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령(2)
“도망쳐라.”
그 말과 함께 주오령이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질주였다.
‘주오령 입에서 도망치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주오령의 뒤를 따라잡으며 진영은 뒤를 돌아봤다. 소년 주오령이 미친듯이 따라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타임 패러독스 같은 걸 걱정한건가?’
그러나 여긴 공허 안이다. 진짜 과거 같은 게 아니다. 싸우면 싸웠지, 도망이라니. 의아함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근처에서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쿠구구···!
‘어쨌든 꼬맹이 주오령이 우릴 따라 오고 있다.’
그것도 죽일 듯한 기세로. 고작해야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달리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았다.
'더럽게 빠르군.’
이곳의 생물에게 능력치가 적용되지 않는다곤 해도, 달리는 속도까지 느려진 것은 아니었다. 꼬맹이 주오령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쿠웅!
“이쪽이다.”
앞서 달려 나가던 주오령이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숲 안쪽으로 갑자기 꺾어져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꿔 울창한 숲 안으로 몸을 숨겼다.
“······.”
진영이 사라지자, 꼬맹이 녀석은 자리에 멈춰섰다.
킁킁.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완전 맹수가 따로 없군.’
“근데···. 왜 숨어야 되는거냐?”
진영의 물음에 주오령이 눈을 꿈뻑였다. 대답은 금방 나왔다.
“못 이길 것 같다.”
그 주오령이 못이기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누구도 아닌 어렸을 적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콰앙!
나무들 틈에서 떨어져 내린 꼬맹이가 진영의 등허리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크윽!”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이게 무슨···!’
초월급 능력치가 의미가 없게 느껴질 정도로 고통이 심각했다. 진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주오령은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꼬맹이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봐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주오령의 주먹이 빠르게 꼬맹이의 콧잔등을 스쳤다. 꼬맹이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빼 치명상을 막았다. 둘은 서로 탐색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쾅! 콰광!
공방을 주고 받는 둘에게선 무쇠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곳은 확실히 뭔가가 다르다.’
싸움을 구경하던 진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력이나 체력 등 멸망의 탑에서 쌓아온 능력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공허 속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공간이었다.
‘빠져나가려면 보물에 의존해야하나···.’
진영은 창조의 걸쇠를 꺼냈다. 새하얀 빛이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 불완전한 공허 속에서 살아남게 해준 것이 이 보물이니, 나가는 출구 또한 보물의 의지에 달려 있을 터.
“주오령! 보물의 빛을 따라 움직이자!”
“알았다.”
그 말에 주오령이 어린 자신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렸다.
그대로 다시 질주. 보물의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쉴 틈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쫓아 오는 거지? 지치지도 않나.”
문제는 꼬맹이 주오령이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는 것. 벌써 해가 다 떨어져가는데도 녀석은 여전히 진영과 주오령을 쫓아왔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갈거다.”
과거를 떠올리는 주오령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쨌거나 이곳은 과거 주오령이 머물렀던 곳이며, 시간을 보냈던 장소였다.
여지껏 궁금했던 것을 물을 차례였다.
주오령은 누구인가.
맨 손으로 마수를 찢고, 보스조차 초인적인 힘으로 쓰러뜨리는 압도적인 강자.
그의 강함은 진작에 인간을 초월해 있었다.
자신만의 강함을 추구하며 탑의 아이템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탑을 공략하고자 한다.
“주오령, 여긴 대체 어디지? 그리고 넌 대체···.”
쿠웅!
말이 끝맺어지기 직전, 돌연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둘 앞을 가로막았다.
“오령아! 돌아갈 시간이다! ······어?”
그렇다. 아무리 주오령이라고 한들, 이 숲에 혼자 있을 리가 없었다. 보호자가 있는 게 당연했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길을 가로막은 남성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너는······.”
등에 큰 창을 메고, 동물의 가죽을 뒤짚어 쓴 그의 눈이 죽은 사람을 본 듯 커졌다. 덩달아 진영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은···.”
갓난아기와 함께 또 다른 공간 속으로 사라졌던, 이전 세계의 플레이어가 진영과 주오령의 눈 앞에 있었다.
“오든?”
* * *
당연한 사실이지만 오든은 진영의 앞에서 사라졌을 때보다 나이가 많았다. 희끄무레한 머리와 수염이 그를 더 나이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하하하! 이런 우연도 다 있구만! 정말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어, 거기 청년도 편히 앉게나. 자네는 우리 아들이랑 많이 닮았군.”
“······.”
오든을 만나고 나서부터 주오령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오든은 그러거나 말거나, 근처에서 나무를 긁어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 타닥.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우걱, 우걱.
꼬맹이 주오령은 자신이 잡아 온 고기를 구워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진영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오든이 주오령의 아버지였단 말이야?’
오든은 다음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다음 멸망의 탑의 끝을 보기 위해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 때 그 갓난아기가 주오령이었다니. 심지어 이름도 전혀 다르지 않은가.
“오든, 만나서 반갑긴하지만 저희가 의도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니라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여긴 어딥니까?”
“그때, 그때라고 하기엔 내 입장에선 꽤 됐지만 아무튼 자네도 보지 않았던가. 내 연인이 가지고 있던 시간의 마석. 거기에 담긴 마력을 사용해서 나는 멸망의 탑에 숨겨진 공간을 열었네. 그게 여기지.”
간만에 사람을 만나는 게 반가운 듯 오든은 미소와 함께 멧돼지 고기를 한움큼 잘라 각자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하지만 음식이나 먹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여기 있는 마수들에겐 공격이 통하지 않더군요. 반면, 댁의 아드님은 아무렇지 않게 잡던데···. 여기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음, 이곳도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소망과 의도에 맞게 변형되었지.”
“변형 되었다고요?”
멧돼지 고기를 뜯어 먹으며, 오든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생활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이전 세상에서 나는 도망자이자 실패자였지. 그렇다고 이 다음까지 실패할 순 없지 않은가? 이 녀석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오든이 꼬맹이의 머리를 마구 헤짚었다. 꼬맹이는 귀찮은 내색도 안하고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 공간에 있으니, 많은 걸 보고 들을 수 있더군. 자네가 아스리엘을 쓰러뜨렸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탑 공략이 끝끝내 실패했다는 것까지 말이야. 예상했던 바였지.”
그가 고개를 저었다. 폭룡왕과 유리엘도 결국 탑을 공략하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공허 마법. 그건 대단했지. 하지만 결국 플레이어들은 탑을 공략하지 못했어. 벨카론은 초월의 좌에 올랐기에 탑에 거역할 수 없었고, 유리엘 혼자로서는 공허 마법을 펼칠 수 없었으니까.”
오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은 결국 탑의 시스템을 벗어나는데 실패했어. 그들의 마지막 전투에서 나는 자연스레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네. 탑을 공략하려면 탑의 시스템에 기대어서는 안 돼.”
그는 자신의 아들을 한 번 살피고서 말을 이었다.
“능력치, 스킬, 특성, 클래스···. 이 모든 것들이 가진 근본적인 힘은 탑일세. 탑이 건네준 힘이, 탑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란거겠죠.”
“그래, 그래서 나는 내 아들에게만큼은 탑을 공략할 수 있는 진짜 힘을 길러주고 싶었던걸세.”
* * *
다음날, 정오.
진영과 주오령은 공간 끝자락에 있는 절벽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고오오···.
흉흉한 기운이 끊임 없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능력치와 스킬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장소라 그 흉흉함이 더 체감 되는 기분이었다.
“저 아래에 공허룡 알테온이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군.”
주오령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어젯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주오령은 딱 한가지 질문만을 오든에게 던졌다.
- 왜 이름을 주오령이라고 지은거지? 네 이름은 오든 아닌가?
오든은 자신의 아들을 쓰다듬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 자네는 별걸 다 궁금해 하는군. 이곳에 있으면 다음 세계에 대한 지식도 미리 알 수 있다네. 그곳에서 다른 플레이어들과 섞이려면 그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할테니 내 이름 오든과 같은 ‘오’자 돌림으로 만들어줬지. 참고로 내 이름도 정해 놨네. 주오등이라고. 어떤가?
그러나 나는 주오등이라는 플레이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오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1층부터 죽었으리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꼬맹이 주오령이 잠에 들고, 오든은 씁쓸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 이 녀석이 자니까 하는 말인데···. 미래에서 왔다고 그랬으니까 특별히 하는 말일세. 혹시 이 놈을 마주하게 되면 잘 부탁하겠네.
- 오든씨도 넘어가시는 거 아닙니까?
오든은 주머니에서 붉은 보석을 꺼내 보였다. 아공간으로 들어 올 때 사용했던 보석이었다.
- 나는 못 가네. 마력이 희박하다시피 한 이곳에서 저 녀석 한 명을 내보낼 힘을 모으는데만 해도 십 년이란 세월이 꼬박 걸렸으니까.
- 그러면 10년 뒤에는···.
- 운이 좋다면 나갈 수도 있겠지만, 불청객 하나가 자리를 잡아서 말일세. 공허룡 ‘알테온’. 그 놈이 이 공간을 잡아 먹기 시작했으니.
절벽 아래를 바라보는 주오령의 눈빛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곳은 진짜 세계가 아니다. 공허의 기억이 잠든 가짜 세계다.
그럼에도 주오령은 구하고자 하고 있었다.
혼자 남게 될 꼬맹이 주오령을 위해서.
“5년이었다.”
주오령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5년 동안, 또 다른 공간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도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탑을 공략하면 무슨 뜻이든 이룰 수 있다고 했으니까.”
진짜 세계의 오든은 살아 있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순 거짓말이었군.”
오든이 단련 시켜준 육체가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거짓말이었지만 주오령은 그 덕에 살아남았다. 때문에 끝까지 탑을 공략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문에 주오령은 이곳에서만큼이라도 공허룡을 토벌하고자했다.
고고고고고···.
낯선 침입자를 발견한 공허룡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절벽 아래 쪽에서 뼈로 이루어진 와이번 수 십 마리가 날아 오르기 시작했다.
진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여지껏 궁금했던 그것 또한 이제는 물어 볼 때가 됐다.
주오령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가장 큰 이유.
“0층에서 99명을 죽인 게 사실이야?”
그 말에 주오령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파트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주오령, 그는 멸망의 탑을 공략하기 위해 키워졌고 그렇게 자라났다. 그가 가진 특수한 힘은 탑 내부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신화준이라는 장애물에 가로막혔던 적도 있었으나, 진영에 의해 과거는 지워졌고 다시 쓰여졌다.
콰앙!
그가 거센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본 와이번에게로 뛰어들었다.
콰직!
말릴 새도 없이 주오령의 주먹이 와이번의 두개골을 깨부쉈다. 사냥터를 누비는 맹수처럼 그의 공격은 사나웠다. 주오령이 가지고 있던 본연의 힘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진영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폭룡왕은 내 힘이 시스템에서 벗어났다고 말했었지.’
벨카론. 그가 죽는 순간에 분명히 그리 말했었다.
탐욕의 왼손에 깃든 이계의 힘은 멸망의 탑이 주관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난 힘.
주오령이 본 와이번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끄는 사이.
‘그렇다면 분명히 성공한다.’
절벽 아래로 진영이 몸을 던졌다. 악한 기운이 넘실 넘실 피어나는 절벽의 아래로. 진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증오로 뭉친 검은 덩어리가 바로 공허룡의 둥지였다.
푸욱.
구름 속을 파고들 듯 진영은 그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자네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그러다가 진짜 죽어!”
절벽 위에서 뒤늦게 달려 온 오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주오령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본 와이번을 깨부수고, 산산히 조각 내고서도 새로운 표적을 향해 뛰어 올랐다.
얼굴이 새파래진 오든이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 고고고고고······.
다시 한 번 짙은 진동이 일대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
깊숙한 절벽 속에서 고막을 찢고 심장을 터트릴 듯한 포효가 공간 전체로 울려 퍼졌다. 뼈다귀만 남은 앙상한 드래곤이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공허룡.
뼈만 남은 녀석의 몸에는 옛 마도사들이 새겨 넣은 수 많은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허의 에너지를 축내며 살아가는 녀석은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만한 이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허룡을 마주하는 오든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었다.
“대, 대체 어떻게 한건가? 무슨 마법, 아니 요술을 부린거지?”
진영이 당당하게 공허룡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공허룡은 마치 주인을 대하듯 진영을 안전하게 태우고 있었다.
뿔을 붙잡은 진영의 왼손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공허를 못 빠져나갈 걱정은 이제 안해도 될겁니다..”
초월신 아스리엘을 쓰러뜨리고 새로 습득한 ‘룰 오버’.
진영의 특성은 이계의 힘에서 왔다.
본래대로라면 멸망의 탑에 존재하지 않았을 기술과 부가효과들이었다.
그렇기에.
왼손에 깃든 이계의 힘은 마수의 마음조차 훔쳐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