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회귀빨로 지존 헌터
- 1권 25화
'예상보다 느리다.'
파괴력은 강할지언정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아마 이전이었다면 필시 당했겠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태욱이라면 필시 당했을 것이다.
육체적인 능력이 이처럼 뛰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드래고니아 리자드맨에게 얻은 용체린과 다른 패시브 스킬 덕분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스텟을 가진 신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 차례.'
태욱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 끝을 높이 치켜세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지막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같이 한없이 깊었다.
'일심(一心).'
태욱의 시선은 은비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털썩이는 어깨를 비롯하여, 피부 끝에서 보이는 약간의 옴나위.
혈관의 울컥거림.
세세하게 모든 것을 훑어보았다.
은비는 태욱의 시선이 고깝지 않았다.
어딘가 소름 돋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피부 위로 마치 개미들이 타고 올라오는 듯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딜 쳐다봐! 이 개자식아!"
고성을 터뜨리며 달려드는 은비는 거칠게 도끼를 휘둘렀다.
채재재재쟁.
도끼와 칼날.
두 개의 철이 부딪히면서 쏟아 내는 소리는 사람들이 양손으로 귀를 보호하게 만들었다.
듣기 싫은 소리가 강렬하게 귓가를 파고든 것이다.
"어딜 넘보는 거야!"
은비는 화가 난 듯 표정을 굳히며 태욱에게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태욱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녀의 전투 방식을 조금씩 이용하기 시작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이긴다.
직선과 힘을 이용한 공격을 감행하는 은비를 상대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적당한 완력은 필요했다.
하지만 완력으로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힌다면?
둘 중 하나는 부서질 것이다.
힘 대 힘의 충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파괴뿐이다.
태욱은 살며시 그녀의 힘을 비틀어 되돌려 주었다.
"하아아압!"
함성과 함께 깊숙하게 들어오는 은비의 도끼는, 태욱의 검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힘을 쏟아 냈다.
수직에서 대각선으로, 대각선에서 다시 수평으로 흘렀다.
도끼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강제 제동이라도 건 듯이 순식간에 멈췄다.
'으으으윽.'
탄탄한 근육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힘을 능가하는 무게를 멈추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심각한 사항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멋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상대방의 계략임을 눈치챈 은비가 스스로를 멈춰 버린 것이다.
'크헙, 타, 타격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여파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은비에게 고통은 그만큼 큰 충격이 되었다.
"하아합!"
은비는 고통을 기합으로 극복해 내려고 했다.
욱신욱신.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녀석.'
계속 공격을 해 나가는데, 뭔가 리듬이 뒤틀린다.
상대방이 방어로 인한 충격과 타격감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연속 공격을 펼쳐 나가는 것이 그녀의 성향.
하지만 자꾸 힘을 분산시켜 떨어뜨리니, 자신의 스타일을 살릴 수 없던 탓이 은비를 자꾸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내가 이거까지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은비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대련을 하는 가운데,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철칙 아닌 철칙이었다.
스킬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타격을 줄 만큼 강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을뿐더러, 심적으로 스킬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성은 자신이 손속에 여유를 두기에는 상당히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고 능히 그 타격을 흘려버리며 연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광폭화."
눈빛이 번뜩이더니, 주변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광폭화]
자신의 피를 매개체로 삼아 신체적 능력을 단숨에 상승시키는 것이다.
피부를 통해 은은하게 뿌려지는 피가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살짝 상기된 듯한 그녀의 볼은 시시각각 변했다.
창백하게 하얀색이 되었다가도 금방 붉은 모습을 보였다.
손끝으로 이어진 도끼머리에는 표면에 붉은 핏방울이 다시 맺혔다.
건들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태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퍼억!
'크헙.'
다음 순간 타격음과 함께 태욱의 몸이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타이타니악이 순식간에 피부를 감싸 출혈이 있는 타격은 피해 냈지만, 내부가 진탕이 되는 것은 막아 낼 수 없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군.'
태욱은 더욱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단순히 눈으로 쫓기에는 너무나 빠른 속도였다.
눈을 능가하는 무언가.
바로 후각이다.
비릿한 혈향이 그녀의 곁을 맴돌기 때문에 시각보다는 조금 더 후각에 집중을 했다.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에만 최선을 다한다면, 막아 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오른쪽.'
쾅!
'왼쪽.'
콰강!
판단과 동시에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은비의 제물이 될 것이 뻔했다.
"샌님? 방어만 한다고 해서 해결이 나나? 날 수하로 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약간의 여유가 생긴 은비는 태욱을 비꼬듯이 이야기했지만, 실상 마음이 졸여지는 것은 은비 자신이었다.
쉴 새 없는 공격을 통해 이점을 가져가려 했던 자신의 전투 방법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는 녀석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도발이라도 넣기 위해 말을 했지만, 되레 부담감만 배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왜? 이 정도 방어도 못 뚫어? 결국 너도 별거 없는 거군."
태욱의 말이 불씨가 되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붉은색 피의 아우라가 점점 짙어졌다.
힘을 쓰면 쓸수록 체내에 보관하고 있는 피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강한 힘은 빠른 에너지 소비를 나타낸다.
공격에 무척이나 자신 있던 은비였기 때문에 그녀의 프라이드를 살짝 건든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했다.
"어디까지 네 웃음이 나오는지 보겠어."
이제 그녀의 표정에서 장난기는 어딜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마음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
"광폭난무(狂暴亂舞)!"
태욱은 동시에 현무를 소환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낼 방어막을 순식간에 둘렀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보호막이 순식간에 태욱의 몸을 감쌌다.
은비의 공격은 유효 사정거리에 들어와 좌우로 도끼를 눕히며 공격했던 방식을 버리고, 상단에서 하단으로 빠르게 내리찍은 방식으로 바뀌었다.
쾅!
엄청난 충격과 함께 보호막에 실금이 그어졌다.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냈을 뿐이다.
하지만 은비의 공격은 단 한 번이 아니라는 듯이 연속으로 내리 찍혔다.
쾅!
콰직. 콰지지직.
콰쾅!
결국 세 번의 공격을 막아 낸 채 현무의 방어막이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재빨리 다음 방어막을 펼쳤다.
단 일격이라도 막아 낼 수 있다면 방어막이 부서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마력의 보호막."
"실드."
"수호의 가드!"
펼쳐 낼 수 있는 모든 방어 스킬을 꺼냈다.
하지만 그 스킬들도 정확하게 한 방당 하나씩 깨져 나갔다.
쾅!
쨍그랑.
쾅!
쨍그랑.
쾅.
콰드득.
세 개의 스킬이 세 번의 공격을 막아 내고, 현무가 세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단 여섯 번의 공격으로 태욱의 모든 방어를 뚫어 낸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다.'
은비는 그의 방어막이 없어지자 마지막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후우우웅.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도끼날을 막아서는 얇은 검.
검과 같이 신체를 두 동강 낼 생각으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콰직.
부딪힘과 동시에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강한 공격력에 도끼도 스스로의 내구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콰득, 콰드드득.
소리와 함께 목표물인 검과 태욱을 갈라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제, 내 차례인가?"
태욱은 산산이 부서져 비산하는 도끼머리 사이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은비가 허무한 마지막 공격을 마치자 주변을 감싸던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뜨거운 체온에 의해 모두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쿨럭."
가슴을 타고 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기침이 흘러나왔다.
입 안을 타고 흐르는 비릿한 철의 맛.
강제로 피를 태워 힘을 쏟아 낸 장기가 타격을 입었는지, 울컥거리며 피를 거꾸로 보내고 있었다.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핏물을 막지 못한 채, 공중으로 붉은 물방울이 수를 놓았다.
결국 자신의 신체 리듬을 파악하지 못한 채, 광적으로 공격만 감행하다 스스로 자멸한 셈이 되었다.
"나, 나는......."
힘들게 한마디씩 내뱉는 은비를 태욱은 그저 바라보았다.
"아직, 지지...... 않았어."
"그럼 이걸로 하지."
그 말을 들은 태욱은 검을 은비에 목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은비의 목숨을 앗아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녀를 섭외하러 온 것인데, 자신의 발아래 두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기에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검이 목에 닿자 은비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졸도.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에너지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뇌로 보내는 것을 가장 먼저 줄여야 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니, 순간적으로 그 힘을 끊었다 다시 연결을 해 버리는 것이다.
신체의 위대함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전장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반드시 죽음에 달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심이었고, 주변에 보는 사람도 많았다.
태욱 역시 회복 스킬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은비의 전투는 패배로 마무리된 것이다.
회복 스킬을 걸어 준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은비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거지?"
은비는 마치 숙취가 있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두통이 있는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자극했다.
체내에 있는 피를 일시적으로 모두 소모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몸에 쌓인 젖산이 타격을 입힌 것이다.
"기억 안 나나?"
태욱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비는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난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속은 지켜야지? 여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나? 하하하하."
"그렇다, 여아일언중천금이지. 한데, 조금 억울한 것 같은데?"
"뭐가? 제 풀에 지쳐 있는 너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으니, 내가 이긴 거 아닌가?"
태욱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약속은 자신이 했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태욱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쉽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약이 올랐다.
"그, 그래! 내가 지킨다, 지켜!"
씩씩거리며 대답하는 은비와 함께 태욱은 다시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