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령(1)
【 커헉! 】
공허를 뚫고 나타난 주오령의 일격에 아슬아슬하게 이뤄지고 있던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아스리엘이 자세가 흐트러짐과 동시에 그가 피를 쏟아냈다.
진영의 힘이 아스리엘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 어째서···. 네 놈이 대체 뭐길래! 】
아스리엘은 자신의 가호를 지나치게 믿었으며 때문에 진영의 능력에 대해 방심하고 있었다. 진영이 아무리 많은 힘을 가져간다 한들, 그의 초월력으로 짓눌러 뭉개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우세하게 이어지던 균형은 주오령의 등장으로 깨어졌다.
【 크헉! 】
진영의 단검이 아스리엘의 본체를 꿰뚫었다.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초월체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부분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아스리엘은 쏟아지는 공격 앞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번 빼앗긴 주도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남김 없이 사용된 초월력을 생각하면 더 이상 아스리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내 힘이 고작 이 정도라니······. 역시 여긴 진짜 세계가 아니구나···. 】
그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공허 속의 세계이기에 아스리엘이 가늠한 자신과의 힘과 실제로 가지고 있는 힘이 달랐다. 그래도 플레이어 하나는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조차 오산이었다.
털썩.
만신창이가 된 아스리엘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변의 모든 천족은 겁에 질려 도망가기 바빴고, 지원을 나왔던 드래곤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저, 저게 아스리엘이란 말이야?”
“맞는 것 같은데···.”
“그 초월자 아스리엘이 플레이어한테 쓰러진거야?”
모든 드래곤들이 경악 속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와중, 허공에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걸 알아챈 진영이 곧장 주오령과 함께 거리를 벌렸다.
‘공허 마법?’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나, 이내 유리엘의 공허 마법이 완성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나왔다.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검은 갑옷을 걸친 폭룡왕 벨카론.
그의 표정에도 놀란 기색이 어려 있었다.
【 뭐지? 정말로 아스리엘을 쓰러뜨린건가? 】
기적적인 일이었다. 멸망의 탑에서 플레이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아스리엘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고 있었던 벨카론의 입장에선 그만큼 놀랍고,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목숨까지 걸어야 할 최후의 승부를 갑자기 나타난 플레이어 하나가 끝내버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진영 또한 초월력을 마주한 영향으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었다. 그래도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스윽-.
아스리엘에게로 다가가 그가 가지고 있던 붉은 왕관을 스틸로 훔쳐 왔다.
[ 붉은 왕관을 훔치셨습니다. ]
[ 훔친 대상의 효과가 굉장히 좋아집니다. ]
초월자의 정점을 의미하는 왕관.
공허 바깥으로 가져나갈 수만 있다면, 멸망의 탑 공략의 판도자체를 뒤집을 수 있다.
[ 초월신 아스리엘의 좌를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
[ 탑의 정점이 당신에게 굴복하였습니다. ]
[ 이계의 힘이 당신의 힘에 감응하기 시작합니다. ]
초월자 아스리엘을 쓰러뜨리자, 진영의 특성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힘이 진영에게로 이어졌다.
업적과, 역사가 그것들을 받아 마땅한 자에게로 이동 시키고 있었다.
[ ‘특성 : 탐욕’이 최후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
[ 훔친 대상의 효과가 압도적으로 좋아집니다. ]
[ 스틸에 부가효과가 추가 됩니다. ]
마지막으로 새로운 부가효과가 추가 되었다.
[ ‘스틸 : 룰 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
‘이건···.’
효과를 확인한 진영의 눈이 커졌다.
진영의 왼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특성의 마지막 단계.
‘미쳤군.’
그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멸망의 탑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 정도로.
* * *
벨카론의 성.
주오령과 이진영의 앞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아스리엘을 쓰러뜨린 보답으로 벨카론과 유리엘은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입에 맞는지 모르겠군. 아, 한 쪽은 잘 맞나보군.”
우걱우걱.
주오령은 눈에 보이는대로 음식을 흡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폭룡왕 벨카론이 흥미롭다는 듯 살폈다. 진영이 쓰러뜨렸던 벨카론과는 달리 이곳 벨카론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축을 지키고 있던 그는 미치광이나 다름 없었다.
축을 지키고, 진영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군단까지 죽여 없앨 정도로.
‘그가 사용했던 공허 마법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지.’
조금의 실수라도 있다면 스스로를 집어 삼킬 정도로 파괴적인 마법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벨카론이 선보인 공허 마법은 안정적인 동시에 균형적이었다.
“이제 남은 건 탑 공략 뿐이네요.”
유리엘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아스리엘이란 거대한 적이 사라진 이상, 멸망의 탑을 공략하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진영은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층 그 너머에 무언가, 넘어설 수 없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 세계의 공략은 이 세계의 인물들에게 맡겨야했다. 진영과 주오령은 본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야했다. 그것을 위해 태고의 조각을 가져다 준 것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공허 마법을 만들어주지 않겠어?”
“벌써요? 좀 더 있다가셔도 되는데.”
유리엘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유리엘에게 대강의 설명은 들었다. 이곳이 실존하는 시간대가 아니란 이야기를 말이지.”
“물론, 그게 저희 존재 자체가 가짜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애매한 이야기죠. 공허 마법을 직접 사용해 본 벨카론은 더 잘 알고 있을거야.”
벨카론이 유리엘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유리엘의 설명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공허 마법이 완성된 이 세계는 충분히 독립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나를 폭룡왕이 아닌 폭룡신이라고 불러다오.”
“푸핫, 그게 뭐야?”
유리엘이 까르르 웃으며 폭룡왕을 두들겼다.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농담인 모양. 진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그러나 완전히 농담인 것만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진영 네가 아스리엘에게서 취한 것들도 모두 이 세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을 거다.”
“그렇군. 고맙다.”
“차라리 공허 마법을 드릴 수 있다면, 그 쪽 세계의 아스리엘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될텐데 말이에요.”
공허 마법은 스킬이 아니다. 진짜 마법 그 자체이자, 시스템에서 벗어난 사도. 훔쳐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스리엘이 그 힘을 두려워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뇨, 이곳에서 아스리엘을 쓰러뜨리고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바깥의 세계.
그곳에서의 양상은 단순히 아스리엘과의 1대1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초월자들이 숨어 있는 이곳과 달리, 지금 진영의 세계는 멸망의 탑 초기.
‘여러 초월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상황도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에 따른 대비가 필요했다.
한바탕 식사가 끝나고, 떠날 때가 되었다. 주오령도 배를 전부 채웠는지 최상의 컨디션처럼 보였다.
“슬슬, 저희는 떠나겠습니다. 공허를 열어 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죠. 벨카론?”
유리엘의 말에 벨카론이 손 앞으로 초월력을 끌어 모았다.
익숙한 검은 구가 생겨났다.
“여기로 들어가면 될거다.”
“정말 감사했어요. 저희 세계에서 당신의 일화는 영원히 기록 될거에요!”
유리엘이 환한 미소와 함께 배웅해 주었다. 진영은 그들이 멸망의 탑을 공략하는데 성공하고 세계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랬다.
죽은 아스리엘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 포함된 힘자체가 그다지 온전하진 않은 모양. 즉, 멸망의 탑도 공략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진영과 주오령이 동시에 공허 속으로 발을 디뎠다. 무한한 어둠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동시에 둘이 가지고 있던 보물이 선명하게 빛났다.
* * *
숨 막히는 듯한 밀폐감과 함께, 진영과 주오령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일어나자마자 주위를 둘러 본 진영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처음 보는 장소였다. 적어도 멸망의 탑 0층부터 99층까지의 장소는 아니란 의미.
“여긴······.”
주오령조차 미간을 찌푸린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숲 한 가운데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곳이 어딘지 특정할만한 단서는 없었다.
“일단 움직여 보는 게 좋겠어. 어때?”
“동의한다.”
진영이 모르는 멸망의 탑에 숨겨진 장소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장소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건데.’
히든 플레이스도 장소의 이름 정도는 알려준다. 아예 바깥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탑 바깥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몇 분 동안 숲을 달려 나갔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능력치가 초월급에 달한만큼 몇 분이면 당연히 숲의 끝에 도착하고도 남아야 했다. 어쩐지 같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관리자의 열쇠를 사용해 보는 수 밖에.”
탑 내부라면 필시 반응을 할 터. 진영은 허공에 대고 초월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열쇠는 무반응이었다. 멸망의 탑 바깥이나, 내부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공허 어딘가에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건가.”
벨카론이 의도적으로 둘을 외딴 곳에 떨어 뜨리려고 했다면, 유리엘이 진작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성도 없었고.
진영이 여러가지를 고민하던 그때였다.
- 쿠우우!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나무를 쓰러뜨리며 진영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초월신 아스리엘도 가뿐히 쓰러뜨렸다. 멧돼지 따위가 상대가 될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위압감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진영이 피하려는 순간, 그 앞으로 주오령 튀어나왔다.
그가 거대 멧돼지의 단단한 양 뿔을 붙잡았다.
그그극!
주오령이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깊게 패인 자국이 생겨났다.
“!”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었다. 주오령이 멧돼지에게 밀린다니?
“파트너, 뒤를 조심해라.”
- 카오오!
쿠웅!
숲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포식자가 단숨에 뛰어 올라, 앞발로 진영이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호랑이의 앞발이 강타한 자리가 움푹 패여 들어갔다.
진영은 옆으로 이동해 호랑이의 옆구리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쿠욱!
“?”
날카로운 마력을 잔뜩 두른 단검이 가죽에 가볍게 튕겨져 나왔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 논리대로라면, 이 호랑이는 초월신 아스리엘보다 강하다.
휘익!
그러나 진영은 당황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호랑이의 다음 공격을 피해냈다.
우지끈!
발톱이 가볍게 나무 한 그루를 잘라냈다. 등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진영이 자체를 낮췄다.
‘뭔가가 이상한데.’
마력이 통하지 않을 뿐더러, 호랑이 자체의 힘도 일반 동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했다. 크기가 크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그아아!”
그때 멧돼지와 씨름하던 주오령이 멧돼지를 하늘 위로 던져 올렸다. 날아오른 멧돼지가 그대로 호랑이를 덮쳤다.
- 크헝!
쿠우웅.
두 마리의 동물이 부딪히며 그대로 쓰러졌다. 이것 또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주오령,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군. 우리는 그대로인데 마수들의 향기가 전혀 달라졌어.”
이해 할 수 없는 설명이었으나 재차 물을 시간은 없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호랑이와 멧돼지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 크르릉.
- 꽤애액!
두 마리의 동물은 서로 싸우지 않고 진영과 주오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잠시 상황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도망치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런데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숲 위 쪽에서 자그마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조그마한 소년이 멧돼지의 머리를 발로 가격했다.
멧돼지와 비교하면 한 없이 작은 크기의 남자 아이였지만, 그 공격은 유효했다.
- 꾸오오!
멧돼지가 고통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 크릉!
남자 아이는 나이와 걸맞지 않게 온 몸에 탄탄 근육이 가득했다. 동시에 날렵했다. 호랑이의 앞 발을 잽싸게 피해, 이마에 주먹을 제대로 내리 꽂았다.
딱밤을 제대로 맞은 호랑이의 머리가 바닥으로 푹 꺾였다.
“조심···!”
경고할 필요도 없었다.
소년은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아 달려드는 멧돼지를 피했다.
푸욱!
멧돼지의 뿔이 호랑이의 가죽을 꿰뚫었다. 소년은 뿔이 호랑이 가죽에 박혀 이도저도 못하게 된 멧돼지의 머리에 올라탔다.
이어지는 무자비한 연타.
얼마지나지 않아, 멧돼지와 호랑이가 바닥에 축 늘어졌다.
“야, 저거···.”
야생적이다 못해, 야수 그 자체인 소년의 모습.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맞는 것 같았다.
진영이 주오령을 바라봤다. 주오령 또한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긴가민가한 모양.
하지만 소년이 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주오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간단하게 정리했다.
“저건 어렸을 적의 나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말이었다.
“파트너, 도망쳐야 될 것 같다만.”