동해 식욕을 채우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몬스터들이 인간 사체를 회손했다면, 길거리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태욱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건물을 올라가고 있었다.
탕탕탕.
비상계단을 통해 걸어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철제로 이뤄진 다리에서 튀어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스산한 분위기를 내곤 했지만, 오히려 이쪽이 경계를 하고 올라가는 입장에서는 더욱 좋았다.
소리가 나타내는 다른 물체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열어 둔 채로 걸어 올라가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전투 환경이었다.
저벅저벅 옥상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태욱의 코끝을 스치는 하나의 향기가 있었다.
'이건 뭐지?'
그가 캐치해 낸 냄새를 영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욱의 뒤를 잘 쫒아오고 있었다.
향기가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풍겨 왔다.
"어? 이게 뭐지?"
그때였다.
영리가 이상한 것이라도 발견했는지, 태욱의 옷깃을 당기며 물었다.
영리의 발바닥 아래에는 무언가 끈적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설마?'
태욱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정보가 있었다.
환영문(幻影門).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이 녀석이 몬스터라고 불리는 이유는 간편했다.
사람을 현혹시켜 그 생명을 앗아 간다는 것이다.
생명 에너지를 흡수해 자신의 자양분으로 사용한다.
끈적한 진물이 사람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고, 그 침투력 또한 몽글몽글 다가오기에 쉽게 눈치를 챌 수는 없었다.
"빨리 이동을 해야겠군."
해결책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빨리 이곳을 탈출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환생 전에는 환영문의 위치를 파악하고 접근 금지를 내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네, 네?"
영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태욱에게 이끌려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발바닥 끝으로 전달되는 감정이 꽤나 기분이 좋았으나,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서 멈추는 순간 이곳에 매료되고 말 것이었다.
두 사람이 뛰기 시작한 지 언 10분이 지나도록 계단의 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러 개의 환영문인가?"
적어도 계단을 이처럼 뛰어 올라왔다면 이미 옥상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기에 태욱은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요?"
영리는 태욱의 표정을 보고 지금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길을 잃은 것 같아."
"길을 잃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는 그냥 비상계단 아니에요?"
태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이미 몬스터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아."
"몬스터라뇨? 전혀 그런 기색 따위는 없었는......."
영리는 주위를 살피며 뭔가 잘못돼 간다는 것을 느꼈다.
따로 시간을 재어 보지 않았어도 이미 옥상에 올라와야 될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그녀도 이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던 것이다.
"서, 설마? 노...... 노움!"
그녀는 재빨리 땅의 정령을 소환하려고 했다.
영리와 계약을 한 정령 중 꽤나 지리에 능숙한 녀석을 불러냈지만,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아마 소용없을 거야, 나도 현무를 불러 봤지만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어."
현무.
노움보다 더 높은 등급의 소환수였다.
그조차 반응하지 않는데, 더 낮은 등급인 노움이 이곳을 뚫고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일단 방법은 하나뿐이군."
태욱은 영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뭐, 뭐를 하시려고?"
갑작스럽게 눈앞에까지 다가온 태욱 덕분에 영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읏짜."
태욱이 영리를 어깨 위로 들쳐 맸다.
"꽉 잡고 있어,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이동을 할 테니까."
태욱은 환영문의 끝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계단의 숫자만큼 더욱 태욱은 압박이 돼 가고 있었다.
'일단 환영문의 끝까지 달린다.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영리를 품에 안고 뛰는 이유는 간단했다.
태욱이 최대 속력으로 이동하면 영리는 그를 쫒아오지 못한다.
더구나, 정령의 도움이 없는 이상 영리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헌터의 스킬을 지니고 있으며 육체적으로 단련됐다고 하더라도 영리는 소환수에 의존을 하는 전투형 헌터였다.
소환수와의 계약이 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상승했던 능력치 또한 떨어졌다.
헌터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태욱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판단하고 그녀를 들쳐 매고 이동을 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50층가량 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저 멀리 한 줄기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헉헉, 저기, 저긴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태욱의 발은 전혀 멈출 줄 몰랐다.
쉼 없이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빛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비상계단 한가운데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한 풍경이 눈앞에 다가오자, 태욱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게 환영문의 끝인가?"
방금 전까지 비상구와 다름없던 주변 환경은 숲속에 툭 하고 떨어진 듯이 나무 한그루와 온통 잔디밭으로 이뤄진 곳으로 변모했다.
그 끝을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면서 태욱의 머릿속에 하나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 것이다.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어?
머리를 흔들며 그 소리를 쫒아내려고 해도 뇌 속에서 울리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쉬면 편해질 거야.
신체에서 비명이라도 내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휴식을 하면 금방 편해질 것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지만, 태욱은 멀리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유심히 바라봤다.
'일단 환영문을 빠져나가야 돼.'
태욱의 생각이 미치는 순간, 그의 손은 멈출 기세가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퍼펑.
퍼퍼퍼퍼퍼펑.
손끝에서 연속으로 튀어 나가는 원거리 공격 스킬이었다.
"빛의 섬광."
"트리플 차징."
"가이드 에로우."
"공간 베기."
마법과 검술, 그리고 태욱의 주변으로 생겨나는 구슬들이 나무를 향해 튀어 나갔다.
퍼퍼펑.
펑! 퍼퍼펑.
쉴 새 없이 대지를 흔드는 공격에 나무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인가?'
생채기가 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곧 금방 그 흔적들이 모두 사라졌다.
스킬을 쏟아부으면 부을수록 회복력이 더욱 빨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어!"
태욱은 결국 하나의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것은 태욱 본인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스킬,
흉내 내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판사판이다! 초월적인 흉내 내기!"
스킬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스킬의 기본을 알아내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의 눈길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영리를 향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이미 기절해 버린 모습.
그러나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바로 자신이 이 환영문을 죽이고 벗어나는 방법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초월적인 흉내 내기로 스킬 환영문(幻影門)을 습득했습니다.]
태욱은 재빨리 스킬 창을 확인했다.
[환영문(幻影門)]
정신 공격을 통해 자신이 어떤 공간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에너지들을 조금씩 빨아들여 신체를 회복한다.
스킬을 확인하자, 태욱은 왜 자신이 공격한 나무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태욱의 눈에는 광채가 흘렀다.
마음으로 보고자 하는 것을 굳은 의지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안광이 나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나무의 주변이 금 가 있었다.
마치 깨어진 화면을 통해 영상을 보는 것처럼 나무의 주변은 여기저기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 있었다.
'이게 실체구나, 이제 이벽을 뚫어내기만 할 수 있다면?'
태욱은 파훼법을 알아챘다.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을 담아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스킬은 오롯이 나무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퍼퍼펑.
쩌저적.
퍼펑!
스킬과 스킬 사이에 유리벽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게 맞는 것이었어.'
허황된 환영에 속지 않고 마음으로 그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면 필시 그 문은 열리는 것이었다.
"트리플 블레이드!"
태욱은 나무 곁으로 다가가 혼신의 일격을 뻗었다.
콰가가가가가강!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숲속으로 보였던 주변 환경은 옥상 입구로 뒤바뀌어 있었다.
태욱의 곁에 있던 영리는 계단에 기대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영리야!"
"영리!"
톡톡.
태욱은 영리의 뺨을 살며시 두드렸다.
정신을 잃었던 영리의 감은 두 눈이 살포시 뜨였다.
"영리? 괜찮아?"
"여, 여기가?"
태욱의 품에 안긴 것까지 기억한 영리는 그 이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옥상 앞에서 의식을 잃었구나 정도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옥상이야, 이제 다 올라왔어."
"하암, 이제 옥상이에요?"
방금 전까지 환영문에 모든 진기를 빼앗겨 죽을 뻔했던 그녀였지만, 영리의 표정에는 그런 위기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단지, 조금 몸이 피곤해졌을 뿐이었다.
"이제 소환수들을 다시 불러 낼 수 있을 거야."
태욱의 말에 재빠르게 영리의 어깨를 타고 작은 정령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왔다.
갈색의 빛을 띠고 있는 녀석.
녀석의 정체는 바로 환영문에서 영리가 찾던 땅의 정령 노움이었다.
영리의 어깨에서 뒹굴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영리가 그렇게 많은 힘을 빼앗긴 것 같지는 않았다.
"상태를 보니 괜찮은 것 같네. 그렇지만, 조금 휴식을 취하고 밖으로 나가야겠어."
태욱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옥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안일한 자신의 판단 덕분에 환영문에 빠져들었으니, 이제는 진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심산이었다.
약간의 휴식으로 호흡과 체력을 되찾은 태욱과 영리는 옥상 밖으로 나갔다.
처음 그들에게 들어온 풍경은 구름 반 그리핀 반이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집단 비행을 하고 있으니, 마치 검은 구름과 흰 구름이 하늘을 수놓은 것처럼 보였다.
새하얀 구름들 가운데 또렷하게 있는 검은 구름.
비구름과 같이 흐릿한 구름이 아닌 진짜 새카만 구름.
그리핀을 처음에 바닥으로 추락시킬 심산으로 태욱은 영리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왔다.
아직 레벨이 낮은 영리의 현무와 자신의 현무가 힘을 합치면 의도하고자 하는 곳에 발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는 녀석들은 주위를 뱅뱅 돌아가며 태욱과 은비를 경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