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4)
그랑블루.
아포칼립스 이후 대한민국의 실권을 틀어 쥔 최고의 길드.
그곳의 수장 민아영이 스크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초월자 출현이 의심된다는 게 정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에 부하 직원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물량만으로도 우리쪽 헌터들이 감당하기엔 벅찬데 말이야···.”
탑이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바깥으로 나와 영역을 확장하자는 그녀의 의견은 정답이었다. 탑 내에서의 명성을 잃고 추락한 다른 클랜들과 다르게 그랑블루는 그녀의 판단 덕에 대한민국 최대 길드로서 존립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존의 부마스터였던 진철은 거듭된 실책으로 인해 길드장에서 사퇴, 민아영이 그랑블루의 정점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이진영과 맺었던 약속이 그대로 실현 된 것이었다.
길드장이 된 민아영의 눈빛에는 특유의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그녀는 더 이상 어줍잖던 시절의 그녀가 아니었다.
“아, 방금 막 염태준 수호자가 도착했답니다.”
“정말? 후, 다행이네. 세상 참 살아보고 볼 일이야. 염태준이 수호자로 활약도 하고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불과 반년하고도 수개월 전에, 이진영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해결사가 맞나 싶었다. 하긴 그때와 비교하면 그녀 자신의 모습도 달라져 있었다.
어느새 길드장이 되어 까마귀 길드와 함께 나란히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었으니까.
“일단은 지켜 볼 수 밖에.”
민아영은 팔짱을 낀 채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SSS급 위험 지역.
현 최상위 등급 마수들이 포진한 지옥 같은 전장이지만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포칼립스가 진행되며 헌터들의 싸움 방식은 많이 바뀌었다. 본디 공략 대상이었던 게이트는 마수를 쏟고 사라지는 배출구로 전락했다.
이제 헌터들의 임무는 위험지역을 안전하게 토벌하고, 마수로부터 탈환하는 것.
‘수 개월간 지독하게 경험했어. 이제 실수는 없다. 염태준이 지원을 온 이상 우리의 승리야.’
반 년간의 치열한 경험과 선천적인 리더로서 재능이 그녀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마수들의 등장 패턴, 이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헌터의 수, 적절한 클래스의 배분까지 모든 게 파악된 상황. SSS급 위험지역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녀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유일한 변수는 초월자의 등장인데···.’
이미 그랑블루 입장에서 투입할 수 있는 최선의 전력을 위험 지역으로 보냈다.
남은 것은 염태준의 기량에 달렸다.
“초월자가 등장했습니다. 자신을 광멸자 요자도르라고 소개했습니다.”
“계속 주시해. 해당 지역에 있는 헌터들에게 단단히 준비하라고 해.”
긴장된 상황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이어서 소나기처럼 내려오는 빛의 세례에 그랑블루의 헌터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전멸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
“아니, 아직 아니야.”
염태준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광멸자 요자도르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얌태준의 무기 세례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허억! 괴, 굉장합니다!”
“역시, 그가 수호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군요.”
“길드장님 예상대로입니다!”
스크린을 통해 위험지역의 상황을 지켜보던 간부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민아영의 눈동자도 미세하게 커졌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염태준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어 있었다.
“저희가 이긴겁니까?”
요자도르가 도망치고, 상황이 정리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직 기뻐하기엔 일렀다. 고심하는 듯 하던 민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헌터들에게 나머지 마수들을 처리하되 깊숙히 들어가지 말라고 전해.”
그 예상은 정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쳤던 광멸자 요자도르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
“까마귀와 레드 리버에 지원 요청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수호자 김지훈으로부터 지원 요청 연락이 왔습니다.”
지켜보던 간부들과 부하 길드원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말에 민아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지훈이 거기에 있어? 다른 지역에 가 있는 거 아니었어?”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 잠깐만 저것 좀 봐!”
누군가가 가리킨 스크린의 한 구석에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해당 지역의 드론을 중점적으로 확인하자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낸 남성이 보였다.
눈에서 붉은 이채를 발하며 빛의 군대를 폭탄처럼 짓이기는 남자.
“뭐, 뭐야? 저 사람?”
“처음보는 헌터인데, 누구 아는 사람있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 저 사람은!”
“주오령이 돌아왔다!”
“주오령이 누굽니까?”
“당장 화면 위로 돌려!”
화면을 살핀 민아영의 눈을 번쩍 뜬 채로 소리쳤다. 주오령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빛의 군단 안으로 뛰어든 남자는 빛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급하게 드론을 움직여 그를 다시 찾아냈을 때, 민아영은 중얼거렸다.
“이진영이다. 이진영이 살아 있었어.”
인류를 탑 바깥으로 움직이고,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멸망의 탑을 거듭해 공략하던 그가.
최후에는 초월자와 대적하다 사라졌던 그가 돌아왔다.
그 이후로 펼쳐진 광경은 더욱 놀라왔다.
“더 강해졌단 말이야?”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헌터들을 향해 달려오던 수 천의 군대가 일제히 방향을 틀어 진군하기 시작했다.
군대의 창 끝이 초월자 요자도르를 향했다.
그들의 발걸음에 대지가 울리고, 그들의 함성에 대기가 찢어졌다.
초월자의 군대가 한순간에 진영의 손에 들어왔음은 누가봐도 명확했다.
“당장 까마귀 길드랑 레드 리버에 긴급 회의 소집해!”
전설이 돌아왔다.
* * *
한편,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까마귀 본부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SSS급 지역, 토벌 완료입니다. 침탈률 0%. 살아 남은 적대적 개체 없음.”
“현재 인터넷상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문의 메일이 빗발치고 있어요.”
“저희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건 정말···.”
환호와 탄성이 뒤얽혀 뜨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자신의 군대에 의해 쓰러지는 초월자 요자도르가 안쓰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전투였다.
꿀꺽.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임재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차원이 다르잖아.’
옆에 있던 유수아가 그런 임재천을 흔들었다.
“그 길드장님. 벌써 오셨어요. 그런데···.”
“아아, 고생하셨을텐데 제일 좋은 숙소로 잡아 드려.”
“아뇨, 그게 아니라.”
“임재천!”
멀리서 터져 나오는 고함에 유수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 진영 일행과 함께 다가오는 민아영을 확인한 임재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이야.”
민아영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성큼성큼 임재천에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진영씨가 돌아왔다는 걸 너희끼리만 알고 있을 수가 있어?”
“그 뭐라고 해야하나. 상황이 워낙 긴급하기도 했고···.”
“아니, 용서가 안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를 유수아가 끼어들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그제서야 노기를 토해내던 민아영이 한걸음 물러섰다.
“크흠, 하여튼. 수아 봐서 내가 참는 줄 알아.”
“자자, 여러분도 이리오세요.”
그런 민아영과 임재천을 지켜보던 진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원래 아는 사이였던가?”
“아포칼립스 이후 얽히다보니까 친해졌나봐요.”
김지훈의 설명에 민아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친하긴 무슨. 그보다 진영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 안쪽에서 들으면 되는거죠?”
아무일도 없었단 듯이 손을 내미는 민아영을 보며 진영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슬슬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네요.”
* * *
“이제 남은 건 정말 공략 뿐인거군요.”
까마귀 길드 회의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지금까지 진영의 행적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나니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가 됐다. 진영이 입을 열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하면 되는거니까요.”
세상에 탑이 도래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5년도 안 된 지금 탑이 붕괴되고, 공략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변화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략 된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민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보면 인류는 지금의 생활에 적응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탑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렇죠,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의도하는 플레이어들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탑 공략을 저지하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가 되며 얻은 능력. 탑이 사라진다면 이 능력 또한 사라질 확률이 컸다. 현재 헌터들이 받는 대우는 국가적 영웅에 못지 않다.
헌터들은 유일하게 마수를 대응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이 쌓아 올린 부와 명예는 지금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위치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고 하면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그 정점에 있는 임재천과 민아영이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탑을 공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십 년 안에 인류는 멸망합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두에게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부분에 대해선 염태준이 말했던 대로였다. 세계가 멸망한다면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있겠는가.
그러나 그들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탑이 공략 되기를 원하는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바로 리암에게서요.”
대예언가 리암.
진영은 그의 부탁을 받고 멸망의 탑 내부의 ‘다크 스컬’이란 조직을 붕괴 시켰다. 조직의 배후에는 초월자가 존재했기에 회귀 전 리암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크 스컬을 뿌리 뽑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진영에 의해 다크 스컬이란 최악의 조직이 사라지며 리암의 능력은 전 세계를 아우르게 되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회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까마귀 길드원이었다.
“대예언가 리암에게서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관련된 서류도 메일로 받았는데 여기 출력해 놨습니다.”
진영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암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 소름 돋았어요."
"리암도 리암이지만, 진영씨도 진영씨네요."
자연스레 회의실 모두의 시선이 진영에게로 모였다. 진영은 빙긋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어 갔다.
“리암은 제가 돌아 온 걸 알고 있었을겁니다. 그리고 탑을 공략하기 위한 공략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요.”
서류를 건네 받은 진영이 모두에게 한장씩 돌렸다.
“마찬가지로 저희를 방해할 세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암이 막아낼 겁니다.”
리암은 세계를 구하고자 했고 그 이해관계는 진영과 정확히 일치한다. 진영은 서류를 책상 위에 두고 툭 건드렸다.
“저희가 신경 쓸 건 탑 공략에 나설 최후의 10인의 선정 뿐입니다.”
모두가 탑을 공략할 필요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나 탑 99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략대가 필요했다.
“공략대 10인이 99층까지의 길을 엽니다. 물론 저는 공략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렇다면 진영씨는···?”
광멸자의 군대를 훔쳤다.
이제는 탑의 초월자들도 모두 진영의 존재를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손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그가 초월자들이 쌓은 모든 것을 훔치려든다는 것조차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저는 초월자 군단과 전쟁을 합니다.”
왼손을 꽉 쥔 진영이 그렇게 말했다.
[ 멸망의 탑의 초월적인 존재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그런 진영의 선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모두의 앞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멸망의 탑에 대한 초월자들의 믿음에 금이 가고 있단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