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공략(3)
진정 저것이 플레이어란 말인가.
【 아스리엘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모양이군. 】
진영의 진언에(眞言) 초월자들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안에 담긴 격은 초월자조차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앞에서 그들의 격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와 쓰나미 어찌 비교하겠는가.
그들의 군단은 진영의 것이 되었으며, 군단의 능력치 또한 진영의 것이 되었다.
【 ······. 】
이제는 그들의 차례였다.
경악을 넘어선 충격에 초월자들의 사고는 완전히 마비 된 상태였다.
정점만이 가질 수 있는 붉은 왕관.
그것을 쓰고 있는 진영은 탑이 공인한 최강자였으므로.
한참을 침묵에 잠겨 있던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 아스리엘···. 그를 불러 오겠다. 】
형언할 수 없는 압력 앞에 그들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붉은 왕관은 그저 상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탑에 기거하는 초월자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행사한다. 그것이 탑의 시스템이었고, 초월자들은 탑에 묶인 존재였으므로.
그런 그들을 향해 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는 법. 유일하게 존재해야 할 붉은 왕관이 두 개가 되었다.
왕관을 타고 넘어오는 차원이 다른 존재의 기척은 분명 아스리엘의 것이리라.
【 그,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겠네. 】
【 그래, 더 이상 무의미한 소모는 피하고 싶군. 자네도 무의미한 힘의 소모를 원하는건 아닐테지? 】
바로 직전, 기세가 등등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건지.
초월자들은 진영의 눈치만 보며 빠져나갈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들이 자존심을 버릴 정도였다.
적어도 아스리엘에게는 자비가 있었으며 동류라는 인식이 있었다. 멸망의 탑이 건재하기 위해서는 초월력을 제공하는 초월자들의 존재가 필연적이었기에 그들은 아스리엘 앞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진영은 목적 자체가 달랐다.
‘저 놈은 플레이어다. 끝까지 초월의 좌에 오르지 않은 채, 탑을 공략하고자 하는 플레이어.’
여지껏 진영은 마주친 초월자를 남김없이 제거해 왔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진영이 초월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라는 증거였다.
죽기 싫다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물러서야 했다.
‘이대로 간다면 아스리엘과 이진영은 맞붙게 된다. 우리는 그 직후를 노리면 되는 거지.’
그들이 고고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실감하는 지금 그들은 뒤로 숨어 다음을 기약하고자 했다.
진영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 그래, 너희들의 선택이 그렇다면 존중해주지. 】
그 말에 초월자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지기 시작했다. 붉은 왕관을 쓴 진영의 명령에는 상당한 강제력이 있었다. 진영이 보내준다면 거리낌 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후에 아스리엘이 승리하던 진영이 승리하던 그들은 명분을 챙길 수 있었다.
붉은 왕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 고, 고맙네. 그럼 우린 가보겠네. 】
【 보기보다 자비로운 면이 있구만. 】
초월자들은 꼬리를 내리며 당장이라도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진영의 입이 다시 열렸다.
【 나는 아직 가도 좋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
멈칫.
그 말에 초월자들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선택을 존중해준다는 게 가란 의미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초월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영의 입가에 있는 미소가 진해졌다.
이렇게 많은 초월자가 친히 행차해주셨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 물론, 살려 보내주긴 할거다. 】
진영의 왼손에서 푸른빛이 솟아났다.
[ 대상의 스킬 ‘공간 분리’를 훔치셨습니다. ]
[ 특성 : 훔친 스킬이 압도적으로 좋아집니다. ]
[ 공간 분리(SSS)가 절대 공간(EX)로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
쩌억.
푸른 빛과 함께 하늘이 갈라졌다.
갈라진 하늘은 순식간에 초월자들을 감쌌다.
그들이 있던 세계와 진영이 만들어낸 공간이 뒤집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 가진 거 다 내놓으면 말이지. 】
이제 그들은 진영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동의하지 않더라도 가져갈 것이다.
초월자들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 * *
1일 후, 멸망의 탑 98층.
3일이 걸릴 거라고 이야기했던 주오령의 말과는 달리 98층까지 올라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쓸모 없게 느껴지는군.”
맥 실버가 주오령과 수호자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을 바라보고선 탄식했다.
지나온 자리에는 개미 하나, 풀 한 포기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마수들이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멸망에 탑에 들어와서 공략대원들이 한 일이라고는 미처 정리되지 않은 잔몹 몇을 상대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그것도 5명이 전부 달라붙어서 겨우 처리할 정도였으니.
“아, 불평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좋다는 의미지.”
수호자와 주오령을 향해 맥실버가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상상을 초월한 경지를 바라본 이의 허탈함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불가능할 거라 여겨졌던 멸망의 탑이 실제로 공략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예상보다 빠르네요. 3일 예정이었는데 1일만에 여기까지 왔잖아요.”
검성 클래스의 일본인 미야자키가 저 멀리에 있는 거대한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다음층이 99층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100층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해보였다.
마수를 전부 처리한 주오령이 터덜터덜 그녀의 옆으로 걸어왔다.
“99층에서 2일이 소모된다. 1시간 휴식 후 출발한다.”
바닥에 아무렇게 주저 앉은 주오령은 명상을 시작했다. 부족한 설명을 메꾸려는 듯 김지훈이 다가왔다.
“진영이 형 말에 따르면 시스템에 의한 시험을 받게 된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최소 인원수는 5명.
“그리고···. 여러분 5명이서 그 시련을 통과하셔야합니다.”
“잠깐만, 그러면 그동안 수호자랑 저 리더는 어디에서 뭘하는건데?”
“먼저 100층으로 진입해 이진영 플레이어와 접촉할 겁니다.”
그 말의 의도를 알아낸 맥 실버가 미소를 지었다.
“즉, 우리보고 미끼가 되라는 거군.”
시스템 때문에 최소 5인은 99층의 보스와 씨름하고 있어야한다. 그들이 미끼가 되는 동안 빠르게 99층을 돌파, 최후의 층으로 알려진 100층에 도달한다.
“그것만하면 멸망의 탑을 공략할 수 있다라···. 그런 미끼라면 얼마든지 되어주지.”
“아무것도 안하고 이대로 끝나는가 싶어 오히려 아쉬웠는데 잘 됐습니다.”
이견은 없었다.
탑을 오르며 수호자와 주오령의 힘을 직접 보았다.
최선의 수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탑의 공략.
“그렇다고해서 여러분을 사지로 내모는 건 아닙니다.”
빛의 사제의 강력한 버프.
그리고 그들을 보조해 줄 안내인이 하나 있다.
우우웅.
“정말로 여기까지 올라 올 줄이야. 미치겠군.”
토끼의 모습을 한 수인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아직 해치우지 못한 마수가 남아 있었나!”
쉬고 있던 공략대원들이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유자벨은 천천히 = 양 손을 들어 올렸다.
“워, 워. 난 아군이야. 네 놈들 편이라고.”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벨이라고 하는 마수입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공략은 이 녀석이 도울겁니다. 계약으로 종속되어 있으니, 배신할 생각은 안해도 될거에요.”
공략대원들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멸망의 탑을 공략하는데 마수의 도움까지 받을 줄이야.
대체 이 사람들은 멸망의 탑에서 얼마만큼 큰 그림을 그리고 실행해 왔단 말인가.
그때였다.
쿠우웅!
거대한 굉음과 함께 멸망의 탑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의 근원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멸망의 탑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탑 고유의 공간이 붕괴되며, 바깥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벌써 이만큼 무너졌단 말이야?”
명상에 잠겨 있던 주오령이 눈을 뜨는 것도 동시였다.
“예정보다 일찍 출발해야겠군.”
그 사실에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공략대원들이 쥔 주먹 위로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 빨리 끝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되찾자고.”
“갑시다. 99층 보스는 우리가 맡을테니까, 빠르게 끝내 주십쇼.”
마지막 99층 공략이 시작되었다.
* * *
초월신 아스리엘.
【 ······. 】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다섯의 초월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탑의 주인에 걸맞은 그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최고위 무장을 걸치고 있었다.
창세급.
멸망의 탑 시작부터 존재해왔다고 여겨지는 극상의 무구들.
그러한 아이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워져 있건만,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 초월신 아스리엘. 그대의 판단은 틀렸소.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의 측근 하나가 입을 열었다. 굳이 입으로 꺼내지 않더라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스리엘은 부정했다.
【 아직, 아직은 아니지. 】
이진영은 자신만의 공간을 펼쳐 초월자들을 인질로 잡고 아스리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스리엘을 찾지 않았다.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여지껏 이만큼 성장한 플레이어가 있었던가? 없었다.
탑의 역사상 초월자들이 단체로 무릎을 꿇었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절로 이가 악물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최측근 초월자들의 눈빛조차 싸늘해지는 순간이었다.
【 아스리엘,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네. 그 자의 힘은 일찍히 멸망의 탑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시스템의 한계를 벗어나 있어. 】
【 공존하는 방법이라도 찾아야하지 않겠는가. 】
【 자네의 군대가 살아 있을지라도 지금 이진영에게 대적하기엔 무리라네. 】
대다수의 초월자들의 힘조차 훔쳐갔을 이진영. 그가 얼마나 강해졌을 지는 이제 어림짐작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스리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스리엘과 초월자들의 고유 공간을 뚫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세계는 찬란했다.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이 빛나고 있었다.
【 이 세계를 볼모로 잡고, 이진영을 죽이면······. 아니지. 괜한 소리를 했군. 】
스스로 내뱉어 놓고도 어리석은 소리였다. 인질이라면 이미 진영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아스리엘이기에, 모든 초월자의 정점에 있기에 알고 있었다.
초월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멸망의 탑은 절대적이지 않다.
탑은 초월자와 공생하고 있다. 초월자의 탐욕이 탑을 살찌우고, 다음 세계로 이동하는 동력원이 된다.
그만한 수의 초월자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멸망의 탑이 공략 될 수도 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공멸조차 아니었다. 애초에 계산자체가 틀려 먹었다. 이진영의 힘이라면 이 세계를 지키며 자신을 상대하고도 남는다.
【 ······. 】
아스리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지막 수단에 거는 수 밖에 없었다.
고오오.
그가 손을 뻗자, 허공이 일렁이며 진영이 만들어낸 고유 공간으로의 길이 열렸다.
【 왔나, 아스리엘. 기다리고 있었다. 】
붉은 융단이 쭉 깔린 길, 모든 초월자들이 머리를 조아린 채 양 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 끝, 호화롭게 장식된 드높은 왕좌에서 진영이 손짓했다.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밀려오는 광경이었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 이게 뭐냐는 표정이군. 다 훔쳤다. 초월자들 좋은 걸 참 많이도 가지고 있던데. 】
패왕, 그보다 더한 마왕을 연상케하는 진영을 막을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창세급 유일 아이템 ‘붉은 왕관’이 두 개 존재 합니다. ]
[ 멸망의 탑이 이상 현상을 감지합니다. ]
[ 멸망의 탑이 진정한 탑의 주인을 가려냅니다. ]
파삭!
[ 탑의 선택에 따라 ]
[ 플레이어 이진영이 초월신의 자리에 오릅니다. ]
아스리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붉은 왕관이 바스라졌다.
그런 그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진영이 말했다.
【 그러면 아스리엘, 넌 내게 뭘 줄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