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1)
무너져 내리는 탑의 모습은 공허 속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곳은 멸망의 탑과 세계의 일체화가 거의 이뤄지고 있었고, 현재 세계는 아포칼립스의 초입에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우선은 상황을 좀 더 명확히 살펴 볼 필요가 있겠어. 이 일대를 돌아보자.”
“그러지.”
진영과 주오령은 도시 내부를 걸어다니며 상태를 살폈다. 무너진 건물도 있는가 하면 멀쩡한 빌딩도 꽤 많았다. 근처 식당에 놓여 있는 전자 시계에서 날짜를 확인할 수 있었다.
“······6개월이 지났어.”
실제로 공허에서 보낸 시간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바깥 세계는 더욱 빠르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멸망의 탑 내부에서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경우야 꽤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멸망의 탑의 축을 부쉈다. 사람들이 멸망에 대비하고 적응할 시간을 주었다.
“사람이 없군.”
높은 가로등 올라가 주변을 살피던 주오령이 말했다. 도시 전체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초조할 필요는 없었다. 많은 클랜이나 길드가 이미 지상으로 내려왔을 거다. 멸망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최악의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문명이 짓이겨지고, 대지가 마수에 의해 초토화 될지라도 끝까지 남는 이들은 있는 법이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이야기였다.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고나니, 확신이 들었다.
‘최근까지의 생활감이 남아 있어.’
건물 안에 놓인 쓰레기나, 식당의 음식 재료들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한 순간에 사라진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시체가 없다는 거다.’
마수들의 습성은 천차만별이라 일률적으로 자신이 죽인 사냥감을 청소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끄으으···.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주유소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젠장.’
안좋은 징조였다. 다리를 질질 끌고, 침을 흘리며 얼굴은 썩어문드러진 시체 한마리가 일행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좀비였다.
“내가 처리하지.”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다. 좀비 숙주에게 완전히 감염된 일반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콰직!
주오령의 주먹 한 번에 좀비의 머리가 뭉개졌다. 녀석은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탑에서 나온 괴수인지, 이 근처에 많은 좀비들이 숨어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이 도시에는 많은 수의 마수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꽤 많다. 우선은 이 중에서 대장격이 되는 녀석들을 먼저 찾아내야겠어.’
진영이 가진 ‘룰 오버’를 사용하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다. 공허 속의 플레이어들은 폭룡왕 벨카론의 군대의 지원을 받아 멸망의 탑과 맞서 싸웠다. 진영은 자신만의 군대로 초월자들에게 대항할 작정이었다.
“나와라, 공허룡.”
- !!!
진영의 말에 본드래곤 한마리가 공허를 뚫고서 밖으로 나왔다. 녀석은 허공을 부유하며 뼈로 만들어진 날개를 위엄 있게 펼쳤다. 그런데 어째···.
작았다.
드래곤 뺨치게 크던 공허룡이 비둘기만하게 변해 있었다. 귀엽긴한데, 특유의 위압감 사라져 버렸다.
‘공허와 이곳의 환경이 달라서 그런건가.’
녀석 또한 멸망의 탑을 피해, 공허 속으로 숨어든 생명체였다. 진정 강했다면 초월자의 반열에 있었겠지.
‘흠.’
최전선에 서서 전투를 담당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새로운 녀석을 찾아보는 수 밖에.
그래도 쓰임새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드론 같은 느낌으로 쓰기엔 딱 좋겠네. 공허룡 이 일대를 전부 수색하고 돌아와라.”
- !!
녀석은 특유의 마력을 방출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수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수색의 결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위잉!
사람을 발견한 공허룡이 진영에게로 돌아와 마력을 뿜어냈다.
‘생존자인가?’
공허룡이 알려준 포인트를 향해 주오령과 함께 달려 나갔다. 길을 가로막는 좀비 10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나서야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마수들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저기요!”
진영이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도 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 반응이 좀 이상했다.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고, 경계하는 것도 아니었다.
“허억···. 일 났네.”
* * *
“대체 왜 아직까지 여기에 있는 겁니까?”
남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진영을 나무랐다. 이해가 안 가기는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일 났네. 잠깐만요.”
그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연락을 시작했다. 통신망도 무사하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최소한 플레이어들의 시스템으로 유지는 되고 있다는 말.
“그러니까 지금 아직 못 빠져나간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이제 시작 될텐데, 저 혼자서는 못지켜요.”
짜증은 내고 있지만, 적대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스마트폰과 통신망이 살아 있으면, 플레이어 커뮤니티도 살아 있을 확률이 컸다. 이 또한 진영이 레드 리버에게 맡겨둔 일 중 하나였다. 아포칼립스에서의 생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커뮤니티.
회귀 전에는 인류가 40층을 넘어서야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팅-!
예전에 했던 것처럼 진영은 커뮤니티를 불러왔다.
커뮤니티는 정상 작동했다.
다양한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정보가 교환 되는 중이었다.
- 아포칼립스에서 킹반인이 살아남는 방법(스압)
- 일반인 각성자 늘어나고 있다고 하던데?
- 지금 수호자 위치 아는 사람?
- 그랑블루, 까마귀 S지역 토벌 중이래. ㄷㄷ
정상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아포칼립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인류는 잘 버텨내고 있었다.
“크흠, 두 분은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제 이름은 문강수고요. 까마귀 소속 헌터입니다.”
전화를 마친 문강수가 진영과 주오령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고보니 그의 겉옷 안에는 까마귀 길드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노란 바탕에 검정색 까마귀 아이콘.
그래서 그런지 행동에도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그렇게 서 있을 시간 없습니다. 지금 여긴 S급 위험지역으로 분류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 다 대피하시는 동안 대체 어디서 뭐하고 계셨던 겁니까?”
“S급 위험지역···?”
“네, S급 규모의 마수들이 출몰할 겁니다. 저희도 헌터들도 감당이 안되는 놈이 우글우글 나온다는 겁니다. 뉴스도 안보시는 겁니까?”
진영과 주오령을 은근 무시하고 있었지만, 문강수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 자리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은 시민 두 명을 구해냈다는 생각에 조금 들 떠 있기도 했다.
“흠, 그러면 혹시 임재천씨하고 연락할 수 있을까요? 이진영이 돌아왔다고만 전해주면 될 겁니다.”
진영의 말에 문강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진영···? 그게 누군데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기는한데.”
“······.”
“그리고 길드장님한테는 아무나 연락 못합니다. 우선은 여기가 토벌 될 때까지 저랑 있으셔야 합니다.”
6개월이면 많은 일이 있었을 시간이었다. 멸망의 탑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마수들에게 죽어가는 이들은 한 둘이 아니다. 한 때 영웅으로 칭송 받던 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잊혀지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공허의 공간을 갔다 온 이후로, 격을 숨길 수 있게 됐어.’
문강수가 진영을 보고도 멀쩡히 마주한다는 것자체가 그 증거였다. 주오령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싶었다. 일단 더 상황을 파악하고자 문강수와 함께 안전구역으로 이동하려는 그 때.
“야, 너 거기서 뭐해!”
“아, 지금 시민분들 보호하고 있습니다.”
문강수의 동료로 보이는 여성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진영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야, 아직도 대피 못하신 분들이 계셨어?”
다가온 그녀는 웃으면서 문강수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곧 수호자님께서 도착하실테니까, 안전구역 내부에 숨어 있······.”
쾌활하게 말을 이어가던 여성이 진영과 주오령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갑자기 굳어졌다.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어? 어?”
그녀는 주오령과 진영을 계속해서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갑자기 정보창을 켜고 헌터 커뮤니티를 뒤지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거지?”
주오령이 의아하게 쳐다볼 때 즈음,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두, 두 분 다 살아 계셨던거군요.”
놀라움을 넘어 감동까지 느꼈다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문강수가 어리둥절해 했다.
“뭔데요? 이 두 사람이 누군데요? 연예인?”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각성한지 얼마 안되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녀는 억지로 문강수의 머리까지 붙잡고 인사를 시켰다.
“아, 대체 뭔데요?”
“멸망의 탑의 전설이라고 하면 알아 듣겠어?”
“네? 이 두 사람이···. 지, 진짭니까?”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지려는 찰나.
쿠구구구!
돌연 땅이 울리며, 거센 진동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헌터인 문강수가 이리저리 휘청일 정도였다.
“시, 시작 됐나봅니다. 선배랑 두 분 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안전구역으로 가죠.”
“그래, 그래야겠다. 아, 앞에 두고 저희끼리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이진영씨랑 주오령씨 맞으시죠?”
“그렇습니다. 근데···.”
안전 구역으로 갈 게 아니라 마수와 싸워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구궁!
거대하디 거대한 뱀 하나가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왔다. 녀석은 순식간에 40층짜리 빌딩 하나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크기는 여지껏 보았던 뱀 마수 중에서도 가장 컸다.
콰드득!
녀석이 힘을 주기 시작하자 빌딩의 일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의 상징이 막대 과자처럼 금이 가고 있었다.
“저걸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영의 말에 강문수와 우연화가 벙찐 표정을 했다.
“어, 음···.”
“역시 전설은 생각부터가 다르시군요. 그런데 괜찮습니다. 수호자님께서 도착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보다 저희는 어서 까마귀 길드에 연락부터 넣죠. 이진영씨가 돌아 왔다는 사실을 알면 난리가 날 겁니다.”
아무래도 그 수호자란 사람이 상당히 강력한 모양이었다.
‘저 정도급의 마수를 처치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을텐데.’
그래도 마수들이 출몰하는 세계에서, 전체적인 체계는 잘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하고 난 뒤, 마수를 토벌한다는 단순한 작전도 상황이 극악에 치달으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혼돈 대신 질서가 정립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걱정마시고 이리 오십쇼! 수호자님은 장난 아니니까요. 아마, 두 분보다 강할지도 모릅니다.”
“야, 임마···. 수호자님은···.”
쿠구구구!
우연화가 강문수를 타박하려고 할 때에 다시금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진 속에서 진영은 똑똑히 보았다. 어느새 빌딩 옥상에 도달한 플레이어의 모습이.
“수호자님이다!”
- 카아아아!
수호자를 자신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판단한 거대 뱀이 입을 벌려 경고 했다. 그러나 수호자는 그 위협적인 기세에도 아무렇지 않게 뱀의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자.
거짓말 같은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와아, 미친! 수호자님!”
“조용히 좀 해, 임마!”
뱀이 감싸고 있던 빌딩이 사라졌다. 몸을 지지하고 있던 빌딩이 사라지자, 뱀의 자세가 기우뚱하며 무너졌다.
수호자는 잽싸게 뱀의 머리를 타고, 하늘 높이 점프 했다.
- 캬아?!
뱀의 크기를 압도하는 거대한 빌딩이 뱀의 머리 위에 생겨났다.
피할 틈도 없이 빌딩 한 채가 그대로 뱀에게로 떨어졌다.
쿠구구구!
건물이 부서지며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충격파.
진영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빌딩의 꼭대기에 서 있는 짐꾼 김지훈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