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회귀빨로 지존 헌터
- 1권 24화
광전사 은비는 여성으로서 갖기 힘든 2미터에 육박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키가 크다고 해서 몸이 우락부락하다거나 근육을 뽐내는 것은 아니었다.
쫙 빠진 각선미를 비롯하여 적당하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그녀를 더욱 건강미 넘치게 만들어 주었다.
만약 비율을 유지한 채 키만 작았다면, 그녀의 몸매를 보고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육덕진 외형의 환상적인 여성.
다만 비율이 좋다고 마냥 예쁜 체형은 아닐 것이다.
2미터에 육박하는 키를 가지고 있는 여성을 보고서는 육덕지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아니, 말을 내뱉은 사람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의 일격을 맞고 저세상으로 가 버린 탓이었다.
이런 은비가 자신의 체구에 맞는 엄청난 크기의 도끼를 휘두르면서 사냥을 하니, 어느 남성이 쉽게 달려들겠는가?
"그래도 꽤나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했었는데, 벌써부터 그러려나?"
태욱의 기억 속의 은비는 남자를 잡아먹는 육식계 여성으로 유명했다.
'광혈의 도끼 전사'라는 직업을 과시하듯 여자답지 않게 성격이 굉장히 와일드했다.
싸움을 하기 위해 시비 붙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신을 꺾는 이만 따를 수 있다는 이상한 신념을 가진 녀석이었다.
태욱이 대구로 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에 지원이 온다면 그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자신 말고는 그녀의 힘을 이겨 낼 능력을 지닌 이는 아직 태욱의 주변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태욱이 바라보는 것은 시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능성은 줄어든다.
나중에 더욱 성장했을 때, 그녀와 전투를 치르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무작정 대구로 향하는 길에 올랐지만 그녀를 찾기란 힘이 들었다.
아무리 장신의 키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넓은 도시에서 찾는 것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온 곳.
<무엇이든 해 드립니다.>
검은 배경에 흰색 글씨로 쓰여 있는 간판 말고는 다른 설명이 없었다.
저벅.
저벅.
태욱이 걸어 들어가자 안쪽에서 알림 음이 울렸다.
"짹짹짹짹."
저렴한 새소리가 문 안쪽에서 울리는데 단지 사람이 찾아오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 위한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문에 도달했을 때, 자동문 열리듯이 수동으로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무엇이든 해 드립니다."
어두운 방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태욱이 찾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아직 태욱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남자의 질문에 적당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태욱의 행동에 그가 손님일 것이라는 착각에 들어간 남성은 양손을 비비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영업용 멘트를 날렸다.
"헤헤, 어떤 분을 찾으러 오셨을까?"
간사한 목소리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남성의 정체는 바로 문지기였다.
이윽고,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가까이 다가간 태욱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알 거야, 은비라고."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욱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문지기는 표정이 와락 구겨졌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고 다시 물었다.
"은비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과 신체적인 특징을 알려 주시면 찾아보고 연락을 따로 드리겠습니다마는......."
문지기는 눈치를 살피며 태욱의 동태를 파악했다.
자신의 두목을 찾는다는 남성의 호흡부터 눈빛, 그리고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찾아왔는지.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은비는 이곳 흥신소뿐만 아니라 골목 상권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간혹 던전에 사냥을 가기도 하면서 복합적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녀에게 한 번 생명의 구함을 얻었었다.
처음 던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간 날.
몬스터에게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 주고,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에게 기회까지 준 사람이었다.
은비는 문지기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한 두목이었다.
"키 2미터가량, 몸무게 정확하게 모름. 커다란 도끼를 사용하고 있고, 아마 이곳의 대장이라고 알고 있지."
태욱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정확하게 은비를 그려 낼 수 있는 설명이었다.
그녀를 확신하는 듯한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더 이상 고객을 위한 미소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는 물론, 부들부들거리는 어깨와 턱선, 그리고 가빠진 호흡까지 이미 그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겉으로 다 표현해 버린 것이다.
"서, 설마요? 그런 분이 여기 계실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그 모든 것을 부정했다.
목소리의 끝이 떨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떨리는 시선 역시 은비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 줬다.
'아무래도 여기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태욱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수북하게 먼지가 가득한 사무실 가운데, 유독 한곳만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쪽인 것 같군.'
확신을 가진 태욱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앞을 문지기가 손을 들어 막아 세웠다.
"어딜 가시려고?"
사나운 안광이 태욱을 찔러 버릴 듯했다.
"안쪽을 좀 살펴보고 싶어서."
서로가 존중을 해 주는 시간은 이미 지났다.
결국 시한폭탄의 심지에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휘릭.
태욱은 막아서는 문지기를 밀치고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움직였다.
다른 한 손을 품에 숨기고 있던 문지기는 재빠르게 단검을 뽑아 들었다.
휘릭.
뽑아진 단검이 재빠르게 태욱을 향해 움직였다.
짧은 근거리, 금방이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뻗어 내는 단검을 태욱은 유려하게 피해 냈다.
회전을 가미한 정확한 회피와 더불어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은 절로 반격에 나서게 된 것 같았다.
퍽.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오랜 시간 신체를 수련한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아직 단검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칭찬해 줄 만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태욱의 상대가 될 리 없을뿐더러, 2차적으로 가해지는 공격을 막아 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복부.'
그는 공격하려고 했던 문지기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크헙."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이 흘러나왔다.
호흡을 정확하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거친 호흡을 하면서 앞으로 고꾸라지는 상대를 부축한 태욱은 그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러게, 조금 찾아본다니까?"
털썩.
태욱이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발목에 느껴지는 이질감이 있었다.
탁.
어떻게든 손을 뻗어 태욱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는 행동이었다.
"아, 안...... 돼! 갈...... 수...... 없......어......."
억지로 숨을 참아 가며 한마디씩 내뱉는 문지기의 의지와는 달리, 이미 손끝의 힘은 조금씩 풀려 나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기절을 해 버린 것이다.
'이거, 힘 조절이 조금 부족했군.'
태욱 역시 기절까지 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을 제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리고 휘두른 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반격을 감행한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었다.
이윽고 어두운 사무실 내부에 감춰져 있던 방이 하나 보였다.
'저기인가?'
점점 문과 가까워질수록 안쪽에서는 혼신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항. 아항."
"하악. 헉, 헉."
교태스러운 고음의 고성과, 가쁜 숨을 힘들게 내쉬는 남성.
두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소리를 봐서는 대충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열혈 남녀 두 명이 합방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군.'
태욱이 문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지나 싶더니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렀다.
"아니, 벌써 끝났어? 이거 못 쓰겠구먼."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여성의 말과 함께, 남성이 억울하다는 듯이 핑계를 댔다.
"헉헉. 저, 저기 그렇게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시끄러! 넌 필요 없어."
볼 장 다 본 것인지, 잠시 후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여성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넌, 뭐야?"
여성은 태욱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혀끝으로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은비와 태욱의 첫 만남이었다.
"뭐, 일단은 영입 제안이라고 해야 되나?"
태욱은 그녀의 눈을 바라본 채로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터무니없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은비였다.
"영입 제안? 그렇다면."
그리고는 옆에 있던 손도끼를 그대로 집어던졌다.
휘릭. 콰직.
날아간 도끼가 그대로 나무 벽에 꽂혀 버렸다.
"환영 인사치고는 과하군."
"글쎄, 그건 두고 봐야 될 일 같은데?"
태욱과 은비는 서로 눈싸움을 시작했다.
팽팽한 실을 당기듯 긴장된 분위기가 흥신소 내부를 가득 채웠다.
* * *
태욱은 호전적으로 나오는 은비를 데리고 흥신소 앞에 있는 커다란 공터로 이동했다.
"여기는 관람객이 많으니, 한 입 가지고 여러 말 안 하겠지?"
"여아일언중천금이다. 여자가 한 말은 천금보다 무겁다는 뜻이지."
은비가 이야기하는 여아일언중천금.
태욱과 거래를 한 것이다.
이기는 사람이 상대방의 수하로 들어가는 것.
서로가 동의를 한 상황인 것이다.
태욱과 은비는 널따란 공원에서 서로를 지켜보았다.
서로 움직임조차 없었다.
'기다린다.'
이미 상대의 스타일을 알고 있는 태욱은 그 자리에서 틈을 내주지 않고 은비가 덤벼들기를 기다렸다.
은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당히 움직임이 좋았어.'
분명 처음 자신이 손도끼를 던졌을 때 겁을 먹기는커녕, 효율적인 움직임을 통해 간단히 도끼를 피해 냈다.
어중이떠중이 녀석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강한 상대에게 더욱 큰 호승심을 느끼는 은비로서는 다가오는 전투를 마다할 리 없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덤벼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넘쳐났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기를 1분.
2분.
3분.
5분이 지나도록 서로의 움직임은 없었다.
마치 돌덩이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듯, 얕은 호흡만이 두 물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슬슬 덤벼들 타이밍인데.'
태욱은 그녀의 참을성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반드시 달려들 거라는 걸 예측했다.
"야, 이 자식아!"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온 은비.
그녀는 거대한 도끼를 이용하여 태욱을 반 토막 내려고 했다.
후웅.
휘둘러지는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무서운 소리를 냈다.
태욱의 신형이 갈라지듯이 쪼개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은비는 손끝의 촉감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피했다?'
사람을 가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태욱은 딱 도끼의 사정거리만큼 뒤로 움직였다.
50센티미터의 백스텝.
고작 그 정도의 움직임으로 화려한 은비의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