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층(4)
고오오···.
근처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수 천 개의 대규모 마법이 일행을 노리고 있을 그 순간.
탑의 의지는 손을 들어 뒤틀리던 공간을 틀어 막고자 했다.
콰지직!
“하하하!”
진영이 넘어 오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탑의 의지가 폭소를 터트리던 찰나.
파직!
강렬한 붉은 스파크와 함께 비틀어 막았던 공간이 깨부숴졌다.
“하하···?”
진영의 얼굴을 확인한 탑의 의지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렇게 간단히 100층으로 올라 올 줄이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는거지?”
반면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진영의 이름을 불렀다.
“진영이 형!”
“파트너.”
“야, 일단 저 마법 좀 어떻게 해봐···!”
“진영씨.”
이번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
“탑의 의지. 널 쓰러뜨리러 왔다.”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둘러 본 뒤, 진영이 앞으로 나섰다. 탑의 의지는 비아냥 대듯이 말했다.
“뭐, 이진영 네가 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녀석의 당당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허공에 그려진 수 천 개의 금빛 마법진이 일행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스윽-.
“!”
그러나 진영이 공간을 향해 왼손을 휘젓자 모든 마법이 일제히 사라졌다.
텅 빈 하얀 공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탑의 의지의 눈썹이 올라갔다.
“호오···.”
진영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말할 게 있어.”
진지한 진영의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저 녀석은 상상 이상으로 강해. 나조차 못이길 정도로.”
“그렇게 강하다고요?”
아직 일행은 녀석과 싸우기 전의 상황.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영이 끄덕였다.
“그러니 내게 힘을 빌려줘.”
짧은 이야기였지만, 일행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뭐야, 난 또 포기하고 초월자나 하자는 줄 알았네.”
“진영이 형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한 번 염태준을 쏘아준 김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이 형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요.”
이어서 김영훈, 주오령, 염태준도 말을 이었다.
“저도요.”
“필요하다면 써라.”
“······. 그래 좋아.”
모두가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진영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으며 목적이 있었고 결과가 있었다.
“모두 고맙다.”
그들을 바라보는 진영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사무쳤다.
한 때 신화준과 100층에 오르기를 소망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100층에 올랐더라도 승리할 순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탑의 의지의 강함을 떠나서 그들은 팀이 아니었고 동료가 아니었다.
신화준이 끌고 왔던 부하들에 불과했다.
“정말 고마워.”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진영의 동료였다.
모두의 힘을 이어받은 진영의 눈에서 다시 한 번 홍염이 일렁였다.
“그럼, 시작하자. 탑의 의지.”
“얼마든지. 그런데 작별인사는 따로 안나눠도 되나?”
검은 어둠과, 별들의 빛이 진영과 탑의 의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공간이 분리되며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했다.
[ 모든 이계 존재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그들도 진영이 승리하길 바라고 있을 거다.
달칵.
진영은 품 안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이켰다.
오색찬란한 빛이 진영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절대자의 비밀창고에 있었던 물약.
효과를 알 수 없었던 물약의 효과가 지금은 보였다.
[ 이제 잠시 동안 당신이 행하는 일의 모든 확률이 100%가 됩니다. ]
물약의 효과에 반응하듯 탐욕의 왼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탑의 의지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아이템도 있었군···. 아직까지도 내가 모르는 게 정말 많아, 즐거울 정도야.”
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우웅!
우주의 한 공간을 뚫고 검은 손이 튀어나왔다.
손은 탑의 의지의 심장을 움켜쥐더니 곧장 터트려버렸다.
순식간이었다.
“커허억!”
경악과 동시에 탑의 의지가 눈을 부릅떴다.
“시, 시간검? 네 놈이 그 기술을 어떻게 훔쳐낸거지?”
녀석은 입에서 줄줄 흘러 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물었다.
대답해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설마, 회귀한건가?”
* * *
“······!”
진영이 훔쳐낸 기술은 더욱 강해진다.
“커헉!”
이어지는 시간검과 공간검 그 너머의 기술이 탑의 의지를 헤짚어 놓았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피를 흘리던 탑의 의지가 쿨럭하며 피를 뱉어냈다.
그의 얼굴에 여유로움은 온데 간데 없었다.
분노.
오직 분노만이 녀석의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이 자식이! 내 세계를 훔치려고 드는거냐! 넌 살아 본 적도, 살 수도 없는 까마득한 세월을 고작 한순간에 훔치려하다니! 이런 건방진!”
태양과도 같은 별 하나가 터지며, 일대의 행성을 삼키며 폭발을 이어 온다.
검은 공간이 근처의 빛을 빨아 들이며 모든 것을 흡수해 낸다.
“이제 그만 죽어라! 죽어서 얌전히 그 힘을 넘겨라!”
탑의 의지가 삼켜 온 세계가 만들어 낸 기술과 마법이 융합되어 죽일 듯이 몰아쳐 온다.
행성 하나가 단칼에 베어지고, 시간 자체가 뒤틀리는 검술이 진영의 본질을 노리고 달려든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고보면 그 모든 기술은 진영의 것이 되어 있다.
“뭐, 뭐냐? 몇 번째. 대체 몇 번째 회귀냐?”
탑의 의지가 당황하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을 때.
진영은 1만 번째 회귀를 하고 있었다.
탑의 의지가 품은 세계가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기술이 진영의 손에 의해 소실되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지식의 보고처럼 녀석이 알고 있던 것들이 사라진다.
탑의 의지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 도둑놈이···! 고작 훔친 기술로 네 놈이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는 진영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내야 할 정도였다.
진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너도 다른 세계를 억지로 집어 삼키고, 그 지식을 사용하는 것 뿐이지 않나?”
푸슉!
진영의 검이 계속해서 녀석을 꿰뚫었다.
회귀가 반복 될 수록 진영이 알게 되는 세계의 수가 늘어난다.
비정상적으로 과학이 발전 한 곳.
예술만이 신적으로 숭배되던 나라.
증기과 기계 장치가 발달한 세상.
마법이 신성시 되며 검술이 금기시 되는 세계.
과거에 탑이 먹어 치웠던 수 많은 세계가 진영의 손에 쥐어 쥐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안돼, 내 거야. 그건 내거라고!”
이제는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이었다.
확실히 탑의 의지가 가진 힘은 그 무엇보다 강했다. 모든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나빴다.
부당하게 얻어낸 수 많은 재물들.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자신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자랑한다면.
노리고 싶을 수 밖에 없다.
도둑으로서 훔치고 싶어지는 법이다.
샤아아-!
진영의 왼손이 거듭해서 푸른빛을 띄고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 빛이 마치 은하수처럼 우주의 하늘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탑의 의지가 가진 세계는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었다.
“회귀, 빌어먹을 회귀 도둑!”
이제 진영이 가진 세계가 탑의 의지의 것을 초월했다.
녀석은 압도적인 열세에 몰려 있었다.
몸이 수복 되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진영의 공격에 의해 찢겨나간 본질이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수 만 번의 회귀가 지나고.
털썩.
탑의 의지는 무릎을 꿇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이 세계를 떠나지. 다신 두 번 다시는 이 세계를 넘보지 않겠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두 손으로 빌며 애원한다.
“원한다면 지금까지 네가 가져간 것은 모두 네 것으로 해도 좋아. 그러니 살려만, 살려만 줘.”
그런 녀석을 진영은 무표정하게 노려보았다.
녀석이 집어 삼킨 세계의 사람들은 탑의 일부로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했다.
끝나지 않는 세계의 한 조각으로 시련의 일부가 되어 다른 세계의 플레이어들과 싸우고, 죽는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잊어 버린 채, 게임의 NPC처럼 살아간다.
지혜로운 마족이었던 자, 명예를 중시하는 오크도, 정의롭던 리자드맨들조차 마수가 되어 죽는다.
세계를 멸망 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눈 앞의 녀석이 저지른 짓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진영은 이렇게 답했다.
“그래, 살려주지.”
“저, 정말?”
왼손이 탑의 의지를 향했다.
샤아아···.
진영은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세계를 훔쳐내었다.
그것은 탑의 의지 스스로의 세계.
이제 멸망의 탑 그 자체가 진영의 소유가 되었다.
더 이상 탑의 의지는 초월적인 무언가가 아니었다.
희미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녀석의 형체가 이제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 고맙다. 정말로 고마워···.”
비루하고 늙어빠진 고블린 한마리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녀석에게는 티끌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때 그가 수많은 세계를 집어 삼켰던 마왕이나 다름 없는 자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정신을 차린 탑의 의지가 그제서야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이게 누구지···?”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진 녹빛의 손이 그 자리에 있었다. 녀석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더니 진영을 바라보았다.
“고블린인 것 같군.”
“아니, 이럴리가 없어. 이 내가, 내가 겨우 허접한 고블린이었다고? 더러운 흙바닥에서 야만스럽게 삶을 이어가는 벌레보다 못한 고블린? 그럴리가. 그럴 순 없어. 거짓말이야. 뭔가 환술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가? 대체 이게 무슨···?”
녀석은 더 이상 탑의 의지조차 아니었다. 하물며 탑 또한 아니었다.
터억.
진영은 뒤쪽의 검은 공간으로 늙은 고블린을 밀어 넣었다.
“으윽?”
비틀거리며 밀려난 녀석은 가까스로 검은 구멍에 떨어지지 않은 채, 그 벼랑 끝을 잡았다.
“사, 살려준다며!”
“난 살려줬다. 아마 저기에 있으면 오랫동안 살 수 있을거다.”
“저, 저기가 어딘데?”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흉악한 마수들이 벌떼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잘 봐라, 너도 잘 알텐데. 멸망의 탑이 집어 삼킨 존재들, 그 누구보다 네 놈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들이잖아. 저렇게 보여도 모두에게 제대로 된 지성은 남아 있다. 그러니 소원대로 죽지 않고 영혼을 속박당한 채 영원히 고통 받을 수 있을 거다.”
퍼억.
“아, 안돼에에에에!”
그것을 마지막으로 늙고 약해진 고블린이 공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동시에 많은 메시창이 진영 앞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멸망의 탑이 당신을 진정한 주인으로 섬깁니다. ]
[ 모든 이계의 존재들이 당신의 승리···. ]
[ 이계의 근원 당신을···. ]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우주였던 공간이 하얀 공간으로 돌아오고,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100층 전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틀.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걸까.
심지어 정보창도 전혀 읽어지지 않았다.
아득한 현기증이 몰려 오고 있었다.
털썩.
진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이런···.”
몸의 일부가 허공으로 흩날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재가 하늘로 날리듯.
진영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너지는 새하얀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보이는 마지막 정보창까지도.
이것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 이계 규율에 따라, 그 규율을 어긴 자의 존재가 말소됩니다. ]
[ 회귀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
‘결국 여기까진가.’
예정된 결말이었다.
더 이상 손끝 하나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진영은 바닥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둑이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왜 도둑이었을까.
멸망의 탑은 가장 자신과 어울리는 클래스를 부여해준다.
그러나 삶을 살아오며 도둑질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회귀 전에도 마수의 것을 훔쳤을지언정, 타인의 것은 훔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건가.’
훔치지 않았기에, 무엇을 훔쳐야 될지를 알았기에 여기까지왔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훔쳐내는데 성공했다.
결국은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둑이란 클래스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진영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된거지.’
세계는 구했다. 가족들도, 동료들도 모두가 안전하다. 오르지 못했던 탑은 끝까지 올랐다.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때, 저 멀리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릴 뿐이었지만.
“진영이 형!”
“야, 이진영 이 새···!”
“파트···!
이 순간에도 몸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왼손과 몸통 뿐.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확인한 진영이 눈을 번쩍 떴다.
‘되기는 뭐가 돼. 젠장, 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진영은 살고자했다.
“끄으···.”
이를 악물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였다.
왼손의 힘줄이 두드러지고, 진영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제발, 되라!’
여기까지 왔는데 죽는 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살려고 시도는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진영의 의지에 반응하듯 왼손이 꿈틀거렸다.
찰나의 시간이 수 년처럼 느껴졌다.
터억.
이윽고 왼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훔쳐낼 것은 하나였다.
이계의 규율이 자신의 존재를 지워내기 이전에.
스스로를 훔쳐, 나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솔직히 말해 억지였다.
스킬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다. 그저 진영이 지어낸 생각이었다.
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훔친다니.
‘크윽···!’
하지만 억지여도 좋았다.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샤아아-!
마지막 푸른 빛이 진영의 왼손에서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